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눈과 입이 만들어낸 올가미에서 벗어나 자기 본위의 삶을 사는 법. 자신의 존재 하나만으로 삶을 충만하게 채우는 법을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을 잊고 자연의 체계 안에 포섭되는 경험을 간증하는 부분에선 오쇼가 생각날 정도. 당시 세상과 등진 루소의 말들에서 종종 변명이나 정당화의 어조가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그가 말년에 깨달은, 삶을 살아가는 태도에는 분명 곱씹어보며 배울 점이 있다. 진정한 자아의 향유야말로 삶의 제일이자 유일의 목적임을 강조하는 루소의 말들은 지금의 사람들에게도 분명 호소력을 가질 만한 것이고, 그래서 더 놀랍다. 거기서 오는 그 행복과 평화, 오늘의 나도 추구하며 살고 있으니.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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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나와 다를 바 없는 나,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내가 언젠가 재판을 받고 일말의 의심도 없이 괴물, 풍속을 해친 자, 암잘자로 여겨지리라고, 인류가 끔찍해하는 대상, 하찮은 이들의 조롱거리가 되리라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침을 뱉게 되리라고, 한 세대가 모두 만장일치로 나를 생매장하고 재미있어하리라고 내 상식으로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이처럼 기이한 격변이 일어났을 때, 불시에 그 일을 당한 나는 우선 매우 당황했다. 흥분과 분노로 인해 나를 진정시키는 데 십 년은 족히 걸린 착란 상태에 빠져버렸고, 그러는 동안 오류에 오류를 거듭하고 잘못과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며 부주의하게도 내 운명을 이끌어가는 자들에게 수많은 수단을 제공했으며, 그들은 그 수단을 교묘하게 사용해 내 운명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8-9)

나는 이 글을 감추지도 보여주지도 않겠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 이 글을 내게서 앗아간다 하더라도 그것을 썼던 즐거움이나 그 내용에 대한 기억, 이 글을 낳은 고독한 명상들, 내 영혼이 다할 때에만 그 원천이 소멸될 고독한 명상들을 빼앗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처음 재난이 닥쳤을 때 운명에 맞서지 않고 지금과 같은 결심을 했더라면, 사람들의 모든 노력과 온갖 가공할 만한 술책이 내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어떤 음모로도 내 휴식을 방해할 수 없었으련만. 이제는 그들이 성공하더라도 앞으로의 내 휴식을 방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나를 모욕하며 마음껏 즐기게 내버려두라. 내가 나의 결백을 즐기고 그들의 뜻과는 반대로 평화롭게 생을 마감하는 것을 그들이 막지는 못하리라. (17)

나는 살기 위해 태어났으나 살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간다. (22)

이런 식으로 매사에 올곧고 솔직한 태도가 세상에서는 끔찍한 죄가 되어버린다. 그들처럼 거짓되거나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점 말고는 다른 죄가 없는데도, 나는 동시대인들에게 고약하고 잔인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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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1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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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스: (마침내) 무슨 일이죠? 길을 잃었나요?
블랑시: (약간 신경실적으로)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유니스: 여기가 거기예요.
블랑시: 극락이라고요?
유니스: 여기가 바로 극락이에요.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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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0
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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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일이 지나갔다. 지타는 그 이탈리아인을 만나 잠을 잤고, 그는 그녀의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인니는 조금씩 암스테르담 공기 속에서 조금씩 망가져 분해되었다. 새로운 사랑은 옛 사랑을 불태워 버리는 화장터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코닝 광장을 걸어갈 때 한 줌의 재가 인니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지타가 입으로 그 재를 핥아 내지 않았더라면 빼낼 수 없을 게 뻔했다. 지타는 그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9-30)

인니는 세 가지 일을 확신했다. 지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자기는 죽지 않았다는 것, 내일이면 주식 거래가 팽이처럼 잘 돌아갈 것이라는 것. (36)

