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책을 좋아한다. 책을 다루는 책은 많지만 읽을 만한 걸 찾기는 어렵다. 책에 관한 (좋은) 책을 쓰려면 우선 책을, 특히 양서를 많이 읽은 사람이어야 하고, 책에 대해 편협하지 않으면서도 확고한 안목을 갖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목은 개인적인 것임에도 많은 이들을 끄덕이게 하는 설득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책을 읽어야 책에 대해 노련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는 중년 이상이어야 하고 책 읽는 것이 업에 가까운 작가이거나 학자인 사람이 그나마 (내가 원하는) 책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헤세는 내가 원했던 저자였던 것 같다. 그는 어려운 이야기들을 쉽게 한다. 책을 소재로 다루고 있긴 하지만 한 유파에 경도되지 않는 태도, 개인의 내면을 만물의 근본으로 바라보는 시선, 청춘에 대한 관대하면서도 날카로운 포착 등 (책을 많이 읽은) 한 현자의 에세이를 편안히 읽는 기분이었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허세도, 다른 작가나 작품을 재판하겠다는 오만도 느껴지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작가 이전에 헤세라는 인간에 대한 호의와 믿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가 말하는 독서의 의미, 책의 매력, 문학과 사조, 트렌드에 대한 성찰, 나아가 틈틈히 내비치는 삶에 관한 통찰이 나의 것과 맞닿을 때, 마치 헤세가 내 삶을 보듬는 느낌이었다.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는 한 독자로서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깊으면서도 포근한 에세이였다. 헤세의 매력을 뒤늦게 깨닫는다. (22.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신 독자는 작품에 대해 그리고 작가의 전문성에 대해 경의를 품어야 하며, 소재와 무관하게 작업의 질에 따라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그럴 용의가 있을 뿐더러, 요즘 들어서는 심지어 그 어떤 이념이나 정서적 내용보다도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기술적인 작업에 점점 더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왜냐하면 수십 년간 글쟁이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념이나 감정은 적당히 꾸미거나 따라하기 쉽지만 기술적인 작업의 수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5, 소설 한 권을 읽다가) - P45

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다. 인류를 존중한다면서 자기가 부리는 하인은 괴롭히는 것, 조국이나 교회나 당은 신성하게 받들면서 그날그날 자기 할 일은 엉터리로 대충 해치우는 데서 모든 타락이 시작된다. 이를 막는 교육적 방책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신념이나 세계관이나 애국심 같은 이른바 거창하고 신성한 모든 것은 일단 제쳐두고, 대신 사소한 일, 당장에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전거나 난로가 고장 나서 기술자에게 수리를 맡길 때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류애도 애국심도 아닌 확실한 일 처리일 것이요, 오로지 그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정신의 영역이라고 해서 달라질 이유가 무엇인가? 어째서 예술작품이라고 불리는 작업만큼은 정확하지 않아도, 양심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가? 신념이 근사하면 ‘사소한‘ 기술적 실수 정도는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이 창대는 오히려 거꾸로 들이댈 일이다. 그러잖아도 사실 거창한 신념과 태도나 강령들이란 서슬이 퍼래도 막상 찬찬히 뜯어보면 종이호랑이에 불과해서 아연실색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50-51, 소설 한 권을 읽다가) - P50

한마디로 2류, 3류 직업비평가는 어중간한 공장노동자가 생산에 임할 때와 비슷하게 애정도 책임감도 없이 일을 해낸다. 젊었을 적에 배운, 당시 한창 유행하던 이런저런 비평 기법에 따라 무조건 점잖은 회의로 냉소하든지 혹은 최상급으로 칭송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식으로든 본래의 과제를 비껴갈 방법이 있다. 또는 (이것이 가장 흔한 경우인데) 문학적 성과에 대한 비평에는 일절 손대지 않고 대신 작가의 출신, 사상, 경향 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작가가 적의 진영에 속해 있으면 정면도전의 방식으로건 야유의 방식으로건 결국 거부한다. 자기 진영이면 칭찬을 하거나 적어도 보호한다.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작가라면, 배후세력이 전혀 없으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다. (89-90, 문학과 비평이라는 주제에 대한 메모) - P89

