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눈 쌓인 옥상에서 아이가 추락했다. 사람들은 아이가 놀다가 실족사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한 사람, 같은 건물에 살고 있던 ‘스밀라’만큼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믿었다. 사람들은 스밀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스밀라의 생각은 굳건했다. 왜냐하면 아이는 옥상에 올라가는 걸 두려워했다는 걸, 일종의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걸 스밀라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밀라는 사람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혼자서 비밀을 파헤치려고 한다. 아이가 왜 죽었는가? 이 질문이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시작이다. 덴마크 소설은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그 첫 만남이 추리소설이라니. 그 추리소설의 시작이 ‘아이가 왜 죽었는가?’ 라니…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속 읽어나가다가 엄청난 사실을 알아버렸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연 질문, 그것은 점점 커다란 문제들을 밝혀내는 단서가 됐다. 1이 답인 문제인 줄 알고 풀어보는데 답은 백단위를 넘어간다. 그래서 백단위가 답인 줄 알고 계속 풀었더니 어느새 천단위가 넘어가고 또 천단위가 답인 줄 알았더니 만단위가 넘어가고… 이런 과정이 필연적으로 반복되면서 문제가 커진다. 소설이 조금씩 웅장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이의 죽음에서 시작된 소설이 돈에 미친 문명을 비판하는 이야기까지 하는데 신기하게도 그것이 아주 차갑게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작가가 좀 흥분해서 쓸 법도 한데 아주 초연하다. 그러면서도 무서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니 약간은 오싹한 느낌이 든다. 얼음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는 그런 느낌처럼 말이다. 차가운 방식으로 뜨거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 독특한 서사!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스밀라를 지켜보면서 황석영의 ‘바리데기’에 나오는 ‘바리’가 생각났다. 묘하게 닮았다. 바리가 따뜻하다면 스밀라는 차가운 사람이지만 세상을 비판하면서 그것을 포옹할 줄 아는 모습이 닮은 것 같다. 사람들이 스밀라를 만나보라고 말하더니만, 역시 이유가 있었다. 스밀라와 데이트해서 기뻤다. 그 감각을 구경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