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문턱에서 만난 반가운 책과 사람 <불편해도 괜찮아>와 김두식 선생님입니다. 인사동의 호젓한 전통찻집에서 시원한 냉모과차를 나누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마주하는 요즘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아>를 이미 읽으신 분들께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보충 자료로, 아직 책을 만나보지 못하신 분들께는 '인권감수성'을 전할 좋은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마지막까지 원고를 검토하며 꼼꼼하게 수정해주신 김두식 선생님, 반가운 책을 펴내고 좋은 자리를 마련해주신 창비 출판사에 고마움을 전합니다.(인터뷰 진행 및 정리_알라딘 인문MD 박태근)
책을 쓰는 일은, 사람에 대한 안타까움이고 세상에 말을 거는 방법이다
트위터에서 종종 뵙다가 이렇게 직접 만나니 반갑습니다(인터뷰어와 김두식 교수는 맞팔 관계다). <불멸의 신성가족> 때는 알라딘에서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인터뷰를 하니 약간 긴장도 됩니다. 최근에 알라딘에 보내주신 추천도서 잘 보았습니다. <유혹하는 에디터>는 저도 재미나게 읽은 책이라 반가웠습니다. 물론 최근에는 <불편해도 괜찮아>가 가장 반가운 책이었죠. <헌법의 풍경> 이후 5년 동안 책을 내지 않으셨는데(2007년 출간한 <평화의 얼굴>은 <칼로 쳐서 보습을>의 개정판이다) 지난 1년 새 무려 3권의 책을 연이어 쓰셨습니다. 집필에 집중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많이 쓰겠다고 작정하고 쓴 건 아니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겁니다. <불멸의 신성가족>은 희망제작소에서, <불편해도 괜찮아>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제안한 기획인데, 분명한 방향과 틀을 가지고 있어서 쉽게 공감하면서 집중적으로 집필할 수 있었어요. 그 전에는 <헌법의 풍경> 비슷한 책을 만들어보자는 출판사들의 제안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 기획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거든요. 1년 동안 학교에서 집필을 위한 시간을 배려해준 점도 큰 도움이 되었고요.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는 오래 미뤄두었던 작업인데, 국가인권위원회 내부 사정 때문에 <불편해도 괜찮아> 프로젝트가 약간 공전한 덕분에 마무리할 시간을 얻었답니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저에게 행복한 작업이었습니다. 다른 두 권의 책은 한 줄 한 줄 고민과 부담이 많았거든요. 하나의 표현이 자칫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까 걱정이 되어서 말이죠. <불편해도 괜찮아>는 원하는 영화를 실컷 보며 책을 쓰는 프로젝트라 누구라도 하고 싶은 작업이었을 겁니다.
성급한 질문이지만 집필과 관련한 내용이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평화의 얼굴> 서문에서 국가의 본질, 교회의 본질을 말하기 위해 3권의 책을 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의 얼굴>, <헌법의 풍경>,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겠지요. 말씀하셨듯이 그 이후 두 권의 기획물을 출간하셨는데, 하나의 큰 흐름을 마무리한 지금, 선생님께서 새롭게 그리고 계신 계획은 무엇인가요?
사실 아무 생각이 없어요. 지금 대학이 살벌한 경쟁에 놓여 있는데, 특히 로스쿨 전환 이후 강의 부담이 커지면서 대부분의 교수가 일반인과 대화하는 책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에요. 저 같은 경우도 학교에서 계속 살아남으려면 논문도 쓰고 해야 하는지라, 당분간은 전공에 맞는 학문적 글쓰기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선생님께서 계획하고 실행하신 일련의 저작활동이 애초의 목적의식을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제 생각이 이렇게 폭넓은 공감을 얻어낼지 몰랐어요. <헌법의 풍경>도 이렇게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읽히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어떤 의미에서는 남을 위해 책을 쓴다기보다는 제 생각을 정리한다는 의미에서, 저를 위해 책을 쓰는 면도 있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평화주의에 대한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나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늘 불안했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서 좀더 폭넓은 공부를 하다 보니 저의 그런 생각이 이상한 게 아니라 기독교 윤리와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흐름이었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런 깨달음의 과정을 정리한 게 <평화의 얼굴>이죠. 만약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제는 제 책을 읽고 그걸 기반으로 훨씬 멀리 나갈 수 있을 겁니다. <평화의 얼굴> 뿐만 아니라 다른 책도 모두 그렇습니다. 제 작업의 의미라면 그 정도 수준인 것 같아요.
