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읽었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속 연인들처럼, 만사에 염세적이고 무기력한 딜레탕트가 소설 속에서 느적느적 움직인다. 결말도 그가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파멸을 해도 파멸 같지 않은, 뜨거움 없는 미진한 파멸뿐. 무겁고 어두운 공허함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며 열병을 앓는 모습만이 마지막에 남는다. 가부장제의 관습과 자본주의의 에토스에 저항하며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고, 육체의 나태함과 정신의 부단함만을 추구하는 심미주의자들의 소설 속 모습은 결국 한결 같구나.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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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 사랑 속에, 사랑 옆에 선 인간들. 베아트리스였다가, 알랭이었다가, 조제였다가, 에두아르였다가, 베르나르였다가. 상처 받은 사람에 이입하는 것은 안락한 괴로움을 주지만 상처 준 사람에 이입하는 것은 손사래치며 거부하고픈 고통을 준다. 베아트리스에게서 보기 싫은 내 얼굴을 본 듯, 읽다가 잠시 책을 덮어야 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 앞에서 나는 왜 그리 이기적이었고, 왜 여전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가. 그녀와 같은 같잖은 나르시시즘과 자존심 그리고 야망 때문인가. (1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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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고통의 외침 가운데서 태어나.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그 외침이 완화된 형태일 뿐이야. (135)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오직 그녀, 조제만이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시간의 지속성을, 고독의 완전한 중지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과 같았다. (136-137)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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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있고 그것은 정치가들이나 활동가들이 딛고 춤을 출 수 있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마루를 까는 일이다. 역사적 현실이 학자들에 의해 확보되지 못한다면 정치가들은 날아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

단적으로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 5.18은 우리의 몸에서 출발하여 영혼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26)

광주는 절해의 고도였다. 항쟁을 결의한 젊은이들에게 마지막 언명은 ‘광주 사수‘였다. 계엄군의 군사력 앞에 그들은 광주를 지킬 수도 없고, 도청을 지킬 수도 없으며, 사과를 받아낼 수도 없고, 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외상없는 ‘피의 값‘을 위해, 언젠가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과 부활을 위해서는 누군가 거기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전쟁이나 혁명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광주공동체, 민족공동체의 도덕성과 명에를 위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십자가는 그들이 용감하게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젊은이들을 희생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그들이 인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58)

어떤 이념이나 사상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모든 문제를 대면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며 어떤 특정한 문제들을 외면 한다면 그 이념이나 사상은 스스로 위선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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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레와의 이별, 그리고 첫 번째 발견: 다행히 아무도 나를 모른다> 매일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모든 이들을 상상해보라. 사람들은 드러나고 보여진다. 한 개도 아닌(당연한 소리지만) 수많은 눈들을 통해서, 그게 어떨지그냥 상상해보라.
우선 언제나 사람답게 행동해야만 할 것이다. 단 하루라도 비인간적으로 살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비인간적이라 함은 즉 무례함, 뻔뻔함, 사악함, 더러움 같은 부정적인 성질들을 뜻한다. 사람들은 비인간적인 남들을 보고 나면 그들을 탓하는 동시에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그러한 삶이다.
반면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루 종일 그래도 된다. 일부러 사람답게 있을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도 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 그 사람들이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을 해야 하는지 짐작해보라. 직장에서, 집에서 배우자와 함께(아직 아이들이 부부 생활을 박살내지 않은 경우에). 나는 상황이 더 나쁠지도 모를 아이들에게도 애잔한 심정을 담아 보낸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감시당한다. 특히 말을 배우는 시기에 그렇다. 사람들은 아이들 앞으로 몸을 기울여 ‘엄마‘나 ‘아빠‘, 또는 ‘감사합니다‘ 등 끔찍한 말들을 강요하고 얼굴을 가까이 대고 바라본다. 아이들이 그 말을 할 때까지.
곰곰 따져볼수록 기분이 개운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들은 정말 욕보고 산다. (68-69)

저게 대체 무슨 꼴이람, 하고 혀를 차며 자리에 선 채로 다른 쥐인간들을 관찰한다(나는 이제부터 이들을 ‘쥐인간‘이라고 부를 작정이다. 달리 부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력가들은 여러모로, 그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최악이다.
노력가들은 쥐인간이 되기를 미친 듯이 갈망한다.
다른 쥐인간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고 싶어 한다.
하등한 자들 가운데 가장 하등한 자들이다. 실로 쥐인간들보다 훨씬 형편없다. (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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