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0
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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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일이 지나갔다. 지타는 그 이탈리아인을 만나 잠을 잤고, 그는 그녀의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사진을 찍을 때마다 인니는 조금씩 암스테르담 공기 속에서 조금씩 망가져 분해되었다. 새로운 사랑은 옛 사랑을 불태워 버리는 화장터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날 코닝 광장을 걸어갈 때 한 줌의 재가 인니의 눈 속으로 들어갔다. 지타가 입으로 그 재를 핥아 내지 않았더라면 빼낼 수 없을 게 뻔했다. 지타는 그의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9-30)

인니는 세 가지 일을 확신했다. 지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 자기는 죽지 않았다는 것, 내일이면 주식 거래가 팽이처럼 잘 돌아갈 것이라는 것. (36)

이 스키 챔피언은 철학으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신문과 잡지에 정기적으로 사진이 실리는 이 사팔뜨기 학자에게 그는 무엇을 원하는 것인가? 생각, 생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책을 많이 읽었다. 책을 많이 읽은 것뿐만 아니었다. 그가 본 것들, 영화, 그림은 그의 감정 속에서 변형되곤 했다. 즉시 단어로 표현될 수 없는 감정, 감각, 인상, 관찰에서 우러나오는 수많은 무형의 것, 그것이 그의 사유 방식이었다. 사람들은 그 무형의 것을 단어로 감쌌지만 표현되지 않는 것이 언제나 더 많았다. 훗날 정확한 답을 원하거나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들과 관계하는 한 이에 대한 불안감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모든 것에 내재되어 있는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재미있었다. 사람들은 매사에 너무 많은 질서를 부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질서를 부여했다면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잃었을 것이다. 신비한 것들은 그 신비한 것들에 대해 세밀하게, 조직적으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 신비로워진다는 것을 그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그는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정을 카드에 분류하여 옮겨 놓기 위해서는 성인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사람들은 갑자기 다 살았다는 생각과 실제로 죽음에 한 발짝 다가섰다는 생각이 앞설 것이다. (81)

온몸을 토해내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모자랐다. 남아 있던 공허한 감정도 모두 밖으로 튀어 나가고 싶어 했다. 구토는 결사적으로 위로 치밀어 올라와 목덜미를 잡아 당겼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밑에 있는 정원의 어두운 구멍을 보았다. 빙빙 돌던 회전 운동은 이제 수그러들었으나 그는 사력을 다해 창틀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생명 전체가 밖으로 나갈 태세였다. 수년 동안 다리와 뇌에 잠복해 있던 신비스러운 실체들이 갑자기 울부짖으면서 육체에서 해방되려 했다. 기억과 굴욕만 가득 들어찬 엄청난 잡동사니들, 참을 수 없는 외로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저 정원의 어두운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도록 없어져야만 했다. 모든 것이 쉬어 부패한 독성 덩어리처럼 집 밖으로 자신과 함께 영원히 분해되어 없어지는 곳으로 내다 버려져야 했다. 인니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생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생각은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130)

그의 삶은 여자들을 축으로 하여 돌아갈 것이다. 그는 잠시 스쳐 가는 사람들, 여자 친구들, 창녀들, 낯선 여인들 속에서 삶을 다시 찾을 것이다. 여자는 세계의 지배자였다.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그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는 누군가를 ‘소유‘했다던가 ‘정복‘했다던가 하는 느낌은 결코 느끼지 않을 것이다. 또는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즉 그가 여자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한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어떤 어리석은 전문 용어를 고안해 낸다든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세계가 하나의 수수께끼라면 여자는 수수께끼를 작동시키는 동력이다. 그들, 오직 여자만이 이 수수께끼의 출입이 허용된다.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다면 그건 여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남자와의 우정은 아주 멀리 갈 수 있지만 거기에는 사물의 이성적 측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남녀 간의 우정에는 여자가 갖고 있는 특별한 무엇이 존재한다. 여자는 말보다 더 정직하고 솔직하다. 여자는 매개체이다. 여자는 인니에게 스스로 여자라고 느끼게 해주었고, 인니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가 신체적으로 여자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여자와 함께 있으면 남자인 자신의 몸에서 묘한 양성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새의 모습을 한 인간이 있는 것처럼 그는 여성화된 남자였다. 그는 남자들이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못마땅했다. 그도 똑같은 행동을 하지만 동기는 달랐다. 그는 그가 무엇을 찾는지 알고 있었다. 섹스는 절대로 문제의 핵심이 아니었다. 섹스는 다만 황홀케 하는 매개체일 뿐이다. 여자들, 모든 여자는 신비의 빛 안으로, 신비의 빛 근처로 가기 위한 수단이다. 여자는 신비의 지배자이고 남자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가 나중에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문제지만, 남자를 통해서 세계가 어떻다는 것을 배우며, 여자를 통해서 세계가 무엇인지를 배운다. (139-140)

인니는 비록 현재의 삶이 무의미할지라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에는 공허, 고독, 불안과 같은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메워 주는 보상 또한 있게 마련이다. (156)

그녀는 인니 앞에 마주보고 똑바로 섰다. 그녀의 키는 그와 거의 같았다. 그는 그녀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들은 서로 진지해졌다. 그러나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진지함이었다. 하부 구조가 없는 진지함. 그녀는 아직까지 고생이 뭔지 모르고 산 것 같았다. 그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인니는 사람들이 고생을 하려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어 왔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대부분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는다. (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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