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

작년 11월, 난 카트와 함께 줄을 서 있던 어느 매장 계산대에서 나의 옛 제자를 알아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5-6년 전에 내 제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녀가 어떤 반에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난 별다른 뜻 없이 <잘 지내요? 여기 일은 재미있나요?>라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네, 네,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통조림이며 음료 등의 가격을 입력한 후에 <기술학교 들어가서 잘 풀리지 못했어요>라고 말하는 거였다. 그녀는 내가 아직도 자신의 진로를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녀가 왜 기술학교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분야로 들어갔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후였다. 난 그녀에게 <또 봐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벌써 왼손으로 다음 손님의 물건들을 집어 들면서, 오른손으로는 숫자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두드리고 있었다.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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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 어머니, 내 학업, 그리고 다시 아버지 등등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써서 그녀에게 매주 보냈다. 그것은 홀가분하게 짐을 덜어버리자는 식이었으므로 아주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답이 없다는 그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는 밑천이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그녀를 유혹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기 때문이다. 나는 화장기 거의 없는 늘씬한 금발 머리의 여인, A. E.와 닮은 여인을 본 적이 있는 카페에 매일 저녁 들른다고 꾸며댔다. 나는 항상 그녀 정면에 자리잡고 앉았고, 그녀는 다리를 꼬고 앉아 내게 은근한 미소를 던지곤 했다. 그녀의 치마 아래로 검은색 스타킹이 눈에 띄었다. 편지를 쓰면서 나는 내 입으로는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욕망을 A. E.에게 불러일으킬 심사로 그녀의 대체물인 여자를 통해 에로틱한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고 끝내는 A. E.에게 만나자는 요구를 적고 편지를 봉한 다음 침대 속에 들어가 자위행위를 했다. 훗날 나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편지를 부치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그런데 그 순간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단지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내게 무슨 일이고 일어나길 바라는 생리적 욕구와도 같은 것이었다. 첫사랑을 겪어 보고 싶은 욕망. (14)

사랑을 나누면서 그녀는 몇 번인가 "난 당신 부인이야"라고 외쳤는데 그녀의 말엔 아무 뜻도 없었다. 사실 그녀는 진짜 내 부인이 되기보다는 부인 연기를 좋아했다. 그때 그 상황이 실패처럼 느껴졌다는 기억만 남았다. (42)

어머니는 그 다음주에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원하는 가구는 모두 가져가도록 했고 심지어 트럭에 짐 싣는 것을 거들기까지했다. 나는 그 사이 내 손으로 처음 한 빨래들을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마치 오래 전부터 다들 이 일을 마음속으로 대비한 사람들처럼, 모든 게 차분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자갈길 위로 떠나는 트럭 소리가 났고 뒤이어 긴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녁에야 아버지는 어머니가 떠났다는 것을 실감하고 어린 아이처럼 울었다.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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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와는 또 다르게 순박하게 진실하다. [단순한 열정]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청년의 투박한 열정 버전이랄까. 아니 에르노는 사랑이란 정념만을 깔끔하게 얘기했다면 이 청년은 자기 삶을 얘기한다. 그 정념에 덕지덕지 붙은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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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3)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72-73)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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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을 그릴 수 없는 사랑이란 정념의 정가운데에서 생생하게, 낱낱이 그린 짙은 사랑의 면면들. 누군가로 인해 뜨거운 열병을 앓았던 경험을 거의 잊고 지냈는데, 그때 겪었던 뒤섞인 감정덩어리들이 나와 내 일상을 어떻게 바꾸었었는지 또렷이 기억나게 해주었다. 얇지만, ‘단순한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정직하게,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그녀의 글은 특정 또는 불특정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정념을 포착 또는 해소하기 위해 쓰였다. 그녀 또한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보고 깊이 진단해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래서 어떤 작위적인 문체도, 정교하게 조작된 감정도 없다. 그렇기에 어떤 우회로 없이 직진하듯 마음 가까이 달려온다. 그녀의 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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