이 스키 챔피언은 철학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신문과 잡지에 정기적으로 사진이 실리는 이 사팔뜨기 학자에게 그는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생각, 생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많이 읽은 것뿐만 아니었다. 그가 본 것들, 영화, 그림은 그의 감정 속에서 변형되곤 했다. 즉시 단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감정, 감각, 인상, 관찰에서 우러나오는 수많은 무형의 것, 그것이 그의 사유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 무형의 것을 단어로 감쌌지만 표현되지 않는 것이 언제나 더 많았다. 훗날 정확한 답을 원하거나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한 이에 대한 불안감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매사에 너무 많은 질서를 부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질서를 부여했다면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잃었을 것이다. 신비한 것들은 그 신비한 것들에 대해 세밀하게, 조직적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신비로워진다는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카드에 분류하여 옮겨 놓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사람들은 갑자기 다 살았다는 생각과 실제로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섰다는 생각이 앞설 것이다. (81)

온몸을 토해내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모자랐다. 남아 있던 공허한 감정도 모두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 했다. 구토는 결사적으로 위로 치밀어 올라와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밑에 있는 정원의 어두운 구멍을 보았다. 빙빙 돌던 회전 운동은 이제 수그러들었으나 그는 사력을 다해 창틀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생명 전체가 밖으로 나갈 태세였다. 수년 동안 다리와 뇌에 잠복해 있던 신비스러운 실체들이 갑자기 울부짖으면서 육체에서 해방되려 했다. 기억과 굴욕만 가득 들어찬 엄청난 잡동사니들,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저 정원의 어두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도록 없어져야만 했다. 모든 것이 쉬어 부패한 독성 덩어리처럼 집 밖으로 자신과 함께 영원히 분해되어 없어지는 곳으로 내다 버려져야 했다. 인니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은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130)

그의 삶은 여자들을 축으로 하여 돌아갈 것이다. 그는 잠시 스쳐 가는 사람들, 여자 친구들, 창녀들, 낯선 여인들 속에서 삶을 다시 찾을 것이다. 여자는 세계의 지배자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를 ‘소유‘했다던가 ‘정복‘했다던가 하는 느낌은 결코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즉 그가 여자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어떤 어리석은 전문 용어를 고안해 낸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세계가 하나의 수수께끼라면 여자는 수수께끼를 작동시키는 동력이다. 그들, 오직 여자만이 이 수수께끼의 출입이 허용된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여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남자와의 우정은 아주 멀리 갈 수 있지만 거기에는 사물의 이성적 측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남녀 간의 우정에는 여자가 갖고 있는 특별한 무엇이 존재한다. 여자는 말보다 더 정직하고 솔직하다. 여자는 매개체이다. 여자는 인니에게 스스로 여자라고 느끼게 해주었고, 인니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신체적으로 여자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여자와 함께 있으면 남자인 자신의 몸에서 묘한 양성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새의 모습을 한 인간이 있는 것처럼 그는 여성화된 남자였다. 그는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만 동기는 달랐다. 그는 그가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었다. 섹스는 절대로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섹스는 다만 황홀케 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여자들, 모든 여자는 신비의 빛 안으로, 신비의 빛 근처로 가기 위한 수단이다. 여자는 신비의 지배자이고 남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나중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문제지만, 남자를 통해서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배우며, 여자를 통해서 세계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139-140)

인니는 비록 현재의 삶이 무의미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에는 공허, 고독, 불안과 같은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메워 주는 보상 또한 있게 마련이다. (156)

그녀는 인니 앞에 마주보고 똑바로 섰다. 그녀의 키는 그와 거의 같았다. 그는 그녀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서로 진지해졌다. 그러나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진지함이었다. 하부 구조가 없는 진지함. 그녀는 아직까지 고생이 뭔지 모르고 산 것 같았다. 그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인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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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해가 지나고 또 여러 편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접한 후에야 라비는 몇몇 다른 결론에 도달하고, 한때 그가 낭만이라 보았던 것─무언의 직관, 순간적인 갈망, 영혼의 짝에 대한 믿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배워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을 유발했던 신비한 열정으로부터 눈을 돌릴 때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유효한 관계를 위해서는 그 관계에 처음 빠져들게 한 감정들을 포기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제 그는 사랑은 열정이라기보다 기술이라는 사실을 배워야만 할 것이다. (16)

그 순간 냉소주의자는 단지 특별히 높은 기준을 가진 이상주의자일 뿐이란 금언이 떠오른다. (22)

그러나 당연히, 그는 아직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그와 커스틴은 결혼을 하고, 난관을 겪고, 돈 때문에 자주 걱정하고, 딸과 아들을 차례로 낳고, 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권태로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고, 몇 번은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 러브스토리다.