선생님 글을 보면 한 꼭지의 글이나 한 권의 책, 더 넓게는 전체 저작 활동에서 나로부터 시작하는 문제의식을 볼 수 있습니다.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자기고백, 내부고발자의 측면을 볼 수 있듯이 말입니다. 누구나 자기 고민이 있지만 현실에서는 유보하거나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자기 고민을 드러내고 표현하게 만드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가까운 곳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보고 느낀 안타까움이 집필의 출발점이 된 경우가 많아요. 사실 저는 평온한 중산층 가정에서 잘 자랐고 지금도 여전히 아내, 딸과 중산층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제 능력보다 훨씬 잘 된 사람이죠. 그러니 늘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겁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저는 ‘내 인생이 여기까지 잘 풀려온 게 바로 이때를 위한 것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런 책임감을 느끼면 글을 쓰게 되는 거죠.
저는 거대 담론을 싫어하고 이야기를 좋아해요. 추상적이고 어려운 책은 힘들더라고요. 좋은 책은 이야기, 즉 내러티브를 담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수님을 보면 그 분이 잘 준비된 논리로 누군가를 설득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비유를 풀어내실 때가 많거든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그냥 그분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사람들의 생각이 자연스레 바뀌는 방법을 취하신 거죠. 제가 감히 예수님 흉내를 낼 수야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같은 맥락에서 결국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논리가 아니라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학술적인 내용도 포함하되, 이야기 형식을 지키고 싶었는데, 생각같이 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이 인권문제의 장이다
이제 본론인 <불편해도 괜찮아>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여러 주제 가운데 청소년 인권과 여성 인권을 다룬 장이 기억납니다. 청소년 인권은 따님 이야기인데 선생님 딴에는 배려하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고 여성 인권에서는 강의실에서 (사법시험 합격 이후 마담뚜가 접근해온다는 맥락에서 여학생을 배제하는 표현이 되어버린) 마담뚜를 말씀하시다가 크게 얻어맞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서문에서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듯합니다. 앞서 든 예처럼, 살다보면 의식이 작동하지 못해 깨지는 순간들이 있는데 선생님께서는 그런 자각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저는 체질적으로 정답을 싫어해요.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을 보면 어떤 문제를 던져도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훌륭한, 정말 아는 게 많은 분들인데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고 그런 게 좀 불편해요. 대개 제 책들을 보면 문제제기를 해놓고 답이 없잖아요. (웃음) 그게 제 책의 한계인데 실제로 답을 찾기 어렵다는 걸 제가 많이 의식하는 것 같아요. 한 방 맞는 것도 어쩌면 그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하게 만드는 계기라서, 한 방 때려주는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요. 주로 제 처가 그런 역할을 많이 해주죠.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외부적으로 그런 충격을 받지 않고는 자기중심성이 사라지지 않아요.
