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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 지성의 근본주의 ㅣ 비투비21 2
데이비드 맥렐런 지음, 구승회 옮김 / 이후 / 2002년 2월
평점 :
품절
#1 2009년 늦가을 무렵의 고등학교 교실
이데올로기라는 말에 대해 필자가 처음으로 5분 이상 고민해 본 적은 고등학교 2학년 2학기 윤리와 사상 시간이었다. 당시 수업 자료에는 트라시의 정의에 충실하게 이데올로기의 정의가 설명되어 있었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행동 강령과 현실성, 과학성을 담보하지만 유토피아 사상은 그렇지 못한 ‘이상향적 논의’라고 둘을 대조했다. 간단한 설명을 납득시키기에 예시들이 너무나 완벽했다. 유토피아적 사회사상으로 제시된 노자의 ‘소국과민’이나 플라톤의 이상사회는 누가 봐도 구체적이지 못하고 과학성과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움은 문제집을 풀 때 일어났던 것 같다. 문제는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이라는 선지를 고르도록 했다. 과학적이고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이데올로기가 허위의식이라니? 윤리선생님에게 질문 드렸지만 당시 나의 배경지식으로는 알이 듣기 어려운 설명이 이어졌다. 때문에 그냥 외웠던 것 같다. 그 후로 더 이상의 혼란은 없었다. 그렇게 ‘무난하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2 대학에 들어와서
사회과학대학은 본디 이데올로기의 홍수 속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쟁이 격렬했을 때도,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였을 때도, 질문과 논쟁이 사라지고 주입과 학습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첫 번째 움직임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면서 두 번째 움직임을 추구하고, 세 번째 움직임을 일상으로 삼았던 필자도 그 홍수 속에서 살았다. 어렴풋이 이데올로기라는 조각퍼즐을 짜 맞추는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그 퍼즐은 좀처럼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맑스와 엥겔스의 방식 혹은 알튀세르의 방식으로 이데올로기가 아닌 ‘과학적인 것’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것이든 그 누구도 제대로 읽지 않고 인용하는 그람시의 이야기에서든 항상 찜찜한 파편들만 주울 수 있었다. 그리고 질문과 논쟁의 ‘종말’ 직전을 겪으면서,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외친 사람들이 무식하다기보다는 용감해 보이기 시작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는 심하게 편재(偏在)되어 있었는데, 논의를 주도하던 집단이 21세기의 만년설처럼 점차 희미해져가니 모두가 ‘낮은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 상황보다 더 급격한 쇠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비극적이기 때문에 통상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3.『이데올로기』가 보여주는 두 방향 속에서
b2b21 시리즈의 『이데올로기』역시 다른 여러 책처럼 작년부터 그 존재를 의식하고 ‘언젠가 한 번 읽어봐야지’라는 마음으로 지나갔던 책이다. 이번 방학에 여유가 생겨서 비로소 읽게 되었는데, 그 사이에 위에서 이야기한 ‘이데올로기 논의의 실종’의 상황이 더 진행되었기에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보다는 이 책을 통해 ‘길을 찾겠다’는 좀 더 절박한 마음 –다른 곳에서 찾기란 더욱 요원해 보이므로-으로 책을 잡았다. 책은 프랑스 계몽철학의 합리주의적 전통과 독일의 낭만주의 철학 혹은 그 후로 이어지는 ‘역사학파’의 전통이라는 두 기둥으로 이데올로기 논의를 살펴보았고, 비록 옮긴이가 ‘큰 연관성이 없다’고 평하지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에 대한 비판적 언급까지 나아가며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들을 개괄하였다. 다루는 개념이 워낙 복잡하다보니 책의 설명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정독해서 읽다보면 논점이 무엇인지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필자가 제시한 두 방향의 소용돌이에 대한 논의는 결국 마무리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에 대해 논의하는 자들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객관화·상대화 시켜볼 용기를 토대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는다면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이데올로기의 속성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고(저자가 지적한 ‘이데올로기 낙인’의 담지자들과 옮긴이가 보론에서 언급한 대부분의 이데올로기 비판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이데올로기이다’ 식의 상대주의·회의주의의 귀결 대신 이데올로기 개념의 비판적 잠재력을 회복하는 것이 주어진 과제인데, 이 과제는 완결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의들이 ‘지금처럼 꼬여 있다면’ 앞으로도 해결이 쉽지 않아 보인다.
결국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데이비드슨이나 퍼트넘과 같은 사상가들이 자유로운 의사소통에 의한 진리의 ‘발견 가능성’에 더 주목하였듯이 이데올로기 개념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명료한 이데올로기 개념을 논의하고 도출할 가능성’을 먼저 확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에 지금보다 더 급진적인 사회 운동과 혁명을 이끌어냈던 이데올로기들은 스스로 불완전하였고, 논쟁적이었으며 결함이 많았지만, 1세기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우리의 논의가 더 나은 사회적 변화를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의 등장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결국 이데올로기의 우물에 갇혀 버린 채 흘려보낸 시간이 그 만큼 많음을 의미할 것이다(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논의이든,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종언’ 논의이든 다 그러한 우물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였고, 독자로서 동감하는 부분이다).
#4.「보론」까지 읽은 후에.
다소 어려운 저자의 논의 끝에 읽은 보론은 옮긴이와의 우려와는 달리 ‘사족’이 아니라 이해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글턴의 이데올로기의 정의에 대한 6가지 정리 부분과 프랑크푸르트학파나 루카치에 대한 부분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포스트맑시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부분은 좀 더 부연 설명이 필요하거나, 큰 틀에서 논의의 흐름이 잡혔으면 독자들에게 더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았다(이는 저자가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분하는 알튀세르와 같은 입장에서 한 구분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는 평가만 내리고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좀 더 설명하지 않아 아쉬웠던 부분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보론의 내용까지 종합적으로 생각할 때, 이 책은 이데올로기 논의에 대한 ‘입문서’로는 다소 어려운 책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이데올로기들의 내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 나아가서는 20세기 사상사 혹은 지성사에 대한 이해가 바탕으로 되어야 읽은 효과가 배가될 것 같다. 만약, 어느 정도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 본 독자라면 꼼꼼하게 읽기를 추천할만한 책이다. 그리고 책에 나왔던 여러 사람들의 논의를 직접 읽어보면서 추가로 생각할 여지를 만들어가는 –저자도 독자들이 그렇게 나아가기를 분명히 원했기 때문에 개정판을 낸 것이라고 밝힌다- 하나의 허브로 이 책을 이용한다면 공부에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