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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어쩌면 의학의 승리
쥘 로맹 지음, 이선주 옮김 / 북레시피 / 2023년 9월
평점 :
재미있는 제목이 눈길이 끄는 이 작품은 그동안 읽었던 여느 장르와는 다른 '희곡'으로, 단순하고 짧은 3막극으로 쓰인 의학 풍자극이다. 1923년 첫 상연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올려지는 것은 물론 영화화된 작품으로 한국과 중국 등 몇 개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에서 상연된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읽어도 전혀 이질적이지 않고 오히려 익숙함마저 느껴진다는 점에서 매우 놀랍다.
더불어 이 책에서 담고 있는 내용을 살펴봤을 때 100년 전이나 100년 후나 여전히 대중들이 선동과 능수능란한 술수에 휘둘리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면에서는 정말 '의학의 승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특히 팬데믹을 몇 년이나 겪고 이제 막 제자리를 찾아가는 상황이라 더 뼛속 깊이 다가오는 문장들이 많았는데, 이를 통해 왜 오랜 세월 꾸준히 읽히며 원본의 대사를 거의 각색하지 않고 100년이나 상연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희곡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소개를 시작으로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소개되는 인물들은 극을 이끌어 가는데 독특한 매력과 개성을 한껏 발휘하고 있어 후반부로 갈수록 캐릭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특히 초반에 부정적 이미지로 그려지다가 후반부에 이르러 어리숙하게 그려지는 닥터 파르팔레의 경우를 살펴보면서, 이 작품을 단순히 좋은 놈 나쁜 놈과 같은 흑백논리로 바라봐서는 안된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속고 속이는 게임 속에서 결국 의학의 승리로 끝나버린 이 마을의 운명이 마치 우리의 삶과도 많이 닮아있어 한편으로는 씁쓸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는데, 현재의 우리의 삶에서도 흔하게 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극 상에서는 작은 마을 생모리스에 크노크라는 돌팔이 의사가 침투하게 되면서 마을은 완전한 변화를 겪게 되는데, 이 상황을 '작은 마을'이 아닌 '전 세계'에 대입해 보면 어마어마한 침투력과 대반전에 그저 입이 떡 벌어질 따름이다.
'의학'이라는 이름 아래 부문별하고 독재적인 일련의 상황들을 벌이는 크노크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그저 매체나 미디어에서 노출하는 그대로를 분별없이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고, 특히 팬데믹과 같은 의학과 과학 같은 분야에 있어서는 특히 더 객관적인 지표와 분별력을 기를 필요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일반 시민, 혹은 대중들은 생각보다 이러한 사태에 꽤 폭력적으로 노출되며, 집단 패닉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두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가볍게 읽을 재미난 소재로만 생각했던 얇은 희곡 한 편이 생각보다 꽤 위험한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풍자를 담고 있는 것을 보고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스토리는 간단하지만,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고,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블랙 유머는 미래에 어떤 위협이 다가왔을 때 우리가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할지를 꼬집고 있어 조금 더 긴장감과 경계심을 끌어올리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새삼 왜 이토록 오랜 시간 이 희곡이 각색 없이 거의 원본 대사 그대로 상영되면서 사랑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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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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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파르팔레: 기존 생모리스에 근무했던 의사
●파르팔레 부인: 닥터 파르팔레 와이프
●장: 파르팔레 운전기사
●크노크: 닥터 파르팔레를 이어 생모리스에 새로 부임한 의사
●무스케: 생모리스의 약사
●베르나르: 생모리스 교사
●북치기: 마을에 중요 이벤트나 광고를 알리는 사람
●레미 부인: 클레 호텔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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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KNOCK)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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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KNOCK)는 이 책의 주인공인 의사 이름으로, 문을 두드린다는 뜻인 '노크'와 권투경기에서 K.O.를 뜻하는 '녹아웃'을 연상케 한다.
똑똑똑! 닥터 크노크가 프랑스의 한 마을, 생모리스에 부임해서 가가호호 문을 두드리며 마을 사람들을 특별진료에 초대한다. 그런데 이 의사의 초대가 여느 초대와는 다른데, 다름 아닌 침대로의 초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크노크의 초대는 마을 곳곳에 퍼져 결국 마을 사람들의 의식을 '녹아웃' 시킨다.
