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뒤안길
W.바이셰델 / 서광사 / 199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하게 읽기 좋은 입문서로는 제격이다. 윌 듀란트의 <철학이야기>와 견줄만하다. 묘한 외국어체가 오히려 역서의 맛을 더한다. 개성적인 입문서. 깊이 있어서 재미있는 철학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개정판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어느날 네덜란드의 어떤 클래스에서 갑자기 학생들 모두 불어를 술술하게 되었다. 그냥 책을 읽히기만 했는데. 실화다. 유식한 선생은 아이들을 망치고 무지한 스승은 아이들을 해방시킨다는 기가 막힌 교육철학적 에세이다.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고 있어 밤을 세워 통독했다. 읽기도 무척 쉬운 글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성서의 구조인류학 한길그레이트북스 8
에드먼드 리치 지음 / 한길사 / 199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모세에게 누이가 있었는가?


structualism ⅱ


曜日 : 20180318, 전주평화도서관 매주 일요일 오후 5시, 2층 회의실, <영어인문학동아리 B2B>

出處 : Oxford Critical Theory(App)

註解 : 양현(MS인문고전아카데미 대표 063-241-5832)


Structuralism became a global intellectual movement when its methodology was adopted by other disciplines and adapted to suit their own specific objectives and problematics. 


채택adopt과 적용adapt : 예를 들어 에드먼드 리치는 성서에, 알튀세는 맑시즘에, 라캉은 프로이트에, 푸코는 지식의 역사에... 오늘은 리치의 경우만 살펴보자. 


리치 역시 공시적 입장을 고수한다.  신화가 아무리 다양하고, 인물들이 계속 새롭게 등장해도, 용어가 바뀌고 무대가 달라져도 “신화의 전개에는 발전이라는 것은 없고 변증법적 도치만이 있을 뿐이다.”(에드먼드 리치, <성서의 구조인류학>, 한길사, 1996, 64쪽. 강조는 인용자. 이하 쪽수만 표기) 표면은 각양각색이어도 구조는 동일한 것이라는 말이다. 다른 말로, “이 모든 이야기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테마는 代置replacement이다.”(198)


그러므로 신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이나 용어가 아니라 위치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신화에서 의미 있는 요소들이란 모순들 그 자체이다”라는 원리를 내세우는 바, 리치 역시 “성서 이야기에서 모순되고 있는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성서에서 유의미한 요소들”(95)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모순되는 것이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혹은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것을 말한다. “롯의 아내의 지위는 아내이자 동시에 어머니이다.


아내와 어머니라는 지위는 롯의 아내를 동성애를 하는 소돔의 사회에서도, 아버지와 두 딸이 근친상간을 하는 산 속의 사회에서도 모두 비정상적으로 만든다”(333) "— 롯의 아내는 모세 5경 신화에 나오는 다른 등장인물과는 달리 이름이 주어져 있지 않다.”(331) “롯의 아내는 광야에서 소금기둥으로 변하는데, 이것은 지리적으로 기존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 사이의 중간점에서 물체화된 것이다. 즉 소돔에 의해 표현되는 기존의 문화와 소알 성을 바라보는 산 속의 동굴로부터 생겨나는 새로운 문화 사이의 지리적 중간지점에서 소금기둥으로 물체화된 것이다.”(332) 


바로 이것, 즉 중간자적이거나 매개적인 어떤 것이 신화에서 말하는 모순인 것이다. 카인이나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聖痕을 받은 자가 반사회적으로 성격지워지는 것은 주제론적으로 보아 본질적이다. 성흔을 받은 자의 이러한 성격은 그를 인간적이지도 않고 신적이지도 않은 중간자로 만들며, 두 영역을 연결하는 매개자로 만든다.”(340)


이처럼 “모순적이지 않으면 신화가 아니다. 성서의 신화적 논리는 신성한 왕이며 동시에 선지자인 주인공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모순을 요구한다. 그는 기혼이면서 미혼이어야 하고, 생식능력이 왕성하면서도 생식능력이 불능이어야 하고, 여자에게서 태어나지만 인간의 자식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209)