이제 우리의 과제인 조촐하나마 훌륭한 세계문고를 갖추는 일을 본격화하려고 한다. 제일 먼저 확인하게 되는 모든 정신사의 원칙이 하나 있는데 가장 오래된 작품들이 가장 오래간다는 것이다. 오늘 유행하며 주목을 끄는 것이 내일이면 배척받을 수 있고, 오늘은 참신하고 흥미롭다가도 내일모레면 시들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백 년 세월을 버티면서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아마 우리 평생 큰 변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정신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증언들, 즉 종교와 신화의 책들로 시작해보자.
성경과 더불어 우리의 총서 첫머리를 고대 인도의 지혜로시작하고자 한다. 즉 우파니샤드를 간추린 형식으로서 ‘베다의 결론‘이라 일컫는 《베단타》vedanta이다. 불경도 있어야겠고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 《길가메시》Gilgamesch, 즉 죽음과 더불어 싸운 이 위대한 영웅의 서사시도 빼놓을 수 없다. 고대 중국에서는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장자의 기막힌 우화들을 골라보자.
이로써 우리는 인류가 보유한 문헌의 기본화음은 갖춘 셈이다. 즉 구약성경과 공자 등에서 명시적으로 거론된 규범과 법칙을 향한 추구, 신약성경과 인도사상에서 선포된 현세의 불만족스러운 삶으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갈망, 불안하고 복잡한 이 현상계 저편의 영원한 조화에 대한 비밀의 지식, 신의 형상을 입은 자연과 영혼의 힘에 대한 경외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신은 표상에 불과하며 강함과 약함과 삶의 환희와 고통은 모두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 혹은 추측이 그것이다. 또 추상적인 사상의 그 모든 사변들, 문학의 온갖 이야기들, 우리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모든 고뇌와 위로와 해학이 이 몇 권의 책 속에 이미 전부 표현되어 있다. 중국 고시 선집도 그런 책에 든다.(151-152, 세계문학 도서관) - P151

길가의 돌멩이 하나가 괴테나 톨스토이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 단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머물러 보라. 그러고 나면 그대는 괴테와 톨스토이와 다른 모든 시인들에게서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무궁무진한 가치를, 풍성한 젖과 꿀을, 자신과 인생에 대한 더 큰 긍정을 이끌어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괴테의 작품은 괴테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며, 그것들은 다만 이 다성다의의 세계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담아보고자 했던 그들 나름의 시도, 그러나 단 한 번도 온전히 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미망의 시도들이기때문이다. (233, 독서에 대하여 2) - P233

이 시대의 다른 ‘더 나은‘ 작가들이 상상의 날개를 접은 게 어찌 그의 잘못이겠는가? 누군가 신통찮은 재능을 가지고서 성취한 일을, 더 고급한 수단을 구비하고도 이루지 못했다면 못 한 쪽이 잘못이다. (271,환상 문학)

창작과 사고가 거의 매한가지라는 생각, 문학의 과제란 세계관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의견은 심각한 오류다. 작가에게 추상적인 사고는 상당한 위험 요소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예술 창작을 부정하고 멸절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질 수 없다거나 사상적으로 철저히 이상주의적인 철학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추상적 인식이 그의 핵심이 되는 순간 그는 예술가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진정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학작품들이란 사유에의 체념이 창작가로 하여금 냉정하고 정제된 삶의 관찰로 이끌 때, 그리하여 작가가 가치판단이나 철학적 근본 질문을 포기한 채 맑은 관조에 이르렀을 때 나오지 않았던가? (287, 특이 소설) - P287

