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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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을 접한 것은 이번이 지난 번 홍어에 이어 그리고 두 번째이다. 이번 소설 역시 홍어를 읽을 때와의 느낌이 비슷하다. 아름다운 언어의 유희에 취해 줄거리를 이해할 수 없는 몽롱한 꿈에 빠져버린다는 것. 그것은 내가 지금 <홍어>라는 책을 읽는 것인지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는 것인지 혼란에 빠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느 소개란을 보면 아버지의 부재와 그 성장 과정을 그린 수채화 한장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았다. 그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해 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물론 쉽게 읽어 나가 버린 나의 잘못된 독서 탓이다). 책 속에 나오는 '내'가 삼손의 손을 빌려 이발소에 있는 그림을 갖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궂이 6~70년대로 하여 이발소 주인과 여선생님을 빨갱이로 몰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의문도 풀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다락을 감추어야 했던 이유부터 시작해서 어머니의 모든 행동들은 하얀 안개속에 감추어져 있다. 물론 어머니가 없을 적에 따뜻한 군불을 짚혀주던 그 아주머니도.

나의 아버지와 빨갱이, 그리고 삼손과 아버지의 관계에 대해 억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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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
김주영 지음 / 문이당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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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알아? 너 내 맘 알기나 해? 너도 나처럼 그렇게 나 보고 싶었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밖은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빛을 밝히고 있는데도 하얀 눈이 쌓인 평온한 들판을 상상케하는 투명한 눈은 흐를 듯 말 듯한 눈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병든 환자의 그것처럼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울음이 가득 섞여 들릴 듯 말 듯 낮고 가녀리면서도 화산 속에서 마그마를 분출해내듯 터져나오는 목소리로 내게 처음 건 낸 말이었다.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세영 어머니의 6년 세월만큼이나 그녀의 기다림도 그렇게 쉬운 날들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기다림에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내가 돌아오는 날에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달력 위에서 하루하루 X표를 해나가는 일이 하루의 마지막 일과가 되었을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첫사랑인 그녀에게 나와 헤어져 보낸 6개월이라는 시간은 그리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나의 떠남의 공간은 외부와의 문을 굳게 닫아버린 채 바다 한가운데에서 살아야 하는 선상 생활이었다. 다름 아닌 승선실습이었다. 가끔씩 벌어지는 수 일간 목소리는 커녕 잘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조차도 알 수 없게 하는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더욱 길고 힘들게 만들었다. 시퍼런 칼날을 드리세우는 파도는 나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가지 못하게 막고 서 있었다.

세영 어머니의 기다림은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나에게 느꼈다는 그런 기다림과 같은 것일까? 마을 앞에는 소택지가 보이는 하얀 눈이 소복히 쌓인 시골 마을의 모습이 담긴 한 폭의 풍경화를 보듯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고 머릿속은 온통 기다림의 의미 찾기에 붙들려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나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 나가다보니 소설을 사뭇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징검다리를 하나 하나 차근차근히 밟아가며 빠질세라 조심히 냇가를 건너는 여유 없이, 옷이야 젖건 말건 앞만 보면서 냇물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난 기다림의 의미를 한시라도 빨리 찾고 싶었다. 마음속에서는 원작과는 다르게 소설을 재구성하여 내게 전해주고 있었다. 나의 그녀도 세영 어머니가 남편을 기다릴 때 느끼는 그런 기다림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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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 이슬비 -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5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 5
박완서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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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대학에 들어올 무렵 선문대에서 장학금, 유학 등 파격적인 입학조건으로 순결학과를 신입생을 모집한다고 해서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순결학과의 설치는 전근대적인 발상의 산물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왜 순결학과는 여학생들만 대상으로 모집하냐는 것이 더 큰 쟁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완서의 가는비 이슬비라는 소설을 읽으며 순결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곱씹어보게 되었다.

우리에게 순결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여성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인가? 그리고 순결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찾으려 노력하면 할 수록 나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서는 듯한 이상한 감정을 떨칠 수 없었다. 나도 순결이라는 단어에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있구나.

사실 남자들은 순결의 의미를 피라는 한 음절에 국한되어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내 주변에서도 순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의례 여성이 의견의 중심 소재가 되어지고 그 끝은 대부분 첫날 밤의 피로 귀결지어지곤 한다.

이 소설 속의 남자도 순결의 의미를 피에 집중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원래 재판도 아무리 심증이 확실하더라도 물증이 없는 한 승리할 수 없는 법이니까. 첫날 밤의 피가 순결을 증명하는 하나의 물증이 되어주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소설속의 주인공의 경우는 달랐다.