성모 마리아는 또 어떤가? 성모 마리아의 연령적 위치가 그렇다. 성모 마리아와 남편 요셉의 이야기는 모세 부모 이야기의 반복이다. 다만 나이에 차이가 있다. 요컨대 “늙은 요셉과 젊은 마리아의 결혼 이야기에는 젊은 아므람과 늙은 요게벳의 결혼 이야기에 있던 연령상의 불균형이 역전”(193)되어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처녀 마리아의 연령적 위치의 양의성ambiguity이야말로 신화의 핵심”이라는 점이다.(193)


“성서에서 예언은 거의 언제나 광야 아니면 강가의 제방에서 한다. 광야나 강가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다. 중요한 것은 우주론적 의미에서 그와 같은 장소는 이세상과 저세상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계선에 놓인 곳,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곳은 자연적 존재와 초자연적 존재가 서로 만나는 접점으로 어울리는 장소인 것이다.”(128-129)


보통 이러한 모순적으로 대칭되는 중간자 혹은 매개자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인지된다. “전 세계의 신화와 습속에서 중간적 상태는 성스러운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거나 ,아니면] 터부시되는 경향이 — 있다.”(34-35) 성직자와 무당을 떠올리면 잘 이해될 것이다.(어른들이 왜 문턱에 있지마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신화는 이처럼 구조적 동일성을 기저로 하여 ‘변증법적 도치’를 반복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악령에 사로잡힌 증세를 보이는 미리암을 치유하는 것은 모세이다. — 일곱 귀신이 씌워진 막달라 마리아를 치유하는 것은 예수이다. — 미리암과 모세의 이야기는 사라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반복한 것이다.”(204) 그러므로 “미리암은 모세의 누이이고, 사라는 아브라함의 누이이다. — 막달라 마리아는 사라와 미리암의 반복이다.”(205)


모세와 예수의 이야기도 동일하다. 출애굽기 1장 22절을 보라. 파라오는 명령한다. “갓 태어난 히브리 남자아이들을 모조리 강에 던지고 여자아이들은 살려주어라.” 이어 마태복음 2장 16절을  보자.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헤롯왕은 출애굽기 제1장에 등장하는 파라오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159) 


모세와 예수의 죽음의 장면에는 늙은 여인 혹은 어머니만 입회한다. “성모 마리아는 부활의 장면에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다.”(184) 부활이나 救助의 장면에는 젊은 여인이나 누이가 등장한다. “— 예수의 부활을 목격하는 사람은 일관해서 막달라 마리아이다.”(202)  “그 여자가 임신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하도 잘 생겨서, 남이 모르게 석 달 동안이나 길렀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서, 갈대 상자를 구하여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거기에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 그 아이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출애굽기 2:2-4) 정리하자면 “마리아(미리암)은 예수의 처녀 어머니이고, 미리암은 모세의 처녀 누이이며, 이시스 여신은 어머니이면서 누이이고 아내이며 딸이기도 하다.”(161) 


자, 왜 모세에게 누이가 있었는가(<성서의 구조인류학> 중 제3장이 <모세에게 왜 누이가 있었는가>이다), 를 이제 답할 때가 되었다. “모세에게는 누이가 있었다. 왜냐하면 신화적 논리가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보다 더 늙은 사람이 아니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213)


그런데,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의 의미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왜 모세에게 누이가 있었는가? 리치는 성서가 본격적으로 편집되기 이전에 신은 부분적으로 여성이라는 이념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점차 남성신을 강조하는 에피스테메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 신의 시간초월적-영속적 측면은 남성으로 인식[된]—반면 신의 시간구속적-변화적-창조적이며 동시에 파괴적 측면은 여성으로 인식되었다.”(206-207) 그래서 “정통 유태교와 정통 기독교는 둘 모두 성서에서 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제거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분적으로[만] 성공”했다.(207)


“따라서 성서에 상당히 많은 수의 여성 등장인물들이 남게 되었고, 이들은 어머니, 누이, 아내, 연인, 딸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 여성 등장인물들은 신에 가까운 남성 주인공들의 어머니, 누이, 아내, 연인, 딸 등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207)


정통 유태교와 정통 기독교 “신의 여성적인 측면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형식에 그치고 말았”는데, 그 결과 “성서의 여성들도 어쩔 수 없이 다른 종교체계의 여신들이 가지는 속성들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207)



