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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공장 - 복종하는 공부에 지친 이들을 위하여
강명관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4월
평점 :
지금은 공군 현역으로 복무 중인 절친한 사람으로부터 책 한 권을 추천받았다. 책을 추천받고 막상 읽지 않는 나쁜 버릇을 깨고자 읽던 다른 책을 접고 부랴부랴 책을 구했다. 그가 소개한대로 책은 무척 얇았다. 하지만 짧은 내용이 가지는 흡입력은 굉장했다. 다른 여러 사회적 문제를 고민하면서도 ‘학문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기 보통인데, 이 책은 그 이야기만을 위해서 쓴 글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위기를 몸소 체험하는 저자의 절절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저자가 단지 탁상공론의 결과물로서 책을 낸 것이 아니라 12년에 걸쳐서 나름대로 자신이 비판하는 학문 풍토에 저항하고자 열심히 노력한 후 그 경험을 녹여내었기에 문장들은 투박할지언정 살아 숨쉬고 있었다.
저자가 크게 네 꼭지의 이야기를 썼지만 이번의 짧은 글을 통해서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두 가지 주제, 학문(특히 인문학)이 국가, 자본, 테크놀로지에 종속되어가는 현실에 대한 저자의 비판과 민족주의 학습의 목적에 의해 재단되는 한국사 교육에 대한 비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고 싶다. 두 주제에 대해서는 평소에 필자도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모두까기 인형’이 되는 것 같아서 남들하고 주제에 대해 충분히 설득력 있으면서도 끝이 암울하지 않은 대화를 이어나가기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저자는 어쩌면 “통째로 잘못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모두까기 인형’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학문 현실에 대한 비판은 아마 사정을 아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식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기존에 들어 왔던 이야기와 저자의 이야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저자는 이를 통합적으로 묶어서 비판할 뿐이다. 예를 들어서 학술지 중 ‘등재지’를 따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학문 연구의 합리화를 요구하며, 심사라는 과정을 통해 검열을 하는 과정은 주위에서 논문 한 편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한 명만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험을 통해 쉽게 들을 수 있는 관행일 것이다. 이러한 풍토 때문에 논문 쓰기에만 매달려서는 학문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지적도 공감이 간다. 다만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할 때 단행본에 대해서는 별 다른 공로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덧붙인다면 논문 쓰기에 매달리지 않고 ‘좋은 단행본’을 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주제를 바꿔서 한국사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민족주의와 한국사(교육)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의 난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첫 번째로,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쉽게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적 반대파로 몰린다.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은 때로는 빨갱이로, 때로는 친일 수구 꼴통으로 몰린다. 이런 단어가 어디서든 튀어 나오는 순간 그 다음부터 어떤 논의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필자가 관찰하거나 경험한 바로는 이런 식으로 1분도 안 되서 논쟁이 ‘해소’ 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운 좋게 이런 경우를 피해간다면 더 복잡한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민족주의적 역사관’의 긍정적 기능이 오늘날에는 그 긍정성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해도 좋은지에 대한 논쟁이다. 신채호나 장지연의 글을 저자도 인용하였는데, 구한말이나 일제강점기에는 분명히 민족주의적 사관이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건국 이후 민족주의가 정치인들에게 동원의 이데올로기로서 악용된 경우는 매우 흔했으며, 오늘날에는 민족주의 문제보다는 역사 왜곡과 ‘새로 쓰기’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였지만 이 문제가 정리될 경우 ‘과잉된 민족주의적 감정’에 대한 논쟁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 같다. 세 번째는 역사의 해석에 대한 문제이다. 예를 들면 단계론을 상정한 발전주의, 보편주의적 역사 해석이든, 그것의 눈으로 놓친 부분들을 꼼꼼하게 짚어내면서 비판하는 역사 해석이든 역사학 자체가 보편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이상 모두 ‘가능한 해석’이 되어 버린다. 물론 이 과정에서 기본적인 사실들의 왜곡이 존재할 경우 왜곡을 저지르는 역사적 해석을 과감하게 가지치기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불편한 양면성’(한 가지 자료에 대해 여러 주장의 신봉자들이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주장할 수 있고 그런 주장들이 모두 타당한 경우)이 나타나면서 논쟁 당사자들은 열띤 논쟁을 계속하고 대부분의 관심이 적은 일반인들은 이러한 논쟁을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초래될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
따라서 저자가 지적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 타당성을 인정하고, 날카로운 주장에 감탄하면서 읽을 수 있었지만 좀 더 큰 틀에서의 고민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분량 자체가 더 이상의 논의를 하기에 충분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앞에서 지적한 난점 때문에 생긴 몇 가지 제약은 깨면서 탐구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실증주의에 집착해서 사료와 문헌에 드러나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은 모두 허구라고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특정 입장이 이런 방식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유로(예를 들면 식민사관), 그 방법론 자체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 사회과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방법과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보는 방법이 서로 다르지만, 두 방법이 반드시 배타적일 필요 또한 없을 것 같다(앞의 논의에 연장선상에 있기도 하다). 물론 위 두 가지의 대표적인 벽은 필자도 아직 완전히 극복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 벽들이고, 조금씩이나마 넘으려고 노력하는 장벽들이다.
마지막으로 책의 아쉬운 점에 대해서 두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주제 또한 흥미로웠지만 앞의 두 주제와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차라리 두 가지 이야기가 서로 다른 두 권의 책으로 나오면서 더 자세하고 치밀하게 보강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두 번째는 저자의 의도보다는 출판사의 의도가 반영된 것일수도 있겠으나, 책 값이 책 분량에 비해 다소 높게 책정된 것 같다. 저자의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만큼 책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