"아는 게 병, 모르는 게 약"
이 말이 딱 적중하는 이 스토리를 통해 건강에 대해 우리가 너무 강박 증세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의학'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안일하게 믿음을 줘버린 것은 아닌지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조금 과하게 풍자되어 있긴 하지만 어쩌면 생모리스 마을에 사는 주민들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와 너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고, 보다 객관적인 판단과 또렷하고 맑은 시야를 다시금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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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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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시골길 위의 낡은 차 안, 기존 생모리스에 근무했던 의사인 닥터 파르팔레와 새로 부임할 의사 크노크와의 대화로 시작된다. 여기에는 운전기사 장과 파르팔레 부인도 함께 동승하고 있다.
닥터 파르팔레는 생모리스를 떠나며 자신이 운영했던 병원에 대한 권리금 분할 조건과 인수인계에 대한 내용을 전하며 최대한 좋은 값으로 받기 위해 크노크에게 내용을 부풀려 전한다.
그러나 병원에 환자가 없는 것은 물론 바로 진료비가 지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한 크노크는 기존 권리금 분할 조건을 변경하기를 요청하며, 병원 운영에 있어 꼭 필요한 정보를 질문 몇 가지로 모두 알아낸다. 더불어 첫 번째 지불 기한인 석 달 후 다시 보자며 후일을 기약한다.
■2막
드디어 생모리스 마을에 입성한 크노크. 북치기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교사 베르나르, 약사 무스케를 차례로 만나 자신이 선동하고자 하는 밑밥을 깔기 시작한다.
마을에 입성 후 북치기를 통해 무료진료를 광고하고, 이를 마케팅으로 활용해 환자를 병원으로 끌어들인 크노크는 교사 베르나르를 통해 의학에 무지한 이들에게 질병의 위험성과 진료의 중요성을 퍼뜨리고, 약사 무스케를 자신의 편으로 만듦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과 동시에 자신의 처방전이 문제없이 처리되도록 한다.
무료진료 광고 소식을 듣고 가볍게 찾아온 고객들은 어느새 환자가 되어 장기적인 진료를 보게 되고 크노크의 선동 아래 큰돈을 병원에 진료비로 납부하게 된다. 일 년에 1~2번 진료를 보던 이들이 아예 드러눕는 상황으로 전환되면서 크노크의 말재주와 선동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크노크는 사전에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환자의 경제능력을 파악하고 환자의 병을 진단했으며 이에 따라 진료비도 다르게 책정한다. 사람들은 그런 크노크에 속아 그를 칭송하고 더욱더 신뢰하게 된다.
■3막
3개월 후, 다시 찾아온 닥터 파르팔레는 클레 호텔에 머물기 위해 들어서지만 환자들로 가득 찬 모습에 깜짝 놀란다. 더불어 크노크와의 대화를 통해 그의 환자 운영방식과 말솜씨에 현혹되어 결국 그마저 스스로의 건강에 불안함을 느끼며 자신이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크노크에게 진료를 요청한다.
그리고 권리금을 포기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자리를 제안하겠다며 서로의 자리를 바꾸자고 제안한다. 첫 만남에서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부풀려 말하던 면모는 사라지고 그저 크노크를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며 그의 언변에 잠식당한 한 어리석은 인간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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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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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생모리스에 근무했던 의사인 닥터 파르팔레는 환자가 거의 없는 생모리스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 한다. 이때 새로 부임하는 의사인 크노크에게 한몫 단단히 챙겨 떠나려 파르팔레 부인과 합동하여 좋은 말로 포장하지만, 이내 크노크에게 간파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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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내 말을 좀 들어보시오! 그러니까 의사가 언젠가는 낫게 되는 환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라오! 환자들이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는 소리지요.
