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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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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member0416. 아직도 물속에 있는 사람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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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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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 할, 아직도 현재진행중인 사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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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별들과도 같았던 이들의 이름이군요. 새삼 저자와 동시대, 동세대인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한국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고종석도, 언론학자이면서 <한국 근/현대사 산책>으로 오래 기억될 강준만도,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라는 정치적 지향에 걸맞는 고래의 발행인 김규항도, `똘레랑스`와 `88만원 세대`라는 개념을 잡아준 홍세화와 우석훈도, 불교와 사회주의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본 박노자도 모두 서재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네요. 그렇지만 역시 인생에 큰 획을 그은 한 사람의 논객을 꼽으라면 진중권입니다. 중3인 제게 아버지가 권해주셨던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보여지는 세상 바깥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게 했지요. (이제 이 책의 20주년 기념판이 나왔다니 기분이 좀 묘합니다만.) 그 이후 우리 모두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조선일보 불매 운동의 기억은 제 `생각의 좌표`를 잡아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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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강 모두 신청합니다. 개인적으로 서현님의 책을 좋아해서 자꾸 손이 가게 되더라고요. 파주의 효형출판 사옥도 시간의 흐름이 묻어날 수 있는 깔끔한 공간이었고요. 15년 이상 책으로만 만나온 작가님의 강의를 꼭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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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8년, 학교에서 있었던 한홍구 선생님의 강연. 2006년에 한겨레 특강으로 뵙고 2년만이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학교에서 뵙고 거리에서도 몇 번 마주쳤었고. 다시 2년이 지나, 조만간 학교에 오신다고 하니 문득 옛 생각이 나서 지난 글을 정리해본다. 그 동안 있었던 다른 강연들도 좀 정리를 해야 될텐데, 게을러서 큰일이다.

 과거가 단순히 옛날에 일어난 일일까요?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 강연. 해방 당시에는 친일파가 당대의 일이었다고 하며 청산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역사 - 친일파 관련, 한국전쟁 관련,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관련 - 를 잠깐 언급했지요.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모든 것은 친일파 청산과 관계가 있지만 제대로 풀려면 가까운 과거, 즉 지금 이해관계가 걸려있는 문제를 해결하면서 나가야 한다더군요. 이를테면 이런 겁니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에서 정직하게,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라고 할 수 있겠냐는 거죠. 그래서 BBK 사건이 투표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걸로 귀결된다구요. 사실 5년 전 선거에서 BBK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당장 그 후보는 책임을 지고 사퇴했어야 겠지요. 그게 아니더라도 당선은 힘들지 않았을까 예측해봅니다. 이회창이 떨어진 것엔 대쪽 이미지인 그에게도 아들의 병역 문제라는 비리가 있었다는 것이 일정 정도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르지요. 물론 전과에 대해 제대로 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당선 무효 소송을 준비하는 분들도 있지만, 어쨌든 국민은 2007년 12월 19일 당시 명바기(본인이 좋아하는 대로 영어식입니다. 거기에 '읍니다'보다 오랜 연원을 가진 연철 표기를 하니 완벽하군요'ㅁ')를 선택했습니다. 경제를 살릴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말입니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좋고 나쁨으로 대의를 판단하려는 이와 같은 현상의 밑에는 역사 문제가 있다는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과거 청산이 엄격하게, 많이 할수록 좋은 것은 아니라는, 그래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대의에는 찬성하지만 방법에는 유보한다는 입장도 역시 밝혔습니다. 하긴, 지금의 제가 생각해봐도 해방 당시에 제대로 친일파 - 민족 반역자 청산이 이루어졌다면,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린 사람 모두가 벌을 받았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은 강연에서도 언급했듯 민족투사를 밀고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러나 해방 이후 좌·우 대립이 격화되면서 일제 시대 고등경찰들은 '빨갱이를 때려잡는 반공 투사'라는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30년대 이후 국외에서 무장투쟁을 벌인 세력들 중엔 사회주의 계열 역시 많지만 이들이 오히려 친일파에 의해 청산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지요. 한홍구 교수님은 이를 두고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8·15 때나 삼일절에 성조기를 들고 나오는 '자칭 우파'들이 미국에 대해 뼛속까지 고마워하는 이유는 여기 있는 게 아니겠냐더군요. 그러면서 '우파를 찾다 보니 친일파를 등용했다'라는 어이없는 말을 간단하게 논파했습니다. 왜 미국이 친일파와 손을 잡았느냐, 그건 백범 선생이 진짜 '우파'이기 때문이다, 라는 이유였지요. 보통은 민족을 내세우는 것이 우파이며 이것은 강점인 동시에 약점으로 작용한다고 하시더군요. 하긴 그렇게 보자면 정말 '자칭 우파'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지지요. 요 근래 촛불시위를 두고도 말들이 많던데, 특히 중앙일보에 광고낸 쪽은 좀 보기 그렇더군요. 좌빨 선동이라는 케케묵은 논리에다가 더해서 애국은 지갑에서 나오는 거라니(…)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해방 정국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48년 5·10 선거는 단독정부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우파들 중에서도 악질 친일파는 처단해야 된다고 믿는 이들이 많았을 것 - 아마 당시에 여론조사를 실시했다면 친일파 청산에 99% 찬성하지 않았겠냐고 하셨어요. 친일을 한 사람들도 자신들이 벌을 받아야겠지만 '죽이지는 말아달라', '좀 너그럽게 봐줬으면…'이라는 심정이었을 거라면서요. 그래서 좌익과 한독당마저 보이코트를 한 우익 제헌국회였지만 그 속에서 반민특위가 조직될 수 있었다고요. 그렇지만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이 일어나고, 반민특위가 해산된 데 이어 보름만에 백범 선생이 암살당한 역사. 이를 놓고 친일파가 친일파 청산을 막기 위해 벌인, 하나의 끈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한홍구 교수님 역시 언급하셨듯이 안두희의 말년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나요. 백범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한국전쟁으로 슬그머니 풀려나 승진까지 하고, 예편 이후에는 군납업자가 되어 강원도에서 가장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기도 했다죠. 이쯤되면 너무하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혈서까지 쓰고 만주군관학교에 갔던, 자칭 '불행한' 정치군인은 자식까지 정계에 뛰어들지만 독립군의 후손들은 빈곤의 대물림으로, 혹은 국적법 때문에 아예 대한민국 국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한 채 타국에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이래서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되는 거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되지요.