<불편해도 괜찮아>도 논리보다는 감성에 호소한 책이에요. 판례나 인권 협약을 설명한 게 아니라 이야기거든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이야기가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글을 쓰는 사람이 가르치려 하는 게 아니라 남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을 솔직히 나누다 보면, 거기서 공감이 시작되죠. 그래서 늘 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되는 건데, 생각해보면 그게 또 쉽게 글을 쓰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사실 제 책들은 저의 고민에서 시작해서 제가 그 시점까지 찾은 답들을 얘기하는 것에 불과하거든요. 대단한 사회과학 책이 아니고요. 안타깝게도 사회과학 분야는 훨씬 넓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도 접근성이 떨어질 때가 많아요. 어렵다는 선입견도 있고, 교보문고만 봐도 사회과학 코너가 제일 구석에 있거든요. 사회과학과 문학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어요. 제가 사회과학 코너에서 종교까지는 발전했는데 아직 문학 코너까지는 가보지 못했어요. (웃음) 이 책을 쓰면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이 책의 분류도 여전히 사회과학을 벗어나지 못하더군요. 사람들이 수필을 재미나게 읽고 인문학은 지식을 준다고 생각하는데 사회과학은 피곤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죠. 한번 그걸 넘고 싶어요.
피곤하다는 부분도 이유겠지만,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큰 이유인 듯합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수치나 자료로 표현되니까 불편함을 느끼는 거겠죠.
저는 인권감수성이란 표현에 주목했습니다. 제가 이 책의 소개글을 쓸 때 ‘지키는 인권에서 공감하는 인권으로’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강남에서 논술을 가르치는 제 친구가 인종문제를 다루면서 아이들에게 물었답니다. 지하철을 탔는데 빈 자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백인 옆자리고 다른 하나는 노동자로 보이는 동남아 사람 옆자리인데 어디에 앉을 거냐. 다분히 의도적인 질문이었는데 여학생의 답변이 기가 막힙니다. ‘잘 생긴 사람 옆이요’라고 했답니다. (웃음)
훌륭하군요.
이 책을 보면서 그런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인권이 이미 상식이 되어버려서 ‘인권은 좋은 거야’, ‘인권은 지켜야 해’라는 생각을 강박처럼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상황 말이죠. 그런 면에서 지키는 인권보다 공감하는 인권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남의 인권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죠. 그런데 임순례 감독의 영화 <날아라 펭귄>을 보면 채식주의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상적인 회식문화에서는 채식주의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거든요. 이런 걸 보면 인권이라는 게 생각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결국 그 사람 입장이 되어봐야 길이 열린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공감이 중요하죠. 공감하면 그만큼 실천도 쉬워집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권력의 문제가 생긴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인정하지 않아요. 더 가진 사람은 덜 가진 사람을 억압하거나 전체 상황을 주도하는 힘을 갖죠. 일단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고요. 권력을 가진 사람이 그 권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갖지 못한 사람은 그 상황에서 어떻게 당당해야 하는지 고민이 필요한 거죠. 결국 일상의 모든 국면에서 인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인권감수성이란 말도 이런 맥락에서 제안한 거고요.
아직 멀지만, 인권의 미래는 밝다
여기 오기 전에 알라딘 리뷰와 40자평을 살펴봤는데, 독자들이 인상 깊은 구절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나 따귀 다큐멘터리 같은 감각적인 표현에 대한 호응이 좋고,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라는 명제에 공감하는 듯합니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 이런 표현의 맥락을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부터 말씀드릴게요. 사회가 다원화되다보니 어느 쪽이 옳은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잖아요. 사실 저도 그럴 때 많이 흔들리거든요. 이쪽 얘기 들으면 이쪽 얘기가 맞는 것 같고 저쪽 얘기를 들으면 저쪽 얘기가 맞는 것 같고 말이죠. 그런데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옳은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는 약한 사람의 편을 드는 게 옳다는 원칙을 말씀드린 거예요. 물론 누가 약자인가 하는 문제는 남죠. 아주 거친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약자 기준의 정의 판단은 매우 중요한 인권의식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따귀 다큐멘터리는 그냥 적은 게 아니고 정말 만들어봤으면 좋겠어요. 만들기 어렵지도 않을 거고요. 드라마에 엄청나게 많이 나오는 따귀 장면을 보여주면서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이것뿐이냐고 묻는 거죠. 우리나라 드라마는 연인들끼리 너무 자주 때리거든요. 사랑을 표현하는 것도 노력과 학습이 필요해요. 그런데 기껏 따귀 때리는 걸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죠.