그들은 진중한 사람들이다. 커스틴은 현재 ‘지자체 사업의 조달 방법‘이란 제목의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고 있고 다음 달에 던디에 가 그곳 공무원들 앞에서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라비는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공간 구축‘에 관한 논문을 썼다. 그럼에도 별것 아닌 일들이 두 사람 사이에 계속해서 놀랍도록 자주 끼어든다. 예를 들어, 잠잘 때 가장 적합한 온도는 몇 도인가?
(…) 다른 쟁점을 살펴보면, 평일 저녁 밖에서 식사(특별한 약숙)를 하려면 몇 시에 집을 나서야 할까? (73-74)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 비결이다.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 말이다. 잘 들어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 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04)

운다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강인함, 결국 눈물을 멈출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그녀에겐 작은 슬픔이라도 느끼는 것 자체가 사치다. 그녀는 다 부서지고 나면 다시 조각들을 어떻게 짜 맞추어야 할지 영영 모를 수도 있다는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럴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일곱 살의 어린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상처를 마비시킨다. (112)

그렇게 해서 세상은 에스터의 유년기 동안 일종의 안정성을 획득한다. 나중에 그녀는 그 안정성을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고 느낄 테지만, 사실 부모의 확고하고 현명한 편집 덕분이었을 뿐이다. 세상의 견고함과 지속성이란 것은 인생이 얼마나 제멋대로이고 변화와 파괴가 얼마나 상시적인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믿을 수 있는 환상이다.
(…) 에스터에게 그 카펫은 맨 처음 기기 시작할 때 느꼈던 태고의 감각으로 남을 것이다. 그녀는 그 독특한 냄새와 감촉을 평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그 카펫을 결코 가정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확고부동한 토템으로 미리 예정하지 않았다. 사실은 에스터가 태어나기 몇 주 전에 중심가 버스 정류장 옆에 있는 신뢰가 안 가고 얼마 안 가 문을 닫은 지역 판매점에서 다소 급하게 주문한 물건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에 안심되는 면면들 중 일부는 모든 것의 허약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한다. (154-155)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란 쉽지 않은 선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랑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높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 날을 위해서다. (155)

그가 침대 발치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가수는 옥타브를 끌어올리며 언제나라는 단어를 되풀이하는데 그의 영혼 속으로 곧장 들어오는 외침을 듣는 듯하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그런 음악을 멀리했다. 삶의 제약들이 결연함과 무덤덤함을 요구할 때 황홀에 도취하는 건 전혀 도움이 안 된다. (205)

이 순간 그는 자기 연민, 그에게 일어난 일이 드물거나 부당하다는 그 얄팍한 믿음을 벗어났다. 자신이 순수하고 유일무이하다는 믿음도 어느새 잃어버렸다. 이건 중년의 위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마침내 30여 년이나 늦게 사춘기를 벗어난 것이다.
(…) 그래, 실패란 이런 것이다. 주요 특징이라면 침묵이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고, 불러내는 사람도 없고, 새로운 일도 전혀 없다. 그는 성인이 된 이후 줄곧 실패를 엄청난 재난 같은 모습으로 상상해왔으나,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실패는 사실 겁먹은 무위를 통해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찾아왔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모든 것, 심지어 굴욕에도 익숙해진다. 정말 견디기 힘든 것도 시간이 지나면 그리 나쁘지 않게 보이는 습성이 있다.
그는 이미 특별한 이득도 이렇다 할 결과도 내지 못한 채 삶의 은혜를 너무 많이 써버렸다. 세상에 온 지 수십 년이 흘렀거남ㄴ 단 한 번도 땅을 일구거나 배고픈 채 잠들지 않았으며 잘못 자란 아이처럼 자신의 특전을 대부분 손도 대지 않고 방치했다. (265-266)