 한국전쟁 중의 보도연맹 사건과 민간인 학살 또한 언급했습니다. 이미 일제 말기에 실행될 계획이 있었던 것 - 이러니까 새삼 79년 박정희의 죽음으로 미루어진 부마 항쟁 진압이 80년 광주로 시공간만 바꿔서 그대로 행해진 게 떠올랐지요. 나중에 한홍구 교수님이 언급하시지만요 - 이 이 시기에 이루어진 거라구요. 진짜 좌익은 월북하거나 지리산으로 들어갔지만 살기 위해 이리저리 눈치보다 죽어간 사람들은… 게다가 평화 통일을 주장하다가 죽산 선생이 사형당한 이후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유지됐다고 하셨지요. 세칭 '진보당 사건' 이후로는 감히 진보라는 말을 쓰지도 못하고 혁신·재야 세력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하시면서 말예요. 그러면서 책에서도 익히 봤던 분들의 예가 줄줄 이어졌습니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기독교 사상가 함석헌님, 친미단체에서 활동했던 장준하님, 반공포로로 남한에 남는 것을 선택한 김수영님, 주한미군 철수 반대를 주장하고 미군정 통역이었던 문익환님, 국군장교 출신 리영희님, 극우학생단체 행동대장이었던 계훈제님… 우리가 이른바 '진보적인' 인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이력이라면서, 양심적인 게 진보적이었던 세상의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강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주위의 힘이 없는 사람들을 돕다보니 어느새 좌파가 되어있었다는, 예전에 만난 어떤 분의 말씀 또한 따라서 떠올랐습니다.

 작년 12월 19일, 예측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결과가 나왔을 때는 새삼 좌절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긴 저 역시도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인수위가 시작되고 본격적으로 정부가 출범하며 5년을 안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씀하셨을 때 다 같이 웃었던 사람들. 아마 한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울의 촛불시위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구호가 '고시 철폐 협상 무효'와 '이명박은 물러가라'지요. "촛불시위의 배후는 누구냐"고 묻는 대통령에게 'MB, 네가 내 배후'라던가 '촛불은 내가 샀어요'라고 응수하는 시민들, 한나라당과 서울지방 경찰청 홈피 해킹으로 발랄하게 대응하는 시민들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죠, 정말:)