2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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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현 생모리스의 상황을 알게 된 크노크는 권리금 분할에 대한 계약 내용을 변경하기를 요구하며, 닥터 파르팔레에게 또 다른 제안과 여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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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지불 기한 문제도 그렇습니다. 3개월 마다라니 말이 안 되지요. 환자들이 진료비를 연간으로 지불하는 마당에 말입니다. 그러니 그것도 수정해야겠습니다.
(...)
그렇다고 생글랭글랭 날짜를 달력에서 바꿀 재간도 없고.
부인: 생미셸이라니까요!
※생글랭글랭: 정확한 날짜 없이 기약 없고 막연한 날을 청한다.
※생미셸: 9월 29일로 서양에서는 추수 직후, 수금하거나 빚을 갚는 정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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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크노크의 의사면허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던 중 사실은 면허가 없는 돌팔이라는 것이 드러나는데 현란한 말솜씨에 마치 오랫동안 진료를 한 것처럼 포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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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신문에 실리는 의료 광고와 약 광고들, 그리고 그 외 부모님이 사 오시는 알약이나 시럽에 첨부되어 있는 '복용 방법'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아홉 살쯤 되니 그렇게 지지부진한 내용들도 달달 외우게 되더군요.
(...)
일찍이 의료 전문직에서 사용하는 문체와 친근해졌지요. 특히나 그러한 것들이 제게 의학의 진정한 의미와 의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답니다.
(...)
열두 살에 저는 이미 확실한 의료 감성을 지니고 있었답니다. 작금의 제 의료 방식도 바로 거기서 나왔다고 할 수 있지요.
3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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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배를 타고 6개월간 실전에 몸담으며 지냈는데 그게 곧 제가 원래 가지고 있던 개념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원에서 흔히 하듯이 진료를 했던 거죠.
3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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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현란한 크노크의 말솜씨에 넘어간 부부는 오히려 비법을 묻게 되고, 크노크는 제안 하나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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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권리금을, 언제 마련될지도 모르는 현금으로 드리는 대신 알짜배기로 갚아드리는 겁니다. 다시 말해 저와 일주일을 같이 일해보시면서 제 방식에 입문하는 식으로다가요.
3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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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안을 들은 닥터 파르팔레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오히려 일주일 만에 자신에게 편지를 쓰게 될 거라며 말하는데 이에 크노크는 자신은 일주일까지 기다리지 않으며 지금 당장 유용한 정보를 얻을 거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 마을에서 의사로 성공하기 위한 알짜 정보를 질문을 통해 수집하기 시작한다.
▶마을에 북 치는 사람이 있는지?
▶생모리스의 주민이 총 몇명인지?(주변 지역까지 합해서)
▶주민들이 가난한지?
▶산업 지역과 상업 쪽도 있는지?
▶상인들이 장사에 매진하고 있는지?
▶여자분들 신앙심이 돈독한지?
▶일상에서 하느님의 자리가 큰지?
▶불륜이나 스캔들이 있는지?
▶그 외 사이비 종교단체라던가 미신, 비밀단체가 있는지?
▶무당이나 신부의 기적 혹은 손만 가져다 대면 병이 낫는다던가 하는 것들은 없는지?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의학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음을 확인한 크노크는 닥터 파르팔레에게 기똥찬 기회를 놓친 것 같다며 은근히 약 올림으로써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이에 닥터 파르팔레는 과대망상이라며 비웃지만 파르팔레 부인은 아쉬움을 삼킨다.
이들은 지불 기한인 석 달 후 다시 들러서 보자며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생모리스 마을에 입성한 크노크는 가장 먼저 북치기를 불러 무료진료 광고를 의뢰하는데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질 수 있도록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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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매주 월요일 9시 반에서 11시 반까지 이 지역 주민들에 한하여 무료진료를 해드립니다. 이 지역 주민이 아닌, 외부 사람들에게는 일반 가격인 8프랑이 적용되겠습니다."
5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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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기에게 이 내용으로 마을에 광고할 수 있도록 의뢰했고, 무료진료라는 말에 혹한 사람들은 후에 하나 둘 병원을 찾아 진료를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잠재적 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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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적을 위해 크노크가 활용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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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마을 사람들을 세뇌시키기 위해 이용한 <교사 베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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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결국 불쌍한 건 주민들이지요. 위생적으로나 예방적인 차원에서나 완전히 무시돼버렸으니!
