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독자는 작품에 대해 그리고 작가의 전문성에 대해 경의를 품어야 하며, 소재와 무관하게 작업의 질에 따라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그럴 용의가 있을 뿐더러, 요즘 들어서는 심지어 그 어떤 이념이나 정서적 내용보다도 장인정신을 보여주는 기술적인 작업에 점점 더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왜냐하면 수십 년간 글쟁이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념이나 감정은 적당히 꾸미거나 따라하기 쉽지만 기술적인 작업의 수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45, 소설 한 권을 읽다가) - P45

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한 한 생각을 바꿀 수 없다. 큰일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사소한 일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걸 당연시하는 태도는 쇠퇴의 시작이다. 인류를 존중한다면서 자기가 부리는 하인은 괴롭히는 것, 조국이나 교회나 당은 신성하게 받들면서 그날그날 자기 할 일은 엉터리로 대충 해치우는 데서 모든 타락이 시작된다. 이를 막는 교육적 방책은 오직 하나뿐이다. 즉 스스로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해서든 신념이나 세계관이나 애국심 같은 이른바 거창하고 신성한 모든 것은 일단 제쳐두고, 대신 사소한 일, 당장에 맡은 일에 성심을 다하는 것이다. 자전거나 난로가 고장 나서 기술자에게 수리를 맡길 때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류애도 애국심도 아닌 확실한 일 처리일 것이요, 오로지 그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할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정신의 영역이라고 해서 달라질 이유가 무엇인가? 어째서 예술작품이라고 불리는 작업만큼은 정확하지 않아도, 양심적이지 않아도 괜찮다는 건가? 신념이 근사하면 ‘사소한‘ 기술적 실수 정도는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에 있는가? 이 창대는 오히려 거꾸로 들이댈 일이다. 그러잖아도 사실 거창한 신념과 태도나 강령들이란 서슬이 퍼래도 막상 찬찬히 뜯어보면 종이호랑이에 불과해서 아연실색하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50-51, 소설 한 권을 읽다가) - P50

한마디로 2류, 3류 직업비평가는 어중간한 공장노동자가 생산에 임할 때와 비슷하게 애정도 책임감도 없이 일을 해낸다. 젊었을 적에 배운, 당시 한창 유행하던 이런저런 비평 기법에 따라 무조건 점잖은 회의로 냉소하든지 혹은 최상급으로 칭송을 하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식으로든 본래의 과제를 비껴갈 방법이 있다. 또는 (이것이 가장 흔한 경우인데) 문학적 성과에 대한 비평에는 일절 손대지 않고 대신 작가의 출신, 사상, 경향 등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어떤 작가가 적의 진영에 속해 있으면 정면도전의 방식으로건 야유의 방식으로건 결국 거부한다. 자기 진영이면 칭찬을 하거나 적어도 보호한다. 어느 편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작가라면, 배후세력이 전혀 없으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간다. (89-90, 문학과 비평이라는 주제에 대한 메모) - P89

