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그런데 절판이라니!!) Oxford English Dictionary(OED)가 만들어지기까지 70년 동안의 끈질긴 노력을 담은 책이다. 


대략의 과정을 간추리자면, 1861년 초대 편집장 허버트 콜리지가 부임. 자원봉사자들에게 1250년부터 현재까지 문헌을 훑어 어떤 단어가 쓰인 예문을 보내달라고 한다(최초의 크라우드소싱이 아닐까 싶음). 콜리지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퍼니발이라는 정신없는 사람이 편집장이 됨. 무수한 예문들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사방에 흩어짐. 1879년 (열네 살 때 학업을 그만두고 은행에서 일하던) 제임스 머리가 3대 편집장이 되어 예문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상당부분이 불쏘시개가 되거나 쥐 둥우리가 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어쨌든 머리는 불가능한 작전을 계속 해나간다. 수백만 개의 예문을 취합, 분류, 정리하는 일의 엄청난 노가다성은 물론이고(컴퓨터는 물론이고 타이프라이터도 없던 시대다. 자원봉사자들이 손글씨로 제각각 써서 보낸 예문들의 데이터베이스가 표지 사진 뒤쪽에 있는 서가다), 사전에 들어갈 단어를 선별하는 일(최종적으로 초판본에는 41만개 남짓의 표제어가 들어갔다)만 해도 엄청나게 골치 아팠을 텐데, 게다가 단어의 "정의"를 작성한다는 고도의 지적인 행위가 필요하다. 단어의 의미를 처음으로 규정하여, 말하자면 언어의 토대를 창조해 내는 일이었던 것이다. J. R. R. 톨킨도 젊을 때 OED 편집자로 일하며 'w' 부분을 열심히 작업했다. 톨킨은 이때를 "내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이 배웠던 시기"라고 했다. 왜 아니었겠는가. 


나도 번역하다가 OED를 들춰볼 수밖에 없는 때가 종종 있다. 그냥 요즘 글을 번역할 때는 더 간단한 사전을 쓰지만, 책에 옛날 문헌이 인용되어 있을 때에는 정확한 뜻을 알려면 OED가 꼭 필요하다. 지금 내 컴퓨터에 설치되어 있는 OED는 하드드라이브에서 딱 645MB를 차지한다. (영화 한편이 몇 기가씩 되는데) 이렇게 방대한 지식이 담겨 있는 OED가 이렇게 컴팩트하다니! 이런 실물 OED에 비하면 얼마나 쓰기 간편한지 쓸 때마다 감탄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사전을 만들 때를 생각해 보면, 예문 모으고 단어 고르고 정의 작성하고.. 이렇게 손으로 쓴 원고를 식자공에게 넘겨 조판한 다음 교정하고...(한줄에 오자가 많게는 20개나 나왔다고 한다) 다시 조판하고 재교정하고... 실수를 용납할 수 없는 "사전"인 15,490쪽짜리 책을. 현대인의 급한 성미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무튼 이런 막대한 인간적 노력(예문을 모아 보내는 자원봉사자부터 최종 교정자까지)의 집약체가, 내 컴퓨터 하드드라이브에서는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죄책감마저 느껴진다. 


이 책을 읽다가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에서 아르바이트로 동아출판사 영어사전 편집하는 일을 하시던 것도 생각났다. 그때는 내가 영어 까막눈이었으니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본 장면은 펜으로 잔뜩 무어라 표시가 된 교정지였다. 단어를 고르는 일이나 정의를 작성하는 일(그때는 일본 사전을 많이 베꼈다), 예문을 고르는 일은 아니고 아마 교정 작업을 나누어 맡아서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때도 컴퓨터 편집 이전 시대니 하드카피만을 이용해서 교정작업을 했을 것이다. 사전은 경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prescriptive) 한편으로 시대에 따라 변해야만 한다(descriptive)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창작물과 달리 한순간도 완결/완성되지 못하고 끝없는 인간의 노력을 요구한다. 그런데도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이 일에 열정을 바칠 수 있었는지가 이해가 간다. a부터 zyxt까지 모든 영어 단어를 한 곳에 모아놓을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짜릿한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가? (내가 정보성애자라 그런가..) 아마 아버지도 그래서 이름 한 자 책에 올리지 못하는 일이었을지라도 사전 편찬에 참여한 것을 자랑스러워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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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comi 2015-04-15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업이 번역가이신가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계셔서 부럽습니다^^

bluegoby 2015-04-15 16:09   좋아요 0 | URL
네^^진입장벽이 없어서 쉽게 하게 됐는데 지금은 출구전략을 찾고 있는;; 아니 농담이고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회화나무 2015-04-15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무슨 사이트에 질문을 했는데 티스토리가 공개되어 겁이 나서 얼른 보호조치를 했습니다. ㅠㅠ

bluegoby 2015-04-15 16:30   좋아요 0 | URL
노출 수위(?)를 조절하기가 참 어려워요... 저도 광고한답시고 이 블로그 만들었는데 차마...ㅋㅋ정체공개를 못하고 있어요. 비밀글 암호 알려주세요~~

라로 2015-04-15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혀질 뻔한 책에 대한 글이라 반갑네요!! 저도 이 책 재밌게 읽었고 여기까지 끌고왔는데 절판이라고 하니 괜히 제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은~~~~^^;;;

bluegoby 2015-04-15 16:29   좋아요 0 | URL
여기까지라고 하시니 외국에 계신가 봐요. 그 책 꼭 쥐고 계세요.^^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다른 책 찾다가) 발견했는데 보석같은 책이 절판이더라구요..

stella.K 2015-04-1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오래 전 어떤 사람한테서 안 읽는다고 해서 가져 왔는데
아직도 안 읽고 있어 중고샵에 팔까 했는데 그러면 안 되겠군요.
클날 뻔했습니다.ㅋㅋ

고비 2015-04-17 09: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한번 읽어 보세요.^^ 한편 절판된 책이 중고시장에서는 높은 가격으로 팔리는 것 같던데 책테크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NorthShore 2015-04-22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비님 덕택에 이 책을 찾아 구매했습니다. 사이먼 윈체스터가 이런 논픽션을 흥미진진하게 잘 쓰는 사람으로 소문 나 있죠. 이 책이 나왔을 당시 북미 언론이 크게 다루며 널리 알린 사실도 기억나네요. 사전을 만드는 작업처럼 많은 노력과 주의와 열정이 필요한 분야도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며칠전 막내 아이에게 `The Right Word`를 읽어주었는데, 사실은 제가 더 그 책에 끌렸습니다. 시소러스의 대명사인 피터 로제의 일생을 요약한 동화인데 언어에 대한 로제의 집착과 끈질긴 노력이 실로 감탄스럽고 존경스럽더군요.

bluegoby 2015-04-22 10:14   좋아요 0 | URL
새알밭님 말씀 듣고 사이먼 윈체스터가 또 뭘 썼나 찾아봤더니 흥미로운 주제가 많네요. 한번 살펴봐야겠어요. 로제 전기가 그림책으로 있다니 신기해요. 저도 로제 시소러스 갖고 있지만 사람이라는 생각은 별로 안 해 봐서.. 웹스터도 사람이니까 롱맨,코빌드, 메리엄도 사람이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문득 드네요.ㅋㅋ 시소러스 얘기하니까 제가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사전이 한 권 있다는 게 생각나요. 딱 손바닥만한 크기의 메리엄 웹스터 시소러스였는데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완독했는데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마 재미있어서.. 였겠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