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 진보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지음, 라인하르트 코젤렉 외 엮음, 황선애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 / 푸른역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b2b21 <지성의 근본주의> 시리즈와 비교하면서 읽게 된 두 번째 시리즈는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시리즈였다. b2b21 시리즈의 원제가 개념사보다는 사회과학에서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는데 반해, 이 시리즈는 처음부터 기본적인 개념이 어떤 변화를 거듭하였고,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정리하는 데 의의를 둔다. 따라서 저자들은 고대(그리스·로마)부터 지금까지 책의 주제가 되는 개념들이 사용되었던 맥락과 의미 변화가 생긴 사회, 역사적 원인들을 분석하는 데 집중하였고, b2b21 시리즈와 같이 저자들의 고유한 주장, 논점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이 시리즈의 첫 책으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다양한 의미로 혹은 불명확하게 사용되는 진보를 골랐다. 한국에서 보수 대 진보의 정치 세력 구도는 항상 언급되지만 한국의 진보주의자보수주의자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수구꼴통이나 종북좌빨과 같은 노골적인 비난의 낙인은 논외로 하고, 보수와 진보라는 틀을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으로 보자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선 18세기 말부터 등장한 이중혁명 이후 근대화, 산업화, 자본주의화의 변화가 주는 부작용에 반대하고, 중세적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와 한국의 보수는 공통점 이상의 차이를 보인다. 보수의 반대로 설정되어 있는 이른바 진보진영은 더욱 규정하기가 힘들다. 자유주의(liberal)를 지지하든 사회주의를 지지하든 그들은 싸잡아서 종북좌파혹은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인데, 이러한 느슨하지만 확고한 낙인이 찍히는 사이 정작 둘 간의 차이점은 점점 흐려진다. 때문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지는 뚜렷한 차이가 전면에 부각될 기회는 이 구분에 매우 열중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흔치 않다. 그들이 낙인으로 묶이는 것만큼이나 진보라는 단어로 묶이는 경우도 흔한데, 역시 여기서 진보의 구체적 내용이 다를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비슷한 집단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결국 민주당도 진보’, 통합진보당도 진보’, 민주노동당도 진보가 되어버린다.

 

이 책이 처음부터 한국에서 진보라는 단어가 쓰이는 맥락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든 것이기에(이 지점이 한국 독자에게 이 책이 다가오는 데 있어 명백한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져다주지만) 이런 혼란은 제쳐두고 차분하게 진보라는 단어의 기원부터 그 변화 과정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본문이 끝난 후 옮긴이의 글에 책의 핵심이 간략하게 요약되어 있는데(책을 읽는 분들은 옮긴이의 글을 먼저 읽고 본문을 읽는다면 유용할 것 같다), 번역 탓을 할 수는 없지만 책 내용 자체가 압축적이기 때문에 한 번 읽고 나니 옮긴이의 글이상의 내용이 머릿속에 남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폭넓게 사용한 진보 개념이 비서구 문화권 중 하나인 한국에서 어떻게 유입되어서 쓰였으며, 오늘날처럼 느슨하지만 확고한 규정으로 작동한 것은 언제 부터인지 분석하는 것이 한국에서 공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할 것 같아 이 부분에 대한 답을 다른 문헌에서 꼭 찾아봐야겠다는 아쉬움 섞인 욕구가 솟아났다.

 

한국에서 진보라는 단어가 쓰이는 다양함에 이 주제를 먼저 선택했지만, 책이 주고자 했던 좀 더 보편적인 메시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즉 근대 이후 종말론에서 열린 결말, 인간의 발전에 대한 확고하고 나아가서는 종교적인 믿음으로 정착된 진보에 대한 반성이 20세기 이후 근대문명과 근대과학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과 궤를 같이 하고, 그런 반성 끝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확실하게 제시되지 않은 상황에서 21세기를 여는 우리 세대 또한 그 답을 찾는 과정 속에 위치했음을 깨닫는 것이다. 진보는 더 이상 진공 속의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 정치 사회적 욕구를 반영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답을 찾는 과정은 우리의 삶과 불가분의 관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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