베르나르: 맙소사!
크노크: 물 한 모금에 얼마나 많은 박테리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마실 겁니다.
베르나르: 물론 그렇겠지요.
크노크: 세균이 뭔지는 알고 있을까요?
베르나르: 사실 그 조차 의심스럽지요. 단어는 어디선가 들어본 사람도 무슨 모기 이름인가 할 터.
크노크: 끔찍합니다. 수년간 계속되어오던 방관을 우리 둘이서 일주일 만에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베르나르: 저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요.
크노크: 이곳에서 실행되는 신중한 사안들을 선생님 없이는 진행할 수가 없지요.
64~6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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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설득 당한 베르나르 교사는 자신의 안위에 대해 염려가 되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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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의사 선생님, 제가 보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크노크: 선생님이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냥 예를 들면 그렇다는 거지요. 베르나르 선생님,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도와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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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크노크는 책임은 회피하고 치고 빠지는 형태로 답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한다.
2. 약한 부분을 살살 긁어 자신의 목적을 관철시키는 방식에 이용당한 <약사 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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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구석구석 잘 정리돼 있고, 신식일 거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스케: 아주 관대하시군요!
크노크: 제겐 아주 중요한 사안이지요. 게다가 저명한 약사 없이 일하는 의사는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으니까요.
(...)
이 정도 규모 약국이라면 일 년에 2만 5천은 족히 될법한데.
무스케: 수익 말입니까? 맙소사! 그 반이라도 됐으면 좋겠습니다만.
크노크: 제 전임자께서 자신의 직무 외 부분까지 담당했나요?
무스케: 그건 관점 나름이지요. (...) 저와 사적인 관계는 아주 돈독했습니다.
크노크: 정말 그랬다면 처방전을 잔뜩 써주시지 않았을까요?
무스케: 그도 그렇군요.
크노크: 파르팔레 선생이 의학을 정말 신뢰했는지 되묻게 되는군요.
(...)
크노크: 이런 지역에서 약사님과 제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어떠한 장애도 있어서는 안 되지요. 이 지역 모든 주민이 우리의 손님이 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
제가 보기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어느 정도는 아프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들의 병이 빠르게 진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우리에게 변명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상황은 다름 아니라, 다룰 환자들이 너무 많아서 새로운 환자를 받기 힘들게 되는 상황뿐입니다.
무스케: 여하튼 아주 그럴싸한 이론이군요.
크노크: 아주 심오하면서도 현대적인 이론이지요.
74~75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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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칭찬을 앞세워 방심하게 만들고 띄워줌으로써 상대방에게 호감을 사는 형태로 접근하고, 바로 상대의 약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긁어 전임자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만들어 내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에 공감을 이끌어내고 마침내는 자신의 사상을 주입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이미 병에 걸린 병자임을 은근히 주입하고 선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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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의 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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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첫 번째 환자: 북치기
무료진료에 가장 먼저 혹한 사람은 바로 광고를 진행할 북치기 였는데, '무료'라는 말에 혹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끌어다가 덧붙이는 북치기와 그에 호응하며 엉뚱한 진료를 하는 크노크의 말에서 어쩐지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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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치기: 잠깐만요. 생각 좀 해보고요. 저녁 먹을 때 가끔 이 부분이 가렵습니다요, 간지럽히는 것도 같고, 아니 슬슬 긁는 것도 같고.
크노크: 혼동하지 마시오. 간지럽히는 것 같소. 슬슬 긁는 것 같소?
북치기: 긁습니다요. 아니 간지럽히기도 합니다.
크노크: 식초 넣어 요리한 송아지 머리 고기를 먹고 나면 더 가렵지 않은가요?
북치기: 전 그거 안 먹습니다. 만일 그걸 먹었더라면 더 가려울 법도 했겠습니다만.
58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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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번째 환자: 검은색 복장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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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진 적 없습니까?
여인: 그런 기억 없는데...