남자의 경우 여자가 순결하지 못하다고 판단해 버렸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 한 번도 잔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첫날밤 남자가 그렇게 찾던 그 피는 발견하지 못했다. 남자의 순결은 어떻게 증명하지? 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결론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무이다. 그렇다면 여자의 순결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결정도 단순한 피가 아닌 다른 방법을 마련해야 했다. 그게 무엇일까? 난 고민에 빠졌다. 소설은 잊어버린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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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에세이 동녘선서 67
장수한 지음 / 동녘 / 199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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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역사. 사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역사를 경험해 왔다. 어렸을 때 부터 우리는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광개토 대왕 전기등을 읽으며 자라왔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 과정을 정상적으로 밟아온 사람이라면 역사란 말에 익숙해 있을 것이다.

단순한 한 왕의 일대기를 외우고, 그의 생활상을 외우며, 다시 당시 귀족(용어는 시대마다 다르므로 그냥 귀족이라 한다)들의 생활상을 낱낱이 배워왔다. 마치 그들의 생활이 전부인 것 마냥.

그러나 <역사에세이>는 나의 역사관을 바꾸어 놓게 되었다. 역사는 한 개인의 역사가 아니라, 일부 집권자들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 민중의 역사가 진짜 역사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러한 이유는 소수 집권자들에 의해 우리의 역사가 왜곡되어 왔기 때문이리라.

또한 우리의 역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왜곡시켜왔다. 역사가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역사가 아닌 남의 역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단순히 우리 민중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몇 줄의 역사밖에 기록되어있지 않다는 것에 한탄마저 나온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역사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언론은 우리에게 얼마나 왜곡된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지. 공장 노동자의 고용주에 대한 실례는 나의 역사가나 언론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게 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왜곡된 채 살아 왔다. 과거 초등학교 시절인가 동학난을 배웠던 기억이 있다. 그땐 단순히 난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한 것처럼 난 지금 이 사건을 난으로 기억하지 않는다. 지주 세력에 폭압에 항거한 작은 혁명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6장으로 나누어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다보면 우리 세계 역사의 전반을 알 수 있게 하고 우리가 어떻게 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지 알수 있게 한다. 새로운 역사 인식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발간된지 아주 오래되긴 했지만 이 책을 권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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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니어링 자서전 역사 인물 찾기 11
스콧 니어링 지음, 김라합 옮김 / 실천문학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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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여느 해와 다름없이 취업문은 그리 넓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매년 좁아만 가는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 많은 대학생들이 자신의 지식 경쟁력을 높이기에만 사력을 다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서관에 앉아 젊은 시간을 취업을 위해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황금만능을 원하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사회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대학인들을 나무라는 것은 무리가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나 비판을 하지 않은 채, 자신만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능력 키우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은 이 시대를 사는 지식인으로써의 대학생의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사회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현재 나의 지식인으로써 사회적 책임은 무엇인가? 지금 나는 바른 길을 가고 있는 것인가? 흔히들 지식 공동체, 학문의 전당이라고 불리우는 대학에 다니는 지식인이라면 한 번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밤을 새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항상 이러한 고민들은 현실의 커다랗고 흔들릴 줄 모르는 벽에 부딪쳐 명백한 결론도 얻지 못한 채 헤어나올 수 없는 미궁에 빠지고 만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옳은 길을 알면서도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 이상과 현실.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이상을 알기 때문에 옳은 길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이 사회를 살아가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옳은 길이 어디인지 모른다면 반대쪽 길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진실을 그리고 진리를 알고 있다. 아직은 우리가 젊고 경험도 일천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진실과 진리를 보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이, 진리가 이끄는 길로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비교적 최근에는 20세기의 근본주의자이자 자연주의자, 반전주의자, 그리고 급진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는 '스콧니어링'이 그의 자서전인 <스콧니어링 자서전(The Making of a Radical)>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네 자리에 남아 진리가 이끄는 길을 가라.' 혹자는 필자의 말을 들으며 이러한 반론을 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 사회 체제를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편협된 생각이라고. 그리고 현실에서 진실이나 진리만을 따를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그러나 우리는 흔히들 지식 공동체라 말하는 대학인이다.

누가 뭐라 하더라도 우리는 지식으로 무장되어야 하고 지식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변혁시키고, 진보시켜야 한다. 자신만이 좁은 취업문을 뚫고 일어서는 것이 사회의 변혁이고 진보라고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커다란 대의 명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 잘못된 요구일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으로써의 사회적 책임을 의식하고 우리가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은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의미에서 <체 게바라 평전>에 뒤이어 실천문화사에서 발간된 스콧니어링 자서전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 방향 설정을 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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