문제틀 problematic : 이 용어는 알튀세가 다른 이에게 차용, 확산시켰다. 특정 담론이 갖는 이론적 통합성의 원천 혹은 생산적인 이론적 출발 지점을 가리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 레비-스트로쓰, 라깡, 푸코, 알튀세르에 관한 연구, 개정판
김형효 지음 / 인간사랑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토록 성실하고 치밀하게 원전과 씨름하고 사색하며 소화해 내 풀어쓴 구조주의 입문서는 아직 없다. 우치다 타츠루의 관련 책은 이 책을 읽기 전에 훑어볼만한 수준이다. 타츠루선생도 큰 틀에서 조감하는 정도를 목표로 썼다고 한다. 


물론 알튀세를 다루는 대목에서는 저자의 보수적 측면이 드러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사상을 왜곡하여 정리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알튀세를 좋아할만하게 만들만큼 철저한 판독이 이루어지고 있다. 여하튼 구조주의는 참으로 매력적인 사상이다. 


비록 후기구조주의가 구조주의의 틈을 발견, 해체의 드릴을 들이댔지만 솔까 구조주의는 진화심리학만큼이나 그 설득력이 후기구조주의보다 훨 강하다. 


그래서일까. 에드먼드 리치도 <성서의 구조인류학>(45쪽)에서 "논리적 교조와 반대론, 학리적 일탈들이 판을 치고" 있지만 "이 같은 학파 간의 논쟁에 별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일관되게 구조주의적 관점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힌다. 


김형효 선생은 보수가 맞다. 하지만 '본능밖에 없는' 헬조선-메이커-보수보다 이런 보수가 있어야 진보도 더 진보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 <인문학 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해보니, 지난 주 우리가 소막창 안주에 ‘처음처럼’을 마시며 나눈 노변정담 중, 우주생물학적 관점의 필요성과 함께 최진석 교수의 노자론 까기가 있었습니다. 지구생물학의 에피스테메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우주생물학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오늘은 안선생님이 비판하신 노자론에 대해 함께 까보기로 하겠습니다.

마침 김진석 교수가 2011년 <동양담론의 허구성>이란 제목으로 동양담론 전체를 비판했던 적이 있는데, 그 중 ‘노자’ 관련 부분만 정리해보겠습니다.

김진석 교수는 “儒家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한 방향에서 환영을 받은 것. 특히 서양의 기술문명을 극복한다는 신과학, 그리고 서양의 근원적 근대성에서 이탈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해체론에 의해서까지 재발견되고 찬송 받은” 道家에 대해서 분석합니다.

김교수는 우리에게 도교는 “흔히 개인적인 은둔을 강조한 세계관이라고 알려졌”고 “무위자연도 많은 경우 이런 범주 아래에서 이해되었다”고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도가는 유가적 수신제가치국과 직접 부딪치기보다는 그것과 피하거나 그것에서 조용히 도망가는 모습이었”고 “비교적 개인적인 몸가짐의 차원에 주의를 기울인 것으로 해석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던 것이 서양문화를 비판하는 대안으로 해석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이제 도가는 유가적인 가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사회적 세계관으로 해석되”고 “서양문명을 비판하는 기준이자 동시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해체론자들에 “따르면 노자의 도(道)는 우주론적 실체가 아니라 해체적 방법이라고 해석되었”는데, 김교수는 “이러한 시도가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해체론은 “모든 텍스트에 틈입하여 텍스트에 틈을 내고 균열을 내는 일”인데, “도덕경은 그렇게 틈을 내는 텍스트에 못 미치는, 오천 자 남짓으로 이루어진 자기 암시적인 주장의 나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천 자로 세상을 해체하고 텍스트를 해체할 수 있다고 믿는 일이야말로 어처구니없는 과대망상이 아닌가”라고 김교수는 묻습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학문을 배우면 나날이 분별이 보태지고, 도를 닦으면 날마다 망상이 덜어진다.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마침내 무위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니 아무 것도 하는 바가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도 없다. 따라서 천하를 취함에 있어서 항상 무욕으로 하지만 욕심으로 꾀하면 천하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而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故取天下 常而無事48 장)" 이 문장에 대한 김교수의 논평은 이렇습니다.

