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곽을 그릴 수 없는 사랑이란 정념의 정가운데에서 생생하게, 낱낱이 그린 짙은 사랑의 면면들. 누군가로 인해 뜨거운 열병을 앓았던 경험을 거의 잊고 지냈는데, 그때 겪었던 뒤섞인 감정덩어리들이 나와 내 일상을 어떻게 바꾸었었는지 또렷이 기억나게 해주었다. 얇지만, ‘단순한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정직하게,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그녀의 글은 특정 또는 불특정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정념을 포착 또는 해소하기 위해 쓰였다. 그녀 또한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보고 깊이 진단해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래서 어떤 작위적인 문체도, 정교하게 조작된 감정도 없다. 그렇기에 어떤 우회로 없이 직진하듯 마음 가까이 달려온다. 그녀의 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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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무라에게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 워도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써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64)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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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인상, 서정들만이 흩날린다.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기쁘면서도 슬픈,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뭐 그런 느낌들만이 나부낀다. 그것이 풍요로워 몽환적이고도 알 수 없는 애상적인 심상을 뿌옇게 띄워내지만, 그것뿐이다. 수직보다는 수평으로 얇게 넓은 말들. 한국 소설이었다면 그 정서에 좀 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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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도망, 재즈, 사랑이란 소재가 뒤섞인 스토리 자체는 촌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사건들에서 무뇨스 몰리나가 길어올린 어떤 사유 조각들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이미 과거에 예견된 미래라는 테마가 인물들의 말, 행동, 외모의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과 표정, 그들이 읊조리는 말, 스치는 사물들은 단순히 인물과 현재를 묘사하기 위한 소재가 아닌, 그들을 관통하는 삶, 그리고 미래와 연결된다. 상투적인 어구들의 나열이 아니어서 페이지를 넘기는데 종종 제동이 걸리곤 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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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자신도 모르게 어떤 운명에 맞춰 살아온 사람만의 변하지 않는 특질이 그에게서 느껴졌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30년이 지나 사람들이 추하게 변해 갈 때도 그들은 마음속 분노와 함께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이상한 젊음, 고요하면서도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 같은 용기를 여전히 지니는 것이다. 그날 밤 비랄보에게서 발견한 가장 뚜렷한 변화는 바로 눈빛이었는데, 초연한 듯하면서도 모순으로 가득한 흔들림 없는 눈빛은 지식으로 무장한 청년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 마주대하기에 너무나 벅찬 시선이었다. (12)

깃을 세우고 단추를 푼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서 기다란 몸을 흔들거리며 되돌아오는 그를 보자, 권총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처럼 늘 무슨 과거를 지고 다니는 사람들의 강력한 낌새를 이해하게 되었다. 비랄보에겐 실제로 과거가 있었고 그는 권총을 품에 넣고 다녔다. (20)

산티아고 비랄보는 그 불완전한 망각의 고통에 면역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산세바스티안을 떠올리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행동과 동시에 전기가 시작되는, 과거가 없는 오만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56)

한 사람의 얼굴은 항상 언젠가는 이루어지는 예언이다. (98)

어쩌면 그녀를 움직인 것은 애정이 아니라 서로가 혼자라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2년이 지나 리스본에서 어느 겨울날 밤부터 해뜨기 전까지 비랄보는 그것이야말로 두 사람을 연결하는 유일한 것임을 깨달을 터였다. 그 감정은 욕구도 추억도 아닌 바로 버림받았다는 느낌, 혼자 있다는 확신, 실패한 사랑을 용서받을 수조차 없다는 확신이었다. (102)

"그녀를 알았을 때, 이미 오랜 시간 동안 피아노를 쳐 왔잖아. 플로로가 항상 그랬어. 자네가 음악가라는 것을 알게 한 사람은 바로 빌리 스완이었다고."
호텔 침대에 기대어 있던 비랄보는 추웠는지 어깨를 움츠렸다.
"빌리 스완이든 루크레시아든 상관없어. 그땐 누군가가 내 생각을 해야만 내가 존재했지." (108)

한번은 비랄보가 진을 서너 잔 마시고 나서 기분 좋게 취해 내게 말했다.
"이름들은 음악처럼 그것들이 암시하는 존재와 장소들을 시간에서 분리하고, 소리에서 나오는 신비로움이라는 무기는 그것들이 현재가 되도록 만들어." (113)

웃음은 항상 그들을 구해 주었다.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 자학적인 우아함, 그것은 각자가 쓰고서 서로 이해해 주는 가면이었다. 절망에 대한 가면이자 두 배의 두려움에 대한 가면이었다. 그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저마다 한없이 혼자이고 버림받고 방황했다. (114)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인 양 서로를 바라보았고 옛날의 열정적이고 부패한 사랑을, 그 감정을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이 그들을 성숙시켰다는 것과 그들의 충실함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엇다. 냉혹하게도 비랄보는 그중 그 어느 것도 그를 구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에 대한 간절한 탐색전이 외로움의 냉혹한 징표를 없애지는 못했다. 없애기는커녕 그 사실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서글픈 진리인 양. (115)

어쩌면 사랑보다 더 큰 힘, 애정이 아니라 욕망이나 고독 같은 힘이 그의 의지와 이성에 반하여, 모든 희망에 반하여, 계속해서 그를 루크레시아에게 연결시키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나는 이해했다. (128)

그녀의 입술 양 끝의 움직임, 시간이 루크레시아의 눈빛 안에 정화시킨 조용한 용서와 체념의 표정을 그는 알았다. 하지만 이젠 몇 년 전과 같이 잠시 지나가는 체념의 징조가 아니라 그녀의 영혼에 완전히 자리 잡은 습관이었다. (150)

빌리 스완의 주장들 중 하나는 고상한 사람들은 모두 태어난 나라를 싫증내어 신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그곳에서 영원히 도망친다는 것이었다. (183)

비랄보는 책을 무릎에 펼친 채 루크레시아가 말하는 내내 그 그림을 보았다. 그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밤, 도주, 죽음에 대한 공포, 루크레시아를 찾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등 모든 것이 사라졌다. 가끔 사랑이 그랬고 거의 항상 음악이 그랬던 것처럼, 그 그림은 이상하고도 고집스러운 정의의 윤리적 가능성을 이해하게 해 주었다. 그것은 우연이 형태를 갖추고, 세상이 다시 살 만해지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비밀스러운 질서의 가능성이었다. 성스럽게 꽉 닫혀 있으면서도 일상적이고 주위에 녹아 있는 그 무엇이었다. 빌리 스완이 침묵 속으로 음이 사라질 만큼 나지막하게 트럼펫을 연주할 때의 음악 같고, 리스본의 오후 황혼에 비친 황토색, 분홍색, 회색 빛깔 같았다. 음악이나 색채의 함의를 이해한다든지 빛의 고정된 신비로움을 밝힌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느낌이었다. 수년 전에 이미 그 느낌을 알았으나 그동안 잊고 있었다.

그때 알았던 것처럼 지금 그것들을 되새기고 회복했다. 좀 더 지혜로워지고 조금은 열기가 식은 그는 자연스럽게 루크레시아와, 그녀의 한결같이 침착한 목소리와, 입술을 열지 않고 짓는 미소에 연관되어 있는 것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잃어버린 조국의 공기 냄새처럼 되살아나는 과거의 향수에 연결되어 있었다.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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