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유일하게 기르는 생명체인 대엽풍란이 어제 꽃망울을 틔웠다.지난 일년동안 때맞춰 물을 주고 행여 부족할세라 빛을 보게 했던 내 수고가 조촐한 환희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전날까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꽃망울이 밤 사이 또롱...하고 터져 어제 아침 날 놀래켜 준 것이었다.
들길이나 숲길을 걷다가 이름모를 야생초나 야생화와 눈이 마주치면 즐겁기 그지없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한번 더 뒤돌아 눈길을 주거나 걸음을 멈춰서 찬찬히 들여다보지만 따로 화분을 가까이 두고 키우지 않는 나로서는 난초를 키우는 일이 꽤 이례적인 일이다.모든 생명체는 자연 그대로의 상태가 가장 아름다우며 내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그 생명체를 비좁은 화분에 담아 답답하게 키워 나 혼자 그 복을 독차지하는 것 또한 옹졸하고 치사한 일이라 여겨왔기 때문이다.
이 대엽풍란은 작년 이맘때 언니가 선물 받은 것이다.언니는 다른 일년생 화초처럼 이 또한 꽃이 지고 몇번 물을 챙겨주지 않으면 시들어질 것이라 짐작하여 이 화분을 쓰레기통 옆에 내버려두었다.어차피 죽을 거, 아예 물을 주지 말자는 심산으로 '안락사' 시킨 것이었다.
양 옆으로 뻗은 두개의 줄기에 대롱대롱 맺힌 꽃잎이 곱기도 곱거니와 나는 목 한번 축이지 않게 하고선 이 어린 것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수만은 없어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두었다.고맙게도 화분을 구입한 곳에서 '물 7일에 한번'이라고 써놓은 조그마한 푯말을 화분 머리에 꽂아 주었고 그 푯말 뒤에는 대엽풍란이라고 쓰여 놓았다. '아,네 이름이 대엽풍란이구나.' 이름을 알고 나니 금새 녀석과 친해진 것만 같았다.
일주일이면 시들어버리는 여느 꽃들과는 달리 이 풍란은 한달이 지나도 그 꽃잎이 누래지거나 오그라 들지 않았다.다만 그 은은한 연두빛 꽃잎은 항시 수줍게 아래를 향해 있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초여름에 접어들어 날이 더워져서야 이 꽃들은 제 몫을 다 하고 소리없이 고개를 떨구었던 것 같다.
간혹 바빠서 이 녀석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때는 7일을 넘기고 물을 준적도 있었다.목이 탔음에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있었을 녀석들이 측은해 그때마다 나는 평소보다 더 넉넉히 물을 적셔주기도 했다.내 이런 정성과 보살핌으로 녀석들은 날로 푸르게 자랐으며 어느날엔가는 새 잎이 뾰족...돋기도 했다.
그러던 작년 여름,무덥던 어느 날 나는 오랫동안 집을 비운적이 있었다.동생에게 물론 당부하고 갔지만 게으른 동생은 내 부탁을 하얗게 잊고서는 몇날 몇일 물을 주지 않았다.연일 30도를 훌쩍 넘는 무더위 속에 녀석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을 것이다.계속되는 폭염속에서 사람도 시름시름 지쳐가는데 이 여린 생명들이야 오죽 했겠는가.곁에서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이때는 분명 사나흘에 한번은 흠뻑 물을 줬어야 했을 것이다.
다행히 뒤늦게 언니가 물을 주어 살릴 수는 있었다.그러나 한참후에 집에 돌아가서 이 녀석들을 대하니 그 사이에 잎 하나가 심하게 꺾여 있었다.건강히 잘 자라던 녀석이었는데... 갑작스레 신체적 장애를 입은 것 마냥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때 나는 "무소유"라는 글이 떠올랐다.
법정 스님께서는 무소유라는 글에서 집착과 그에 따른 괴로움을 상기켜 주셨다.물론 소유에 의한 집착을 염두하지 않고 이 난초를 키운것은 아니었다.다만 야생에서의 풀과 꽃처럼 흠뻑 비를 맞고 넉넉하게 빛을 받을 수 없는 녀석의 처지가 딱해서 보살폈던 것이었다.내 남다른 보살핌과 관심에 녀석들은 '고맙다'라는 말 한마디 해 주지 않았지만 적적한 내 일상의 유일한 말 벗이 되어주곤 했기에(물론 언제나 내 일방적인 대화로 끝이 나긴 했지만) 나는 정을 준 녀석들과의 이별,그리고 그에 따른 상실감이 염려스러웠다.
애별리고愛別離苦
꽃을 피우고 전에 없이 환해 보이는 녀석들을 보고 오늘 아침,이 다음에 기회를 보아 적당한 그늘과 적당한 햇빛이 자리하는 산기슭에 이 녀석들을 옮겨 주자고 다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평온해졌다.
"푸른 꿈을 꾸고 너른 들로 훨훨 날으렴,대엽풍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