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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누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죄에 대한 대단한 통찰이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없는 듯 하다. 범죄는 개인적인 행동의 결과지만 그 원인은 사회적 산물이므로..
미국 감옥에 백인 보다 훨씬 높은 비율의 흑인이 바글대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은 이미 안다.
아이들의 성격과 성장에 부모가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환경이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모두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친구를 사귀거나 결혼할 사람 소개에는 부모가 모두 살아계신지, 직업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상황이 흔하게 벌어지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죄는 100% 그 최종마무리를 담당한 당사자에게만 묻는 현실이 당연시 되는게 의아스럽다.
이게 이성이 살아있는 21세기 현대의 모습인가? 아니다. 무지몽매한, 더러는 짐승하고 비슷했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당연시 여겼던 (지금의 기준으로는) 미개한 시대의 상황이라고 해야
맞는다. 이미 그 죄에 대한 책임이 한 개인에게만 속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학문의 결과로
다 알고 있으면서 그야말로 ‘복수’의 쾌감을 위해 사형을 선고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의 가족이거나 친구이거나 친척이거나 애인이거나 그 고통을 같이 느끼는 사람이라면
직접 그 손으로 죄인을 죽이려들수도(정말 죽이면 안되지만) 있고 사형을 적극 지지하고 원하는게
당연할 수 있다.
마치 죽은 아들의 시체를 안고서 의사에게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어머니의 모습을 비이성적이라거나
비과학적이라거나 비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형을 외치는 피해자 가족을 비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제 폐지를 외치는 나 자신도 내 가족이 피해자가 된다면 내 행동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 전체가 그런식으로 마치 ‘꼭지’가 돌아버린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 맞는 건가?
옳은 건가? 사형제를 폐지 해야하는 이유는 그 불가역성, 회복 불가능성 때문이다.
그 사람의 온 우주를 파괴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이고 그들은 짐승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사형을 집행하는 순간은 모두 같은 짐승이 되는 거다.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아! 그 콩밥 값은 조금 아낄 수 있겠지..) 단지 감정적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달리 말해 복수) 남의 생명을 박탈하는 생명체를 그 존엄성 있다는 인간이라 부를 수는
없는게다. 하물며 관리비를 아끼기 위함이라면..
소설 리뷰가 저절로 사형제에 대한 컬럼이 되는 건 저자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을까 싶다.
잘못 읽으면 마치 나라에서 나눠주는 반공교육 책자처럼 사람을 교육시키려는 의도로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독자로서는 기분 나쁜 일일테지...
하지만 이 소설이 영화화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통속적인 의미의 ‘재미’만큼은 믿고 보아도
될 것이다.
(통속적인 재미가 있다고 해서 다른게 없다는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