전체 주제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게 동성애자 부분과 병역거부 문제입니다. 동성애자 문제는 기독교인이란 선생님의 위치 때문이고, 병역거부 문제는 <평화의 얼굴>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자 문제부터 말씀을 드리면 예로 드신 영화 <윌과 그레이스>에서 역지사지하는 장면이 놀라웠거든요. 생경한 감각 말이죠. 그런데 말미에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동성애자 문제는 전적으로 프라이버시에 속한 문제라서 이성애자들이 관용하고 말고 할 문제가 전혀 아니”라고. 그런데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근거로 듭니다. 인간은 홀로 떨어져 살 수 없는 데 전체 사회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배려할 수 있느냐 하는 주장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이런 반론에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규범적으로 어떤 행위가 용인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를 말할 때는 기준이 있어야 하거든요. 법학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폭넓은 합의점은 남에게 피해를 주느냐 주지 않느냐 하는 기준이에요. 물론 이런 견해에도 비판의 여지는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나마 가장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에요. 동성애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영역이거든요. 기독교 윤리의 차원에서는 여러 논쟁이 있지만, 그냥 일반 사회의 논리로 이야기하면 동성애자에게 시비를 걸 수 있는 근거는 없어요. 남의 사생활을 보고 불편함을 느낄 이유가 없는 거죠.
병역거부 문제의 경우, <평화의 얼굴> 이후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간 현실에서의 변화나 가능성을 보셨는지요.
그 책이 참여정부 말기에 나왔어요. 그때는 제가 사람들의 심리적 장벽을 넘는 것이 어렵다고 이야기하면 병역거부자를 돕는 분들이나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정책 활동을 하시는 분들께서는 저에게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냐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지금도 4주 훈련만 받고 일종의 대체복무를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4주 훈련을 받고 안 받고 정도의 문제는 금세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거죠. 저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고 오랜 설득이 필요하다 말씀을 드렸거든요. 결국 참여정부 때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고, 이번 정부 들어서는 이런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도 못하게 되었어요. 여전히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정말 그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되다가 사라져버린 듯합니다. 최근에 관련 소식을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당분간 희망은 없는 걸까요?
저는 젊은 세대에 희망을 걸고 싶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나이가 중요한 요인이에요. 예를 들면 제 책도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은 잘 읽지 않아요. 저는 이제 그걸 현실로 받아들여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 나눌 주된 대상은 저보다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저보다 젊은 다음 세대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젊은 세대와 이야기하려면 몸을 낮추고 말을 걸어야죠. 제 책 자체가 그런 ‘말걸기’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병역거부 문제만 보더라도 20대 친구들은 나이 든 분들과 생각이 상당히 다르거든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멀지않은 시점에서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을 열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입장을 떠나 자기를 정직하게 드러내는 게 중요하다
본문 주제에 대해서 하나만 더 여쭤보겠습니다. 영화 검열을 다룬 장에서 영화에 대한 선생님의 절절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다른 장에서는 치밀하게 문제를 파고든다기보다는 공감에 집중하신 듯한데 이 부분에서는 영상물 관리 등급의 역사에서부터 미국의 법률까지 다루시며 열중하는 모습이었거든요. (웃음) 수용자 입장에서 보면 사용료를 지불하면서도 정해진 기준에 맞춰서 보게 되는 상황인데요. 현실에 존재하는 심의 과정을 넘어설 대안이 있을까요?