“학문은 분별을 자행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배우는 일과 이렇게 단순하게 대립된 도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단순한 주장과 대립을 좋은 뜻의 해체적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노자는 세상을 취하는 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체적 관점에서 도가를 번역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런 정치적 치세술의 관점을 대개 은폐하고 가린다. --- 이러한 탈정치화는, --- 무지한 왜곡 아니면 음모의 결과이다. 동양의 지배계급은 그러한 탈-정치화된 노자 해석을 선호하고 더 나아가 널리 유포시켰다고 할 수 있는데---”

김교수는 또다른 예를 듭니다. “장차 움츠러들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펴야 하고 약해지려고 하면 반드시 강해야 한다. 장차 쓰러지려고 하면 먼저 일어나야 하고, 빼앗으려고 하면 마땅히 보태주어야 한다. 이것을 미묘한 이치라 한다. 유약함은 강장함을 이기게 마련이므로 물고기는 연못의 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이로운 유약함이라는 통치법을 백성들로 하여금 보게 해서는 안 된다(36장)”

이 문장에 대해 김교수는 노자는 “백성을 무지하게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만든 채로 다스리는 법”을 설하고 있다며 “도가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라고 일컫는 사람들뿐 아니라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꼽는 사람들에 의해 이렇게 명백히 나와 있는 지배술이 알게 모르게 가려지는 일”이라고 비판합니다.

요컨대 “노자를 동양의 영원한 지혜와 서양의 대안으로 여기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음모와 새로운 음모의 결합이라는 것”입니다.

김교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노자는 그저 아주 약한 것, 겨우 존재하는 것, 아주 낮은 데 있는 것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노자가 우주적 상징으로 내세우는 물에서 드러”납니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게 없지만 강한 것을 꺾는 데에는 이보다 나은 게 없으니, 물은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드러움이 강장함을 이기고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줄은 누구나 알지만 어느 누구도 행사하지 못한다(78 장)” 김교수는 이 챕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물론 이렇게 약한 것이 센 것을 이기는 차원이 있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경우도 꽤 많다. 그리고 그것을 활동하는 것이 처세와 치세의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노자가 물의 상징을 빌려 말하듯이, 낮은 곳에 있고 미미한 것은 그 자체로 긍정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이기고 지배하기 위하여 높이 평가된다면, 그런 현명함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현명함은 노회함과 음험함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왜 강하게 하면 좋지 않은가? 강한 것은 다시 강한 것을 유발하고, 사회적으로 적을 만드는 일이다. 노자의 무위는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다스리는 법이다.”

결국 노자의 “무위는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정치, 자연의 정치”라는 게 김교수의 설명입니다. .

“물의 현묘한 겸손은 은근하고 노회하기는 하다. 그러나 최상의 선은 물과 같기만 한 것일까? 지나치게 노회한 부드러움이 아닐까? 장기적으로는 물이 바위도 뚫고 불로 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는 다만 그런 장기적인 기획만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실천은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이 순간적이고 직접적인 힘의 표출을 요구하고, 때로는 그냥 이기지 않기로 끝나는 수도 많다.”

김교수는 끝으로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있습니다. “서양문명이 초래한 위험과 위기를 이야기하는 담론이 흔히 의존하는 노자의 이념”은 “환경 생태론의 이름을 빌려 가상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은 소중한 이념”이지만 결국 노자의 철학은 “상대를 앞에서 공격하지도 않고 적을 만들지도 않는 노회한 방법.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듦으로써 지배하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면 백성의 이익은 백 배로 늘어나고 인을 끊고 의를 잊으면 백성은 다시 효성스럽고 자애로울 것이며, 기교를 끊고 지혜를 놓으면 도적이 없어질 것이다(絶聖棄智 民利白培, 絶仁棄義 民復孝慈, 絶巧絶智 盜賊無有, 19장)”

이 문장에서도 김교수는 이데올로기의 작동으로 바라봅니다. “인간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관계를 순백으로 부정하고 비난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안선생님이나 김교수의 논의가 다 맞는 건 아니지만 지젝이 "스피노자를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고 불평한 걸 생각하면 이러한 소수의 비판적 관점 역시 의의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들뢰즈의 표현을 빌려 노자를 전쟁기계로 쓰느냐 국가장치로 쓰느냐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듯합니다. 모든 게 그렇겠지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