크노크: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꽤 높은 다리였을 겁니다.
여인: 어쩌면 그랬을 수도.
크노크: (단호한 어조로) 길이가 3미터 50 정도는 족히 되고 벽에 기대 세워놓고 올라가는 식으로 된 거 말입니다. 모르긴 해도 부인은 거기서 거꾸로 떨어졌을 겁니다. 왼쪽 엉덩이 쪽으로 떨어져서 그나마 다행이었네요.
여인: 아, 그렇습니까요!
(...)
여인: 어쩌다가. 내가 어쩌다가 그 망할 놈의 사다리에서 떨어져 가지고!
81~82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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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크노크의 억지스러운 말빨에 잠식당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없던 일도 있던 일로 만드는 말솜씨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은 전율과 존경심을 내보인다.
3. 세번째 환자: 보라색 복장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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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아주 덤덤하게) 말하자면, 게, 문어, 아니 거대한 거미가 천천히 뇌를 갉아먹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여인: 기절초풍할 노릇이란 게 바로 이런 거군요. 바로 그게 제 문제일 거예요. 그렇게 느껴져요. 틀림없이 불치병이겠지요? 게다가 치명적인?
크노크: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 그런데 도대체 뭘 치료해야 하는 겁니까? 파이프 관에 있는 거? 아니면 거미? 제게 와닿는 느낌으로 보면 거미인 것 같은데...
크노크: 만일 부인이 그냥 예사로운 환자, 그러니까 최신 의학으로 치료받을 시간도, 경제적 여유도 없는 분이었다면 감히 이런 희망을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부인은 다르지요.
92~9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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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으로 방문한 환자를 겁주며 이상야릇한 말로 현혹함으로써 거기에 동조한 환자는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치료받을 시간이 넉넉하다는 이유로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치료받기를 권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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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닥터 파르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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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금 3개월 후 방문한 닥터 파르팔레는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에 깜짝 놀라며 크노크에게 비법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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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파르팔레: 선생은 그런 정보를 어떻게 얻은 거요?
크노크: 정보는 많지요. 더욱이 정보 정리하는 일도 상당한 작업이고요. 부임해서 첫 달은 그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정리해 나가면서요. 그래서 얻은 이 결과물을 보세요. 멋지지 않습니까!
닥터 파르팔레: 이 지역의 지도 같아 보이는군요. 그런데 이 붉은 점들은 무엇이오?
크노크: 그건 의료가 개입된 지역들이랍니다. 붉은 점 하나마다 정규적 치료를 받는 환자를 의미하지요.
124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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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닥터 파르팔레에게 한 질문들과 북치기, 무료진료를 온 환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크노크는 자신만의 지도를 만들어 자신이 목적한 의학의 시대에 마침내 도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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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노크: 제 역할은 그들에게 의료적인 생각을 심어가면서 의료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들을 침대로 이끌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는 겁니다.
닥터 파르팔레: 그렇다고 이 지역 사람들 모두를 드러눕게 만들 수는 없지 않소!
크노크: 그런 생각도 해볼 만하지요. 아무튼 진실이 뭔지 아십니까? 그건 우리 모두에게 과감성이 부족하다는 것. 우리 중 아무도, 이러는 저 자신조차도 모든 국민을 드러눕게 만들기 위해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거지요. 어떻게 되는지 시험 삼아 한번 시도해 봐도 좋을 텐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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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화를 통해 비로소 크노크가 의학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한 행동들과 그의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데, 마치 동네 주민들을 실험체처럼 활용하고 이용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교사와 약사를 통해 의료적인 생각을 심었고, 이를 통해 생모리스 마을은 물론 주변 마을 사람들까지 의료적인 존재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한 사람의 선동이 이토록 무서운 의학의 시대로 만들어버린 것을 보며 자신의 욕망과 경제적 부를 위해 서슴없이 자신의 말재주를 활용하는 크노크 같은 돌팔이 의사를 우리 주변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주민들은 어느새 나약하고, 병든 자가 되어 버렸고 마침내는 크노크라는 한 사람에게 조종당하고 이용당하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크노크는 마침내 자신을 창조주이자 창공이라고 말하는데, 이 부분을 통해 스스로를 얼마나 존경하고 위대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다. 이미 선을 넘어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사이비 종교의 교주 같은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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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여기 처음 도착해서 그 이튿날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저 자신이 어딘가 보잘것없다는 자괴감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르간 연주자가 거대한 오르간에 손을 얹는 것만큼 딱 제 자리라는 느낌이 듭니다.