 그리고 80년 이후 자살골만 3번 넣었던, '새 판이 한 번도 짜여진 적 없는 역사'에 관한 언급이 이어졌습니다. 87년 6월 6·29선언을 이끌어냈지만 결국 노태우가 당선되고 말았죠. 당대에는 '5공 청산'을 얘기했지만 3당 합당 등으로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구요. 그러다 97년 대선에서는 DJ가 당선됩니다. 이성계 죽고 처음으로 변방인이 중앙 권력을 잡은 거라고 얘기하시더군요. 다들 아시다시피 당시는 IMF 관리 체제에 있었고 이것은 구조조정의 절대적인 기회였습니다. 하지만 IMF에서 원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중 관료개혁이나 재벌개혁 등이 밀리고 대여섯번째 순위에 있던 노동시장 유연화가 최대 과제로 떠올랐지요. 다시금 개혁의 대상이 개혁 주체로 바뀌어버린 겁니다. 뭐, 그래도 DJ가 당선될 때는 외환위기+이인제가 가지고 간 500만표+역 지역주의(DJP 연합)+김현철 스캔들 등등의 이유로 40만표 차가 나왔고 수구세력은 5년만 참자, 라고 했는데 02년 대선은 다들 알다시피 노통이 당선됐죠. 때문에 탄핵 - 탄핵안을 제출한 한 사람은 친일법안을 누더기로 만든 5공의 마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유신헌법을 기초했으며 초원복집 사건의 책임자라지요 - 이라는 초강수를 뒀지만 오히려 총선에서 열우당 단독 과반수+민노당 10석이라는 역풍을 맞고 맙니다. 하지만 이 때에도 국보법은 지겹게 살아남았고 오히려 노통은 '대연정'을 운운하며 국민을 저버립니다. 통합민주당 몰락에는 이것이 작용했다고 하셨는데, 선거 전략의 부재도 한몫했다고 봅니다. 일단 대표가 손학규라는 것부터가 좀 그렇지요. 한나라당에 자유선진당, 친박(무소속)연대, 통합민주당 모두 전현직 한나라당 당원이 대표라는 게, 사실 그 놈이 그 놈으로 보였단 말이죠. 게다가 명확한 미래는 하나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저 네거티브 전략으로만 일관하는 것 - 특히 4월, 청주에 다녀오면서 본 '견제'라는 선거 전략 간판은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 으로 나갔다니 할 말이 없더군요.

 원래 예정 시간은 1시간 정도였지만,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번 강연의 마무리는 역시 어제와 오늘이었습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에서 87년 6월 항쟁까지의 사건은 영웅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하셨지요. 이번 촛불시위도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구요. "왜 내 운명을 네 멋대로 결정해?"라며 거리로 나선 촛불 소녀들. 그러면서 역사에서 기회가 왔을 때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를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당신이 힘을 더하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쏟아진 우레와 같은 박수.

 이후로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첫번째는 현재의 촛불시위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 하는 거였는데요. 비장함에서 즐거움으로 바뀌고 있는 시위 문화를 얘기하며 지도부가 없다보니 저녁에도 해산을 못하는 처지라고 하셨습니다. 적법한 절차에 의해 선출된, 임기가 한참 남은 정부. 그러나 대의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자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서는 것이라며 지속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하다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 역시 아직 생각을 잘 잡지 못하겠군요. 지도부가 있는 것이 힘의 결집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반면 주도권 다툼과 지도부의 중심 노선과 맞지 않는 사람들의 이탈을 불러올 것도 뻔히 보이잖아요. 내일은 아마 못 올라갈 듯한데, 최대 인원이 모일 거라고 생각되는 내일부터 주말의 분위기를 보고 좀 더 고민해야겠습니다.

 두번째이자 마지막 질문은 직접 실습을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한테 역대 대통령 중 누가 제일 좋냐고 물어보자 '경제 대통령' 박정희가 1위, '의리-_- 대통령' 전두환이 2위를 차지했답니다. - 하긴, 얼마 전 선배랑 밥을 먹을 때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고등학교 실습에서 애들이 하도 명바기 욕을 하기에 그럼 작년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았겠냐고 물어봤대요. 압도적인 다수가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합디다. 애들한테 있는 이미지가 '부시의 카트를 미는 MB, 눈물 흘리는 근혜공주, 봉화마을의 노간지'래요 - 때문에 교과서를 써서 올바른 역사인식을 길러줄 생각은 없냐고 물어봤지요. 그러자 구속받지 않는 형식이라서 교과서 스타일의 글은 아니라고 답하셨습니다. 진보·보수가 역사의식을 주입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지금 촛불시위에 학생들이 많이 참여하는 건 "문제가 있는 걸 왜 먹으라고 하냐", 즉 자기 이익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라구요. 따라서 교사는 지식 전달에 더해서 '관점의 수립'이라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통일의 경우 지식과 관점의 문제가 다를 수 있는데 당위 차원이 아니라 통일과 군대 문제를 결부시키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익'만'을 생각하면 안 되는 문제니까 '나'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을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걸로 끝을 맺었습니다.

 마치면서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서명을 받았습니다. 무려 집에서 실어온 책 - <대한민국사>랑 <현대사 다시 읽기>가 전부 집에 있더라구요 - 으로 말이죠. 그러면서 예전에 연대 위당관에서 뵈었던 얘기를 잠깐 꺼내자 무슨 과냐, 몇 학년이냐 물어보시고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선생님 되세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러고는- 지난 5월 31일 시청 앞에서 다시 뵈었습니다. 왠지 괜히 반갑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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