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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악마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2
레이몽 라디게 지음, 김예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3월
평점 :
품절
여전히 순진한, 하지만 잔인해질 수도 있는 어른 같은 생생한 눈초리를 가진 상냥한 꼬마였다. 그래, 왠지 무거운 주름과, 딱딱한 모자 챙 안에서, 방종의 불꽃이 일렁거리고 있는 듯한 기이한 눈빛의 소유자였다.
앙드레 살몽, <끝나지 않은 추억>(갈리마르, 1955)
요절한 천재들에게 천박한 호기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그의 천재 때문이든, 그 천재만큼이나 매혹적으로 보이는 그의 생애 때문이든. 라디게는 묘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1903년에 태어나, 1923년에 처녀작 <육체의 악마>로 르 누보 몽드 상을 수상하고, 그해 12월에 숨졌다.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어떻게 하여 이 어린 소년은 이와 같이 무서운 작품을 쓰게 되었을까? 이 작품에 대해서는 출판사 사장이었던 그라세와 콕토의 조언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스무 살 먹은 어린 청년의 작품인 것이다.
소설의 배경은 1차대전이 터진 파리의 근교 F...와 J...이다. '나'는 전쟁이 발발한 해 열 두 살이 된다. 전쟁! 하지만 (책 해설을 인용하자면) 이 소설은 '1차대전이 배경임에도 거기에는 피비린내나는 전투도, 고통의 아우성도 없다.' 소년에게 전쟁이란 멀리서 들려오는 대포소리이거나, 기차역을 지나는 군용열차의 행렬, 그리고 그 행렬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여인들이 퍼나르는 포도주 들 같은 '불꽃놀이' 같이 기억될 뿐이다. '그토록 많은 어린 소년들에게 전쟁은 무엇을 뜻했겠는지. 그것은 4년 동안의 긴 휴가였을 뿐이다.'
비상한 머리를 가졌지만 그 똘똘함을 나쁜 데 써먹는 데 더 능숙한 소년 '나'는 어느날 옆집 하녀가 지붕 위에서 난동을 부리는 모습을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구경하다 그녀가 추락하자 기절한다. 이 끔찍한 에피소드는 이 소설이 앞으로 이야기해줄 무시무시하면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기괴한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다.
'나'는 조숙하다. 학교 공부는 시시하기 짝이 없으며, 생활은 권태롭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자신보다 너댓살 많은 숙녀 '마르트'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몸이였으며, '나'를 그저 친동생처럼 귀여워해줄 뿐이다. 그러나 '나'는 또래 여자아이들의 풋풋함보다는 마르트 같은 성숙한 여인을 더 매력적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상대라고 생각한다. 마르트가 신혼살림집에 들여놓을 가구들을 고르러 갈 때, '나'가 동반하여 자신의 취향대로 물건들을 고르는 장면은 자못 깜찍하기까지 하다. '물건'으로 내 인상을 심어놓는다는 발상, '물건 안에 깃들어 있는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을 얼마나 고전적일 수법인가? (그러니까 헤어지면 그 사람으로부터 받은 물건들을 모두 처분해야 한다)
이 둘은 이런 밀회 아닌 밀회를 즐기다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아니, 마르크가 그의 사랑에 굴복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둘이 서로 집에 바래다준다고 왔다갔다하면서 새벽까지 거리를 오가는 장면이라니) 그러나 불륜은 대개 유쾌한 결말을 바랄 수 없는 법이다. 이 소설은, 깊이 사랑했지만 현실이 그 둘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라는 식의 슬픈 로맨스로 전개되지 않는다. 물론 소설은 마르트의 죽음으로 슬프게 끝나고 있지만, 작가의 시선은 그런 치정의 바깥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랬다면 걸작이 되지도 않았겠지) 작가가 우리에게 단순한 '불륜 사건'을 통해 사랑, 아니 사람의 모순적인 모습을 까발리고 싶어한다. 육체를 탐하다 임신하게 된 마르트가 그 사실을 내게 말해주는 장면과, 나중에 아이를 예정일보다 빨리 낳았을 때 '나'의 심리상태가 바로 그런 것들 중 하나이다. 애인이 임신 사실을 고백했을 때, '나'는 아기를 가졌다는 기쁨보다 누려야 할 젊음을 도둑맞았다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유부녀고, 남편은 전장에 (그녀의 남편은 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으로 나온다) 나가 있는 상태에서 임신을 했으니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그의 편지에 답장도 거의 하지 않고, 휴가를 나와도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 고 '나'에게 고백한다) 그 아이가 불륜의 씨앗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런데 아이가 예정보다 일찍 태어나게 되자 나는, 반대로, 이 아이의 아빠가 과연 자신인지, 혹시 그녀가 자신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휴가나온 남편과 잠자리를 하게 되었는지를 의심하게 되고, 순간 그녀에게 화가 난 나머지 욕설을 퍼붓는 편지를 썼다가 찢어버리고 그녀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편지를 쓰게 된다. 하지만 결국 그 아기는 '예정보다 일찍 태어난 나의' 아이였고, 나는 비로소 안심하여 아이를 보러 휴가나온 그녀의 남편에게 '그의' 아들의 탄생을 기념하여 그 불쌍한 사내에게 휴가를 주는 관대함마저 보인다.
그러나 결국 마르트는 죽고 만다. 이 이유조차 이 소설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둘의 아이의 이름을 '나'의 이름으로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나'를, (동시에 아이를) 부르며 죽었던 것이다.
내가 유일하게 자크를 본 것은 몇 달이 지나서였다. 아버지가 마르트의 수채화를 몇 점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그는 그것들을 보고 싶어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된 것을 보고자 갈망한다. 나는 마르트가 청혼을 수락했던 그 남자를 보고 싶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발끝을 든 채 빼꼼히 열린 문으로 향했다. 문에 이른 바로 그 순간 나는 들었다.
- 아내는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갔습니다. 가엾은 어린것! 그애가 저의 유일한 존재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그처럼 의연히 자신의 절망을 다스리는 홀로 된 남편을 보면서 나는 질서가, 마침내, 사태의 주변으로부터 저 스스로 발동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즉, 방금 나는 마르트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죽었으며, 또한 내 아들이 적법한 생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는가?
만약 마르트가 죽는 장면이 이렇게 남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지 않았다면 (그녀의 죽음을 통고한 것은 '나'의 동생들이다. 그 장면은 차라리 장난 같아 보인다), 그 죽음이 소설의 종반부에 툭 던져지듯 등장하지 않고 절정부분에서 너무 처절히 묘사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 소설이 주는 둔한 울림, 책을 읽고도 멍하게 몇분을 더 앉아 있게 만드는 그런 '즐거움'은 누리지 못했으리라. 그래서 이 소설은 멋지다.
하지만 <육체의 악마>가 나온 지 불과 몇 달 뒤에, 그 불빛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1923년 12월 12일 급성 티푸스로 라디게가 사망한 것이다. 푸아요 호텔 방에서 16구의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 상황에 질겁한 어떤 콕토에게 이끌려 급히 온 병원의 노련한 의사도 어쩔 줄 몰라 했다. 라디게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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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게는 너무 자유로웠습니다.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라디게였습니다.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나는 무능력한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어떤 명석함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 일을 재주 있게 해나가지도, 작품을 구상하지도 못합니다. 그렇다고 제대로 무언가를 실현하기도 힘든 그런 상태입니다.
- 장 콕토, <존재하는 것의 어려움>(LGF, 1995)
당시 레몽 라디게는 스무 살이었다.
- <보엠3 열린도시, 몽파르나스>, 단 프랑크, 박절화 옮김, 이끌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