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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ㅣ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가 읽고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끄적이는 것을 정작 보고 읽는 것보다도 더 즐기는 나지만, 책장을 덮고 엔딩 타이틀까지 다 봤음에도 '뭐라고 쓸까' 멍해지는 작품이 있다. 너무나도 완벽해서 '재밌다, 멋있다'밖에는 쓸 말이 없는 경우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서 미쳐 내 안에 가라앉은 느낌이 없는 경우의 두가지가 그렇다. 이 소설은 후자의 이유 70에 전자가 30쯤 되는 비율로 벌써 며칠을 뜸들이게 만들었다.
김연수라는 작가의 작품은 처음 읽는 바, 다른 리뷰어들이 말하는 전작과 다른 변화나 문학적인 전환은 모르겠다. 그저,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각종 연애관련 지침서들을 총동원했다는 인터뷰 기사와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제목 때문에 쿨한 연애소설 한편 읽어보자는 심산으로 골라잡았고, 막연한 느낌으로 재밌으나 쉽지 않다는 정도. 너무 쉽게 읽히는게 수상쩍더라니...
원래 유머 속에 감춰진 독설과 또 그 안에 감춰진 진심은 알아채기가 어렵지 않은가. 각종 말장난과 사랑에 관한 잠언들을 넣고빼가며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운명같은 사각관계를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그려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소설의 중심 스토리, 뚜렷한 캐릭터 대비를 보이는 두 남자의 대결구도는 어쩐지 어설프고 상대가 안되는 게임같다. 사랑하는 선영과 결혼하고서도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엄한 팔레노프시스 탓이나 하는 광수의 무대뽀적 투정부리기와 소설가라는 직업답게 참기름친 미꾸라지마냥 살살 빠져나가는 진우의 입담과 상황대처능력 대결은 긴장감 보다는 입가에 웃음기를 머물게 한다. 그러나, 막판에 승리한 자는 '사랑이라니...' 비웃던 진우가 아닌 '사랑해'를 외치는 광수였으니... 경복궁에서 용포를 입고 사진을 찍는 진우가 참으로 처량맞을 따름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각종 광고며 영화의 차용과 매끄러운 입담, 노트 한구석에 적어놓아도 손색없을 표현까지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읽는 맛을 더한다. 게다가 어설프게 가르치려하거나 강요하지 않는 적절한 균형감각까지 지녀 더욱더 유쾌하다.
다만, 광수의 집들이에서 벌어지는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언쟁은 다소 뜬금없고 껄끄러웠다. 냉소와 유머로 포장했으나 여전히 그때를 울궈먹는 80년대 학번들의 소명의식을 봤다면 내가 오바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무슨 문학상의 이번 수상작가가 '김연수'던데, 그의 단편도 몇 편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