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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잃은 날부터
최인석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10월
평점 :
그대를 잃은 날부터. 제목만으로 책을 짐작해보았더니 너무 뻔한 스토리들이 머릿속을 부유했다. 연인과 헤어지고 난 날부터 폐인이 되었다던가하는 절망적 분위기의 흐릿한 정서 혹은 자유를 만끽하면서도 공허함만 쌓여가는 연애후반전 이야기 정도. 항상 책 한권을 끝내면서 느끼는 것은 드라마를 쓰는 작가는 시청자의 눈높이에 맞추어야 하지만, 책을 쓰는 작가는 결코 독자의 수준에 머물러서는 성공할 수 없구나 하는 점.
표지는 흰 바탕에 보랏빛이 가미되어있다. 뭐, 디자인에 큰 공을 들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글로써만 승부한다는 것일까. ‘잃은’ 이라는 단어는 흡사 물에 적신 종이에 잉크가 번진 것처럼 진보라색으로 강조가 되어있다. 세상의 썩을 논리에, 편하게 가지려는 욕망에, 그런 유혹과 열등감에 갇혀 파괴되어가고 있는 그녀, 그러나 알면서도 놓아버릴 수 없는 순수한 그의 사랑. 그것을 그려가고 있는 작품이다. 그래도 아직 저자가 의도가 담긴 제목의 뚜렷한 의미는 읽어낼 수 없다.
저자는 최인석. 표지에 사진이 작게 실려 있다. 그의 인상은 마치 동네에서 바둑깨나 두는 아저씨를 보는 것 같다. 아, 실례인가. 1979년 희곡 ‘내가 잃어버린 당나귀’가 계간 ‘연극평론’에 게재되면서 등단. 1980년 희곡 ‘벽과 창’으로 한국문학사 신인상 수상. 이후 희곡 ‘그 찬란하던 여름을 위하여’로 대한민국문학상과 영희연극상 등을 수상. 1987년 ‘소설문학’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산문학상, 박영준문학상등을 수상하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소설을 펴내고 있다.
희곡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하셔서 그런지 구성이 드라마틱하다. 영화 한편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장면 전환이나 구성, 전개, 호흡, 흐름 등. 저자의 문학적 연출력이 아주 뛰어나다. 다른 소설보다는 속도가 차별화되는 듯하다. 마치 감독이 ‘컷’하고 지나가듯이. 문체가 워낙 리얼하고, 분위기에 비해 무겁지 않고 산뜻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준성과 서진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몰입될 수 있지만, 저자는 그저 사랑놀음을 써놓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준성의 시나리오나 서진의 가족사, 명선아파트 골조건물 이야기 등이 적절히 배합되어 저자의 메시지를 심화시키는 장치로서의 역할을 한다.
서진. 아주 개념 없는 철부지. 인생 막장인 구제불능. 내 쪽에선 그렇게 읽혀지며, 준성의 사랑이 아깝고, 미련하고,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오서진이도 싫고, 그걸 다 받아 줘가면서도 ‘난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해’라며 교도소에 영화나 상영하는 준성의 그 얼빠진 사랑도 마음에 안 들었다. 왜? 저런 계집에게 어울리지 않는 남자이며, 현실에선 잘 볼 수 없는 캐릭터이기에 맘이 상해버린 탓이리라.
재밌었다. 기대 이상으로 재밌었다. 저자가 얼마나 사전조사를 철저히 했는지, 저자의 직업과 그 활동내역에서 충분히 드러난다고 본다. 강동구가 배경이 되니 그것도 아주 친근감 있고 반가웠다. 읽으면서 쭉 들었던 생각은, 저자의 다른 소설들도 꼭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사람으로서, 세상 편에서 한참 놀아나야하는 젊은 인생으로서, 인생에 대한 삶의 가치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져주는 좋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