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옛날엔 그랬어
비움 지음 / 인디언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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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시'는 그저 문학작품으로만 받아들여졌다. 아름다운 표현과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선생님의 가르침에 세뇌되고 익혀진 감각으로 수능과 시험 문제의 답으로만 여겨진 것이다. 그때의 시는 그렇게 그 존재 자체의 의미와 아름다움보다는 다른 것을 위한 목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런데 교과서적인 학습에서 벗어나 인생을 살면서 우연히 접한 '시'는 학창 시절의 그것과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시 자체를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도 있었지만 이것을 온전히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는 마음이 열리니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짤막한 한 줄로도 느껴지는 감각과 표현들이 새롭고 즐겁게 다가왔다. 과거에 학습을 위한 '시'도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펼쳐두니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를 썼을지 호기심과 궁금증이 인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다 아름답고 이해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의 특성상 산문처럼 펼쳐두는 글이 아니기에, 함축적 의미와 비유는 때론 난해하게 다가올 때도 있다. 작가에게 의미 있는 사물과 경험에서 서술되는 표현이기에 타인의 관점에서는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도 분명 '시'만이 주는 경쾌함과 매력이 있다. 짤막하고 간결한 문장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슴속에 와닿아 스며드는 그것만의 특성이 있다.

 

이 시집에는 총 4개 파트, 114개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 중 시인이 직접 그린 27편의 일러스트도 포함되어 있어 일러스트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각 '시'들은 툭툭 내뱉듯 표현되어 있는데 다양한 사물과, 생각, 감정, 시인의 경험들이 녹아들어 있다. 그래서 시인이 직접 쓰고 그린 '시'와 '시화'는 하나의 이야기처럼 엮어서 감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어떤 시는 일상 속에서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경험과 감정들을 담고 있는데 단 몇 줄로 공감 가는 내용들이 있다.

 

또 어떤 시는 다중적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시도 있다. '손가락을 보여 줄까요?'라는 제목의 시처럼 쓰인 글 자체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다른 것의 비유로써 읽는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시도 있다. 이를테면, 가난해서 비웠다고 표현한 것이 마음일 수도,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일 수도, 혹은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시인의 생각이 내포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런 비유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면 그저 시 자체로, 일러스트와 함께 감상해 보는 것도 괜찮다.

 

'깍두기'라는 시는 깍두기가 담겨 있는 형태를 표현한 시인데, 읽으면서 재미있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시 중 하나다. 네모난 형태를 보고 '각진 사내'로 의인화하고,  둥글지 못해 굴러가지 못하고 빨간 국물 속에 담겨있는 모습들이 눈에 그려지는 시다.

 

'세탁'이라는 시는 화가 나거나 속상할 때 떠오를 것 같은 시다. 세탁할 때 때리고 뒤섞이고 엎어지는 소리와 형태를 보고 온갖 나쁜 말들을 그 속에 함께 넣고 세탁기를 돌리는 형상이 상상이 되어 속 시원한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깨끗하게 세탁이 끝나면, 더럽고 기분 나쁜 말들은 깨끗하게 세탁되어 좋은 말들만 남고, 구정물 속에 섞인 말의 시체들이 어느새 하수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모습이 연상된다.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속상하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세탁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부모님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향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선풍기'라는 시는 애처롭고 짠 내가 풍기는 시다. 고이고이 아껴서 사용한 10년이 넘은 선풍기에 빗대어 담고 있는 의미들은 쉬이 가볍다고 여기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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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진짜 얼굴을 보게 된 것이다. 언어로 그림을 그려주고, 맛보게 하며, 느껴지도록 만질 수 있게 해 주는 것, '읽는다.'는 말도 있지만 예술처럼 '감상한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것, 크게 소리 내 울지 않아도 싸한 가슴을 느끼게 해 주는 것, 단정하게 예의가 스며들어 있는 것 … 그게 시가 가진 매력이었다.

에필로그 116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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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시의 진짜 얼굴을 발견하면서 보게 된 것들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시'에 대한 표현으로 가장 맛깔스러운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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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날씬함과 함축과 비유를 사랑한다. 이것들이 시를 읽는데 어려움을 주기는 하지만 이들 때문에 시가 빛나고 더 아름답다. 다른 문학 장르가 갖고 있지 않은 뚜렷한 매력이 아닌가!

에필로그 117페이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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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날씬함'이라는 말은 '시' 자체를 형상화할 수 있게 해준다. 시인의 이 글에서, 빛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함축과 비유를 몸에 두르고 날씬한 몸을 한껏 뽐내는 '시'의 모습이 그려졌다. 


저자의 삶과 생각의 모든 부분들이 담겨있어 더 와닿았던 <나도 옛날에 그랬어>를 통해 나만의 이야기도 투영해 보고, 사물과 생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그려보는 것도 재미있는 발상의 전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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