자연은 우리에게 성공을 향한 집요한 꿈을 심어놓았다. 인류에게 그런 분발심이 내장된 데에는 분명 진화상의 이점이 있다. 부지런함은 우리에게 도시, 도서관, 우주선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 충동 때문에 개인의 평정은 충분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서 천재의 몇몇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범인들이 매일 불안과 강박에 시달리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과거에 라비는 어떤 것이든 흠 없이 완벽해야만 소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차가 긁히면 운전이 즐겁지 않았다. 방이 지저분하면 쉴 수 없었다. 연인이 그의 어떤 면을 이해하지 못하면 관계 전체가 가식이 되었다. 이젠 ‘충분히 좋은‘ 게 충분히 좋다. (267)

정착을 하기 전에 몇 명의 애인을 사귀어보는 것도 이 깨달음을 깊이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 ‘제 짝‘을 만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은 없으며, 가까이서 보면 사실은 모든 사람이 조금씩 잘못되었다는 진실을 직접 그리고 다양한 상황에서 발견할 기회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279-280)

라비와 커스틴이 결혼할 준비가 된 것은 그들이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가슴 깊이 인식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 결혼관은 ‘알맞은‘ 사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허다한 관심사와 가치관에 공감하는 사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된다. 장기적으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너무 다양하고 특이하다. 영구적인 조화는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파트너는 우연히 기적처럼 모든 취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혜롭고 흔쾌하게 취향의 차이를 놓고 협의할 수 있는 사람이다.
‘알맞은‘ 사람의 진정한 표지는 완벽한 상보성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차이를 수용하는 능력이다. 조화성은 사랑의 성과물이지 전제 조건이 아니다. (283-284)

완벽한 행복은 아마 한 번에 5분이 채 넘지 않을, 작고 점진적인 단위들로만 찾아온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이 순간은 두 손으로 붙잡아 소중히 간직해야 할 행복이다.
싸움과 갈등은 금세 다시 고개를 들 것이다. 한 아이는 기분이 나빠지고, 커스틴은 그가 부주의하게 저지른 일에 성마르게 한마디 내뱉고, 그는 직장에서 직면할 힘든 문제들을 떠올리고는 두렵고 지루하고 망친 것 같고 피곤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이 사진의 최종 운명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미래에 이 사진이 어떻게 읽힐지, 보는 사람이 그들의 눈에서 무엇을 찾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사진은 몇 시간 뒤 집으로 가는 길에 사고가 나기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일까? 또는 커스틴의 외도가 밝혀져 그녀가 집을 나가기 한 달 전에, 또는 에스텉의 증상이 시작되기 한 해 전에? 또는 이 사진이 거실의 선반에 수십 년 동안 꼼짝하지 않고 먼지 낀 액자에 담겨 있으면서, 부모에게 약혼녀를 인사시키기 위해 돌아온 윌리엄이 무심코 집어 들기를 기다리게 될까? (291-292)

불확실성을 의식하는 만큼 라비는 더욱 열렬히 이 햇살을 붙잡아두고 싶다. 비록 잠깐 동안이지만 모든 것이 명료하다. 그는 커스틴을 사랑하고, 그 자신을 충분히 신뢰하고,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고 인내하는 법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절망스러울 정도로 허약하다. 그는 자신을 행복한 사람이라 부를 권리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단지 잠깐 동안 만족을 누리고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 (293)

그는 이제 거의 어떤 것도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처럼 완전히 평범한 인생을 사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모든 것을 유지하고, 거의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계속 확보하고, 가족을 경제적으로 부양하고, 결혼 생활을 지속하면서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 이 계획들이 어느 영웅담 못지 않게 영웅적인 면모를 보일 기회를 제공한다. (…) 그의 제한된 영역 안에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불안에 굴복하지 않을 용기, 좌절하여 남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용기, 세상이 부주의하게 입힌 상처를 감지하더라도 너무 분노하지 않을 용기, 미치지 않고 어떻게든 적당히 인내하며 결혼 생활의 어려움들을 극복할 용기, 이것은 진정한 용기이고, 그 무엇보다 더욱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이 늦은 오후 여름 햇살 아래 스코틀랜드의 산비탈에서 경험한 짧은 순간─그리고 그 이후에도 때때로─라비 칸은 커스틴이 곁에 있으면 인생이 무엇을 요구하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겠다고 느낀다. (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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