사전 심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영화도 상영될 수 없는 제도는 잘못된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나이로 획일적인 선을 긋는 것도 문제죠. 다른 맥락에서 얘기를 해보면, 저는 돈을 다 내고 정품 디비디를 사보려고 노력을 하는데요. 저처럼 정품 디비디를 사보는 사람은 뭉개지거나 잘려진 화면을 보지만 어둠의 경로로 구해보는 친구들은 미국이나 유럽의 무삭제판을 마음대로 구해보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돈 내고 사서 보는 사람은 잘린 걸 보고, 어둠의 경로로 구해보는 사람은 제대로 된 걸 본다는 것 자체가 시장 좋아하는 분들의 표현을 빌자면 시장 왜곡인 거죠. 검열이란 시스템 자체가 굉장히 오래된 거잖아요. 문을 막아두면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인데 저는 이 프레임 자체가 끝났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좋은 가정을 만드는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아이들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고 긍정적 가치를 전해줄 수 있는지가 중요한 거지, 영화 한 편을 보고 못 보게 하는 걸로 아이들을 지키는 시대는 지나간 거죠.
이제 책 밖으로 나와서 이야기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책, 영화, 드라마 모두 즐기시잖아요. 영화나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행간이 넓은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처럼 이야기의 근거로 사용할 때 자유로운 측면이 있는 반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의도적으로 일부분을 강조할 수도 있잖아요. 선생님의 매체 읽기의 태도랄까 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매체에 대한 특별한 시각이 있는 건 아니고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파든 좌파든 미학적으로 완성되어 있으면서 정직함이라고 할까요, 그런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밴드 오브 브라더스>같은 드라마가 있잖아요. 우파의 가치를 전달하는 드라마죠. 틈만 나면 성조기가 나부끼고 전쟁에 참여하는 애국청년들의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밴드 오브 브라더스>는 독일군을 악마로 그리지 않아요. 상대방도 자기 이유를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이고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요즘 트위터에서 줄기차게 비판하고 있는 <로드 넘버 원>과 <전우>를 보면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북쪽 사람들은 맨날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고문하고 남쪽 군인들은 인간미가 뚝뚝 떨어지는 걸로 그려요. 전쟁 자체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잘 보여주면서도 우파의 시각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데도 우리 드라마들은 너무 유치하다는 거죠. 그래서 아무도 안 보잖아요. 자충수라고 생각해요. 어떤 시각을 담을 수밖에 없지만 정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저는 그런 정직한 시각을 담은 드라마로 좀 오래되었지만 <떨리는 가슴>을 꼽고 싶어요. 원래 편성된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구멍이 나서 노희경, 인정옥 등의 작가들에게 맡겨서 급하게 만든 드라마라고 들었는데, 정말 잘 만들었어요. 우리에게 어떤 시각을 강요하지 않고 사는 게 저런 거지, 사람이 약한 부분도 있고 모자란 부분도 있는 거지,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였거든요. 그런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최근 보신 작품 중에서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꼽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인생은 아름다워>를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좀 오래 되기는 했지만 <네 멋대로 해라>도 추천하고 싶네요. <쩐의 전쟁>도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이제 알라딘 저자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입니다. <라디오 스타>의 마지막 질문 같은 거죠. 독자들에게 책을 한 권 추천해주신다면?
<김대중 자서전>을 추천하고 싶어요. 김대중이라는 한 거인의 삶을 통해서 한국 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책이죠. 그리고 얼마전 재미있게 읽은 소설책이 <제리>인데요.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표현이 가슴에 박히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인권 관련해서는 <미국과 대량학살의 시대>가 떠오르네요. 기독교 쪽에서는 조성기 선생의 소설 <야훼의 밤>이 20년 전 책이기는 해도 공동체의 문제를 깊이 고민한 책이라 추천하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친절하게 답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멀지 않은 때에 새로운 책으로 또 뵙길 기대하겠습니다.
1967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사, 임지 변경, 유학 등의 이유로 여러 교회와 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고려대 법대와 미국 코넬대 법과대학원을 졸업했고, 군법무관, 검사, 변호사, 한동대 법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형법, 형사소송법, 형사정책 등을 가르치고 있다. <헌법의 풍경>, <평화의 얼굴>, <불멸의 신성가족>,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 등 몇 권의 책을 썼다.
트위터 @kdoos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