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동주

번거롭던 사위가 잠잠해지고 시계소리가 또렷하다보니 밤은 저으기 깊을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것이다. <딱>스위치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역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영청 밝은 달밤이었던것을 감각치 못하였었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였을가.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혜택 그림이 된다는것보담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코마루 입술 이렇게 하여 가슴에 여민 손등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지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양 솨- 소리가 날듯하다. 들리는것은 시계소리와 숨소리와 귀뚜리 울음뿐 버쩍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한층 고요한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할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도 좋고, 어린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담 손쉽게 표현 못할 계백한 그 무엇이 있다.

...(중략)...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나왔다던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던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집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히 서서 닥터 빌링스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을 민감이여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서러운 사나이의 눈물인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줄 때 못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에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우에서 빈정대는것을...

나는 꼿꼿한 나무가지를 끊어 띠를 째서 줄을 메워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1938. 10.

 

 

보름달이 되기 전 14일 달을 보았다.

구름떼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둥근달이 밤하늘의 별을 죄다 삼켜버려 저렇게 살이 올랐나 생각하니 실없는 웃음만 서글프게 새어나왔다.  

교교한 달빛에 축축히 젖어버린 밤,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고서는 나도 힘껏 달을 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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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 해당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한용운, 꽃이 먼저 알아

 

옛집을 떠나서 다른 시골에서 봄을 만났습니다.

꿈은 이따금 봄바람을 따라서 아득한 옛터에 이릅니다.

지팡이는 푸르고 푸른 풀빛에 묻혀서, 그림자와 서로 따릅니다.

 

길가에서 이름도 모르는 꽃을 보고서, 행여 근심을 잊을까 하고 앉았습니다.

꽃송이는 아침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아니한가 하였더니, 아아

나의 눈물이 떨어진 줄이야

꽃이 먼저 알았습니다. 

 

 

속절없이 지는 꽃잎이

핑...고인 내 눈물때문에 두장도 되고 세장도 되고...

무심히 피어있는 꽃잎위로

뚝...하고 떨어진 내 눈물때문에 이슬이 맺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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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아파트 14층 이곳 창밖에 하얀 솜털이 한가롭게 비행을 한다.

까닭없이 외로운 내 앞에 아른아른 거리다 이내 저 먼곳으로 유유히 달아나버린다.

 

 

::: 조지훈, 민들레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는

노오란 민들레꽃 한 송이도

애처롭게 그리워지는데,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距離)에

그대 조용히 나를 찾아오느니.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 잊어 차라리 병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랴.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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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한, 빗소리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지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내가 오래전부터 좋아해왔던 주요한님의 시이다.(주요한이라는 작가 하면 대부분 불놀이를 떠올리겠지만...)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으레히 이 시가 하루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특히 봄날 밤에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말이다.

풀빛을 머금은 봄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는 오늘...

당신의 어두운 밤에도 비가 오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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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종환, 그때 그 도마뱀은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해가 바뀔 때마다 먼저 와 봄 소식을 알려 주는

산수유나무나 목련나무는 얼마나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가.

그런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내가 만약 저 많은 나무들 중에

한 나무라면 나는 지금 어떤 나무에 해당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무마다 다 있어야 할 제자리가 있고

크기가 있는 것인데 자신이 짐 질 수 없는 것을

욕심 낸다고 욕심만으로 무엇이든 다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내가 부족한 나무면 부족한 대로 거기 서서

뿌리 내리고 꽃피우며 그늘을 이루어 주면 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다 높은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만 하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절 내게 소곤 댔던...소살나무(그 긴 줄기가 흰 색으로 되어 있고 멀리서도 한눈에 분간할 수 있는 꽤 키가 큰 이 나무는 바람이 불면 유난히 소살소살 일제히 소리를 내며 그 가녀린 잎을 흔들어 댄다. 잎의 앞면은 여느 나뭇잎과 다를바가 없는 푸른 빛을 띄지만 그 뒷면을 보면 솜털같은 털이 빼곡히 있어 바람이 불어 그 잎이 앞 뒤로 흔들릴재면 햇빛에 닿은 그 잎이 은빛 혹은 에머랄드 빛을 반사하여 눈이 부실정도다.그 나무의 이름을 알 수 없어 나는 그 나무를 소살나무라 몇 해전 명명하였다.)

그래 소살나무가 되고 싶다.(아니면...플라타너스...꿈을 아는 그 플라타너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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