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랄한 자기 고백. 철저하고 냉정하게 자신과 가족들을 돌아보고 돌아본 자만이 엮어낼 수 있는 용감한 근원적 이야기. 이상적인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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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 나는 애어른 또는 어른애들을 가장 반기는 건 시장 자본주의다. 어른의 구매력을 지닌 아이는 체제 유지에 이상적인 소비 주체다. 여기다 허영에 쉽게 자극되는 쓰레기가슴 그리고 소비 외의 쾌락에 무지하도록 보호해 주는 차안대가 더해졌다고 상상해 보라. 자본주의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51) - P51

그렇다. 난 쉬운 선택들을 해 왔다. 그러면서 선택하지 않은 길들을 어렵다는 말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기를 수십 년, 당연히 쉬움들이 쌓여 내가 됐고, 내가 택하지 않은 모든 어려움들이 내 주위에 쌓여 내 경계가 되고 불가능으로 굳어졌다. 다 너무나도 쉽게. (59) - P59

뻔뻔한 남자들을 숱하게 상대해 보고 얻은 교훈이 뭔지 알아? 어지간히 해서는 잘못 인정, 반성은커녕 역공격만 안 당해도 다행이라는 거. 그만큼 준비가 치밀해야 해. 확실하게 꺾어 주지 않으면 사과라는 옵션이 눈에 안 들어오는 부류거든. (165)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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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부장에게는 끝이라는 개념, 무엇이건 시작을 하면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중간에 그만둠으로써 무책임한 가능성의 세계에 남는 데 안도하는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초보자와 아마추어인 상태로 남는 거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완성되지 않으면 그게 포기나 실패라고 생각하죠.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도달해야 하는 건 사실 매번 하던 걸 엎고 새로 시작함에 두려움이 없는 성실한 초보자이자 아마추어, 실패자이자 구도자인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트랙에 수많은 출발선을 긋다 보면 결국은 출발선이 결승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113) - P113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는 마음을 지우는 것, 취미를 쓸모로 바꾸어 유용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게 바로 아마추어 되기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113) - P113

일상적인 가학은 친절과 배려의 옷을 입고 온다고 알리스는 생각했다. 농담으로 위장한 상냥한 폭력에 대해 알리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게 된 것들이었다. (127) - P127

다음에 만나면 내가 밥살게라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은 오지 않았다. 형이 되어 가지고 이런 거밖에 못 사 줘서 미안하다. 부 감독은 또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그런 부끄러움이 많은 부 감독에게 필요한 건 다만 완전히 잊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첫 작품이 성공했고 그게 끝이었다. 애매한 명성. 모른 척하기에 첫 영광은 너무 컸고 그다음은 너무 처참했다. 익명이 될 수도 없는 어설픈 명성이 그를 점점 더 부끄럽게 했다. 그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고독사뿐이었을지도 모른다. (182) - P182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쓰이지 않은 후반부에 이 신의 존재 이유가 밝혀질 수도 있었겠지만 완성되지 않았으니 영영 모를 터였다. 생각해 보면 삶도 마찬가지다. 완성되기까지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도대체 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 끝에 가면 결국은 이런 맥락에서 필요했구나, 꼭 필요한 장면이었구나 하면서 납득할 수 있게 될까?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러나 죽기 직전에야 밝혀지는 진실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수없이 수정을 거쳐야 하는 법인데. 그러니 한 번뿐인 삶이 엉망인 건 자기 탓이 아니었다. 원래 그렇게 엉망으로 살아가게 생겨 먹은 거였다. 그러니까 자책하는 대신 맛있는 거나 먹여 주며 하루 또 하루 살아 내면 되는 것이다. 엉망인 시스템 안에서도 착실하게 하루에 한 장면씩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모를 장면들을 써 나가는 자신에게 더 많은 다정하고 단 것들을 선물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188) - P188

다행이야 내가 아니라서, 처음 그 말을 마음에 품은 순간, 그렇게 안전하다 믿은 이편에 서서 자신의 곁을 스쳐 간 사람들을 하나둘씩 저편으로 밀어내는 동안 고독사에 이르는 긴 여정은 이미 시작된 거였다. (224) - P224

"대체로 좋아한다고요."
서운해야 하는데 그 말이 좋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전규석을 완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날도 아닌 날도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대체로 좋았다. 그렇게 여백이 있는 관계라서 오래 함께할 것 같았다. 좋지 않은 부분도 수긍하고, 그것까지 포함해서 좋음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와 포용의 말로 들렸다. 그것이 이수연이 전규석과의 관계에서 오래 매달리기를 끝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였다. (256)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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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고독을 빼앗지 않으면서 고립으로부터 나를 보호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했고, 동시에 나에겐 나만의 우정이, 쾌락이, 일이, 근심이 있었다. 원하는 대로 그에게 어깨를 기댄 채 다정하게 저녁을 보낼 수도, 오늘처럼 방안에서 소녀처럼 홀로 지낼 수도 있는 것이었다. (90) - P90