어쨌거나 하나의 명칭에 대한 이렇듯 열렬한 충정은 청춘의 징표다. 그리고 청춘에게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한은, 젊음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법이다. 명칭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역사적 구조에 대한 폭풍 같은 항거는 청년다운 것이다. 예의니 무례니를 떠나, 그것은 청춘(굳이 나이를 따질 필요는 없으리라)의 본능이요 권리다. (296, 문학에서의 표현주의에 대하여) - P296

이 몰락해가는 세계 한가운데에도 귀하고 좋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 죽어가고 있고 또 이미 사망한 구세대 노인네들이 죄다 시시한 쭉정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 완전히 소시민적인 인상주의 시대에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시간을 초월한 불길이 활활 지펴졌다는 사실, 이를 알아보고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은 청년들의 관심사가 아니리라. 아마도 그것은 그 시대와 예술을 함께 겪어낸 이들이 자기 변호의 차원에서 담당해야 할 일이리라. 젊은이들보다 한층 더 자유롭고 가뿐하고 노련하게, 특유의 포용력으로 더 관대하게 행할 줄 아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젊은이들을 건방지다고 타박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러는 어른들 역시 늘 젊은이의 몸짓과 방식을 따라 하고, 똑같이 열광하며, 똑같이 공정하지 못하며, 똑같이 독선적이고 또 쉽게 상처받는다. 노자가 부처보다, 파랑이 빨강보다 못하지 않듯, 노인이 청춘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노인네가 청춘인 척하려 들면 우스워질 뿐이다. (300-301, 문학에서의 표현주의에 대하여) - P3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그래서 돈키호테가 누군데요
‘돈키호테’가 하나의 전형적 캐릭터를 나타내기 위한 대명사로 여기저기 쓰이는 걸 오랫동안 봐 왔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 또는 누군가를 ‘돈키호테’라 칭할 때마다 대체 무슨 의미인 건지 궁금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얕은 의미에서 더 나아가 기원이 된 소설 돈키호테에서 그린 그 인물의 입체적 모습도 궁금했고.

돈키호테에 대한 아무런 상식이 없는 내가 생각했던 ‘돈키호테’의 캐릭터는 용맹한 모험 기사,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피끓는 청년 같은 이미지였다. 그런데 그는 예상밖의 인물이었다. 400년 전이었다면 노년기였을 50대의 말라깽이 남성에, 당시 오락물로 유행했던 기사 소설에 미친 사람. 기사 소설에 파묻혀 지내다 미친 나머지 결국 소설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웃긴 몰골로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기사로서의 모험 아닌 모험을 떠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상의 공간과 사물, 인간들에게 기사 소설의 겹을 씌워 괴상한 의미를 부여하고 웃음거리가 될 만한 소리를 일삼는 사람이었다. ‘돈키호테’가 근대인의 탄생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하던데, 국가와 종교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을 그로부터 독립시키고 심지어 그 위에 군림하듯 행동할 정도로 ‘미친’ 인물이어서 그런 걸까? 돈키호테는 기사 소설에 미쳐버렸다는 설정 덕분에 기존 관습을 뒤엎는 소리를 길게 뱉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왕의 명령을 따라 죄수를 이송하는 군사들을 공격하여 포로들을 풀어주고, 성모 마리아상을 옮기던 사제들을 공격하여 국가에 반역하고 종교를 모독한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사랑은 또 어떻고. 다른 책이나 노래 가사에 ‘돈키호테’가 등장하면 사랑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용맹한 기사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어떤 여자와 사랑을 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기사도’ 이미지에 필요한 덕목으로서 잘 알지도 못하는 마을의 한 여자를 자의로 ‘자신이 열렬히 구애하며 목숨 걸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이유’라는 자리에 앉히고 매번 말만 읊는다. “오, 제게 전투의 힘을 부여하시며 저의 유일한 마지막 종착역인 둘네시아여” 운운. 심지어 귀족도 아닌 사랑엔 관심도 없는 거친 여자를 귀족이라 이름 붙이고서 말이다.

