"영자씨와 연애 행복했습니다"
■ '꽃보다 아름다워' 노희경 작가 기고

"미안해요 고두심 선생님 다음엔 호강하는 역 줄게요"
말로만 효도하는 자식처럼 나는 못됐다. 정말


‘하늘 아래 모든 어머니들께 이 드라마를 바칩니다.’ 때로는 버거운 짐이지만 서로 품을 수밖에 없는 가족간의 사랑을 따뜻하게 그린 KBS2 ‘꽃보다 아름다워’가 14일 막을 내렸다.

시청률이 한자릿수에 머물렀던 초반, 작가 노희경(38)씨는 “힘들어도 처음 정한 길로 뚜벅뚜벅 가겠다”고 했다. 그런 우직함에 시청자들은 후반 들어 20%를 넘나드는 시청률(최종회 22.7%)로 화답했다. 하지만 작가에게 그보다 더 값진 선물은 “드라마 하는 내내 행복했다”는 연기자와 스태프, 그리고 시청자들 모두의 고백일 것이다. ‘행복한 작가’ 노희경씨가 고두심, 그가 연기한 바보 같은 엄마 영자씨와 보낸 시간을 되돌아본 글을 싣는다.

“장씨 아저씨랑 연애질이나 하고, 엄마가 돼가지고 말이야, 남자나 만나고, 그럼 되냐?”

지난해 12월 초 ‘꽃보다 아름다워’ 7, 8회 연습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고두심, 그녀의 허리를 쿡 찌르며 다짜고짜 내가 건넨 말이다. 평소 융통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그녀(오롯이 내 편견이다)가 내 말을 의외로 쉽게 받는다. “나 연애 안 했어, 차만 마셨어.” “‘차 마시는 게 연애지, 연애가 별거냐?” 나는 연기에 몰입한 나머지 인상까지 쓴다.

“연애 안 했는데… 진짜로 차만 마셨는데… 진짠데.” 그녀는 극중 영자씨처럼 진짜 억울한 표정이다. 그렇게 서너 번의 실랑이를 더 하고, 우리는 웃지도 않고, 그게 농이었다고, 연기였다고 설명하지도 않고 각자의 자리로 가 앉는다.

또 다른 날 연습실 안, 그녀가 앉아 물끄러미 대본을 본다. 나는 말없이 다가가 대뜸 그녀의 손을 잡고 만지작거린다. 동성이라 해도 어색할 법한 행동에 그녀는 별반 이의가 없다. 그냥 말없이 손을 만지작거리는 나를 볼뿐이다. 그러다 내가 담배를 피워 물면 재떨이를 옆에 놔주고, 당신의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라 한 잔 주곤, 다시 제 할 일을 한다. 그렇게 또 일, 이십 분 우리는 각자 앉아있다 그 날의 제 할 일을 하고 다시 헤어진다.

‘꽃보다 아름다워’를 하며 그녀와 난 늘 그렇게 뜬금없이 대화하고, 뜬금없이 애무(?)하고, 헤어졌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식사는요? 요즘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하는 달디단 인사말 한마디 없이. 고백컨대, 드라마를 만드는 지난 6개월 간 나는 그녀의 동의 없이 그녀와 몸살 나는 연애를 했다.

어쩌다는 만나서, 그리고 대부분은 만나지 않은 채 나는 밤이고 낮이고 그녀를 책상 앞에 앉혀놓고 말을 건넸다. 화투 칠래? 장난 할래? 꽃 볼래? 오늘 나한테 혼날래? 날 혼내줄래? 청소 해줄래? 밥 해줄래? 팔베개 해줄래? 안아줄래? 웃어줄래? 나는 요구하고, 그녀는 늘 순응했다. 그렇게 6개월이 가고 종영을 맞았다. 연애할 때 늘 적당선을 모르고 무너지는 나는, 그녀와의 연애로 무려 육, 칠 킬로의 살이 내렸다.

드라마가 끝이 나고 우리의 연애도 끝이 났다. 초처럼 녹아내린 내 살이 다시 붙기 전까진 이번 연애의 상실감에서 쉬이 헤어나오지 못하리라.

종영 모임, 나는 시종 그녀를 살핀다. 상처 난 그녀를 보고 싶다. 나만 다치는 게 억울한, 못된 억하심정이다. 기대에 부응하듯 그녀가 자꾸 운다. 누가 말만 시켜도 울컥울컥한다. 나와 헤어지는 게 가슴에 맺힌 것이길 기대하고 묻는다. “왜 그래?” 그녀는 내 기대를 무너뜨리고, 극중 자식들인 재수(김흥수)와 미옥(배종옥), 미수(한고은) 얘길 꺼낸다. “나 걔들한테 참 많이 사랑 받았는데… 이제 못 보네.”

이상하다, 질투가 나지 않고 가슴만 싸하다. 순간 그녀가 외로운 게 아닌가 걱정이 된다. 그녀의 손을 잡는다. 까칠하다. 얼굴을 본다. 역시 까칠하다. 호강시켜주지 못하고, 맘 아픈 영자씨 역할을 맡게 한 게 큰 죄임을 그제야 깨닫는다. “밥 많이 먹어요.” 그 말밖에 못하고, 나도 목이 멘다.

모임이 끝날 즈음, 그녀가 대뜸 말을 붙인다. “마지막 촬영 날 나 보러 와. 팔당 알어? 팔당 가면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건너면 버스 있거든… 그 버스 있는데… 나 있는데….”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영자씨처럼 두서없이 말을 꺼내고 거두는 그녈 물끄러미 본다. 순간 나는 나보다 그녀가 더 영자씰 사랑했음을 알아차린다. “이제 그만해, 드라마 끝났다.” 안쓰러움을 내가 화로 표현한다. 그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그렁하다. 믿기 싫은 눈빛이다. 그런 그녈 보자니 목이 메다 못해, 가슴까지 뻐근해져 온다.

늘 존경해마지 않는 작가 이금림은 고두심을 참 鞭피?배우라 했다. 김정수는 고두심 같은 배우와 일하는 건 축복이라 했다. 박진숙은 늘 고두심, 언제든 고두심이라 말한다. 나는 선생님들의 그 찬사가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가만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었으니까. 이제 드라마를 마치며 내 걱정은 한가지, 그녀의 건강이다.

고두심 선생님, 우리 또 만나요. 다음엔 내가 진짜 호강하는 역할 줄게. 나는 조금만 더 살면 반드시 효도할 거라고, 그러면서 불효하는 자식처럼, 자꾸 그녀를 이용할 생각만 한다. 못됐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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