나는 로베르가 평화 속에서 느끼는 권태를 이해했다. 이 평화는 우리에게 삶의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채 삶 자체만을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의 출입문 앞에서 추위와 어둠을 다시 느끼며, 나는 한때 우리가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추위와 어둠에 맞섰던가를 회상했다. (136) - P136

"고독을 강제로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그보다 더 서투른 방법은 없어요." (155) - P155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옷을 잘 입을 줄 알고, 스스로를 과시할 줄 알고, 허영의 작은 기쁨들이나 강한 관능의 흥분을 알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무 늦었어. 문득 내 과거가 왜 때때로 타인의 과거처럼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지금의 내가 타인이니까. 서른아홉 살의 여자, 나이 든 여자니까. (157) - P157

앙리는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야."
그는 나딘을 더 꽉 안고 이렇게 말해줬어야 했다.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게." 그 순간 그는 그러고 싶었다. 인생을 걸게 하는 한순간의 욕망. 그러나 앙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과거는 되풀이되지 않아. 과거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거야.‘ (196) - P196

‘필요한 건 시간이야!‘ 앙리는 잠에서 깨어나며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는 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야.‘ 아파트의 문이 막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외출했다가 벌써 돌아온 폴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걷었다. ‘나 혼자 산다면 몇 시간쯤 더 여유가 생길 텐데!’ 쓸데없는 대화도, 규칙적인 식사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길모퉁이의 프티 비야르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간지를 보고 있겠지. 신문사에 갈 때까지 일을 하고,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일이 끝나면 얼른 밤참을 먹은 다음 밤늦게까지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성공적으로 《레스푸아》를 이끌면서 소설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238) - P238

하루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일, 피해야만 하는 진실, 거부해야 하는 추억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다. (375) - P375

앙리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거대한 강연장을 개인의 방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앞에 있는 5,000명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5,000배가 된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는 거의 대화의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429) - P429

마치 마을이 다시 한 번 불타는 양 대기가 뜨거웠다. 건초더미며 관목 아래마다 사람들이 뒹굴고 있었다. 남자들은 장례식의 겉옷을 던져버렸고, 여자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간지럼을 태우는 듯 작은 비명들도 들려왔다. 그들이 달리 뭘 할 수 있을까? 술 마시고 웃고 서로 간지럽히는 것 말고는, 살아 있는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82) - P482

열렬한 독자는 자신의 감탄을 반드시 표현해야만 한다고 믿는지, 어떤 이는 불면증의 묘사에 감명을 받았다고 얘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묘지에 대해 서술한 문장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전부 무심히 써 내린 의미 없는 구절들이었다. 기트방타두르는 비난을 담은 어조로, 왜 그토록 형편없는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 묻고는 그 주인공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 사람들은 소설의 등장인물에 대해 정말 까다롭군!‘ 앙리는 생각했다. ‘하나의 결점도 그냥 지나치질 않아. 게다가 정말이지 모두가 이상한 방식으로 읽고 있어! 대부분의 독자들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대신에 맹목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모양이야. 때때로 단어 하나가 그들의 마음속에 울려 아무도 모르는 그들의 추억을 건드리고 향수를 자아내거나 어떤 이미지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고 믿으면 잠시 멈춰 자신을 비춰본 뒤 황급히 떠나는 거야. 독자들을 직접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562-563) - P562

그들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생각하는 것에도 흥미가 없고, 그들이 억지로 견디는 권태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관심 있는 일이라곤 꾸며낸 유명인사가 되는 것, 직업으로 성공하는 것뿐이야. 저들은 더 가까이에서 질투하기 위해 서로 어울리고 있는 거야. 끔찍한 족속이군. (564) - P564

사람들은 사마젤이 인간과 사물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그는 자신의 격렬한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할 따름이었다. 바로 이 격렬한 활력에만 그는 도취해 있었다. 이 얼마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게다가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늘 외식을 즐기는 것도 그의 성정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보다 목소리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을 어떻게 진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브뤼노와 모랭은 진지했지만 우유부단했다. 바로 라솜이 표현했던바, 개인주의를 희생하지 않은 채 스스로 사회에 공헌한다고 느끼는 지식인들이었다. ‘나처럼.‘ (305)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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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내 콜라주마냥 끊임없이 덧대지고, 교차하는 상황마다 여러 대립적인 가치들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그 줄다리기는 ˝형식˝을 무기로 승기를 잡았다가 패기에 밀리다가 하면서, 종국에는 어느 쪽의 승리 없이 나뒹굴고 겹쳐진다. 여러 대립항의 수많은 대결 중 내게 와닿는 교전이 있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지.
선형적 구조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밌다. 작가가 인물의 행위와 감정 밑에 숨겨진 내밀한 동기와 전략을 샅샅들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추악하거나 멍청한 밑바닥의 모습에서 가장 상위의 철학적 상징을 띄워낸다.

성숙과 미성숙, 숭고와 추악, 진실과 허위는 일맥상통한다. (2022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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