과연 ‘돈키호테’를 대명사로 쉽게 쓰는 사람들 중 실제로 돈키호테를 완독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돈키호테라는 소설에서 그린 인물과 오늘날 사람들이 공유하며 발화하는 돈키호테의 사회적 의미는 구분하여 파악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2. 부화뇌동을 하지 않은 자만이 살아남는다
기본적으로 재미있다. 당시 오락 소설로 소비되었던 듯한 기사 소설이 자기 복제 수준으로 넘쳐 나던 시절에 이를 패러디하듯 변형한 형식이어서 유머러스하고, 스토리의 전개가 빠르고 다양한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등장해 마치 긴 연재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정도의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이 때문이 아닐 것이다. 결국 몇 백 년 동안 살아남는 건 그 시대의 시류 속에 푹 절어 있던 수백 개의 유사한 버전들이 아니라, 그 시류를 파악하고 그 흐름을 갖고 놀 줄 아는 자의 것이었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구분점을 만들어낸 자의 작품, 그것만이 긴 시간을 통과할 줄 안다는 생각을 책 읽는 내내 했다. (2022. 7. 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의 명예와 아름다움과 정조와 정숙함의 광맥은 그것이 가지고 있으며 네가 원하는 모든 부를 아무런 수고 없이 너에게 주고 있는데, 너는 뭣 때문에 땅을 더 깊게 파서 새로운 광맥을 찾고 어느 누구도 본 적 없는 보석을 찾으려 하는 건가? 광맥이 모두 무너져 내릴지도 모르는 위험에 네 몸을 맡기면서 말이다. 결국 광맥은 나약한 본능의 아슬아슬한 발판으로 지탱되고 있으니, 불가능한 것을 구하는 자는 가능한 것으로부터 거부당하는것이 이치이다. 어느 시인이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지.

나는 죽음에서 삶을,
병에서 건강을,
감옥에서 자유를,
갇힘에서 출구를,
배반자에게서 충성을 찾노라.
그러나 한 번도 좋은 일을
기대해 보지 못한 내 운은
하늘과 합의를 보았으니,
내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기에
가능한 것도 내게 주지 않기로 말이다. (525-526, <당치 않은 호기심을 가진 자에 대한 이야기>가 다뤄지다) - P525

그런데도 그 이상은 쓰지 않았습니다. 내 직업과 동떨어진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신중한 사람들보다 단순 무식한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러한 책을 읽게 될 대다수의 교만한 속인들의 황당한 비판에 매이고 싶지 않기도 했고 말입니다. 물론 많은 바보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몇 안 되는 현명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는 게 더 낫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무엇보다 그 글을 끝까지 써보려는 마음을 내 손에서, 더 나아가 내 생각에서 앗아간 것은, 요즘 상연되는 연극을 보고서 내가 나름대로 정리한 논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극들은 창작물이건 역사물이건,
전부 혹은 대다수가 엉터리로 발도 머리도 없는 괴물이라는 거죠. 그런데도 속인들은 즐겁게 보고 들으며 훌륭하다고 인정한단 말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작품들을 쓴 작가들과 그것을 상연하는 배우들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써야만 속인들이 좋아한다고 주장한단 말이죠. 예술이 요구하는 대로 기획되고 제대로 된 줄거리를 갖춘 작품들은 불과 너덧 명의 생각 깊은 사람들만을 이해시킬수 있을 뿐 그 밖에는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그런 예술적 장치를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아요. 소수의 의견보다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먹을 것을 얻는 편이 낫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그러니 앞서 말한예술의 법칙을 지키려고 기를 쓰며 책을 끝내봤자 그런 운명에 처해질 것이 뻔하고 결국 헛수고만 하게 되는 셈이지요. (726-727, 교단 회원이 기사 소설과 그의 지혜에 합당한 다른 문제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다) - P7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외로 찾아보기 힘든 여자의 사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자전적 소설. 사회적 구성물로서의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날카롭고 도저한 폭로전. 무엇보다 마지막 결혼 생활에 대한 대목이 아주 아찔하다. (22.7.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