250개의 침대. 그 침대에 드러누워 이제야 삶의 의미를,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제 덕분에 이제야 의료적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
말하자면 이 지역은 제가 계속해서 창조해가는, 제가 창조주인 일종의 창공이라고 할까요.
130~131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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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권리금을 수령하러 방문한 닥터 파르팔레마저 그의 화려한 언변에 속아 넘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나약한 몸에 대한 진찰을 맡기는 한편, 안정적인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역으로 제안하는 상황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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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파르팔레: 친해하는 선생. 내가 제안 한 가지 하겠소이다. 내 자리를 드리리다. 선생에 대해 우러나는 존경심을 걷잡을 수가 없는 판국이니.
크노크: 그러면 선생님은요?
닥터 파르팔레: 나요? 나는 다시 여기, 생모리스로 오면 되지요. 한술 더 떠서, 내가 받아야 하는 돈도 그냥 없던 걸로 하리다.
(...)
크노크: 생산력은 미비해도 사고팔 줄은 아시니 말입니다. 다른 말로, 장사할 줄 안다는 거지요.
(...)
크노크: 더욱이 심리적 재주도 있으시고요. (...) 거기서 몇 동네 전담하다 보면 생모리스의 그래프쯤은 금방 잊어버릴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겠지요.
132~133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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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대화를 통해 첫 만남에서 크노크가 닥터 파르팔레에게 제안했던 현금으로 주는 대신 알짜배기로 갚아준다는 말대로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크노크의 방식대로 입문해서 일해보라는 제안에 콧방귀를 뀌던 닥터 파르팔레는 3개월 후 자신의 입으로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이다.
리옹이라는 도시에 제대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눈앞에 보이는 크노크의 현란한 말솜씨에 잠식 당한 것은 물론 건강한 몸마저 저당잡힌 불쌍하고 가련한 파르팔레를 보며 어쩐지 끝이 예상되는 바이다.
우리는 수많은 의약품과 미디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비단 이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의학과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한 이후에 이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되었다.
물론 그 덕에 장티푸스, 콜레라, 흑사병 등의 과거 위험도가 높았던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팬데믹과 같은 바이러스를 경험한 지금, 한 번쯤 멈춰서 돌아볼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전 세계적으로 급속히 바이러스가 번져가면서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미디어는 폭발적으로 이 소식을 퍼나르기 시작했고, 제대로 된 실험이나 검증도 거치지 못한 채 당연한 듯 우리는 백신 주사를 맞았다.
당시엔 당연한 듯 여론몰이와 능란한 술수에 모두 백신을 3차까지 맞았지만, 이제야 생각해 보면 조금은 집단적 독재주의 분위기 속에 사로잡혀 나도 모르게 현혹되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한 것 또한 사실이다)
전문분야로 일컬어지는 '의학' 분야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검증이나 설명을 듣기도 어렵고, 또 듣는다고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때론 크노크 같이 의학을 휘두르는 이들에게 조금쯤은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불쑥 솟아날 때가 있곤 하는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같은 내용, 같은 대사로 희곡이 여전히 상연되며 사랑받고 있는 이 작품만 보아도 이러한 생각들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미디어나 의학에 너무 의지하거나 매몰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듯하다. 상업적 성격을 띤 보험 광고나 의약품 광고, 건강 관련 프로그램에 너무 심취하다 보면 정작 건강한 사람들 마저 최면에 걸린 듯 병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약이나 건강보조식품에 의지하기보다 건강한 밥상, 일정한 숙면, 규칙적인 운동 등을 통해 나만의 건강 패턴을 만들어보자. 건강한 습관 속에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건강한 일상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