이제 우리의 과제인 조촐하나마 훌륭한 세계문고를 갖추는 일을 본격화하려고 한다. 제일 먼저 확인하게 되는 모든 정신사의 원칙이 하나 있는데 가장 오래된 작품들이 가장 오래간다는 것이다. 오늘 유행하며 주목을 끄는 것이 내일이면 배척받을 수 있고, 오늘은 참신하고 흥미롭다가도 내일모레면 시들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수백 년 세월을 버티면서 잊히거나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라면, 그에 대한 평가는 아마 우리 평생 큰 변동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인류정신의 가장 오래되고 신성한 증언들, 즉 종교와 신화의 책들로 시작해보자.
성경과 더불어 우리의 총서 첫머리를 고대 인도의 지혜로시작하고자 한다. 즉 우파니샤드를 간추린 형식으로서 ‘베다의 결론‘이라 일컫는 《베단타》vedanta이다. 불경도 있어야겠고 바빌로니아에서 유래한 《길가메시》Gilgamesch, 즉 죽음과 더불어 싸운 이 위대한 영웅의 서사시도 빼놓을 수 없다. 고대 중국에서는 공자의 《논어》, 노자의 《도덕경》 그리고 장자의 기막힌 우화들을 골라보자.
이로써 우리는 인류가 보유한 문헌의 기본화음은 갖춘 셈이다. 즉 구약성경과 공자 등에서 명시적으로 거론된 규범과 법칙을 향한 추구, 신약성경과 인도사상에서 선포된 현세의 불만족스러운 삶으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갈망, 불안하고 복잡한 이 현상계 저편의 영원한 조화에 대한 비밀의 지식, 신의 형상을 입은 자연과 영혼의 힘에 대한 경외 그리고 이와 거의 동시에 신은 표상에 불과하며 강함과 약함과 삶의 환희와 고통은 모두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는 깨달음 혹은 추측이 그것이다. 또 추상적인 사상의 그 모든 사변들, 문학의 온갖 이야기들, 우리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모든 고뇌와 위로와 해학이 이 몇 권의 책 속에 이미 전부 표현되어 있다. 중국 고시 선집도 그런 책에 든다.(151-152, 세계문학 도서관) - P151

길가의 돌멩이 하나가 괴테나 톨스토이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는 이 단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머물러 보라. 그러고 나면 그대는 괴테와 톨스토이와 다른 모든 시인들에게서 그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욱 무궁무진한 가치를, 풍성한 젖과 꿀을, 자신과 인생에 대한 더 큰 긍정을 이끌어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괴테의 작품은 괴테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은 도스토예프스키가 아니며, 그것들은 다만 이 다성다의의 세계 한가운데에서 세상을 담아보고자 했던 그들 나름의 시도, 그러나 단 한 번도 온전히 목표를 이루지 못했던 미망의 시도들이기때문이다. (233, 독서에 대하여 2) - P233

이 시대의 다른 ‘더 나은‘ 작가들이 상상의 날개를 접은 게 어찌 그의 잘못이겠는가? 누군가 신통찮은 재능을 가지고서 성취한 일을, 더 고급한 수단을 구비하고도 이루지 못했다면 못 한 쪽이 잘못이다. (271,환상 문학)

창작과 사고가 거의 매한가지라는 생각, 문학의 과제란 세계관을 기술하는 것이라는 의견은 심각한 오류다. 작가에게 추상적인 사고는 상당한 위험 요소다. 설령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예술 창작을 부정하고 멸절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가가 자기 나름의 세계관을 가질 수 없다거나 사상적으로 철저히 이상주의적인 철학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추상적 인식이 그의 핵심이 되는 순간 그는 예술가이기를 멈추는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진정으로 아름답고 감동적인 문학작품들이란 사유에의 체념이 창작가로 하여금 냉정하고 정제된 삶의 관찰로 이끌 때, 그리하여 작가가 가치판단이나 철학적 근본 질문을 포기한 채 맑은 관조에 이르렀을 때 나오지 않았던가? (287, 특이 소설) - P287

어쨌거나 하나의 명칭에 대한 이렇듯 열렬한 충정은 청춘의 징표다. 그리고 청춘에게는,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한은, 젊음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법이다. 명칭에 대한 그리고 스스로 만들어놓은 역사적 구조에 대한 폭풍 같은 항거는 청년다운 것이다. 예의니 무례니를 떠나, 그것은 청춘(굳이 나이를 따질 필요는 없으리라)의 본능이요 권리다. (296, 문학에서의 표현주의에 대하여) - P296

이 몰락해가는 세계 한가운데에도 귀하고 좋은 것이 있었다는 사실, 죽어가고 있고 또 이미 사망한 구세대 노인네들이 죄다 시시한 쭉정이였다고 할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 완전히 소시민적인 인상주의 시대에도 수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시간을 초월한 불길이 활활 지펴졌다는 사실, 이를 알아보고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은 청년들의 관심사가 아니리라. 아마도 그것은 그 시대와 예술을 함께 겪어낸 이들이 자기 변호의 차원에서 담당해야 할 일이리라. 젊은이들보다 한층 더 자유롭고 가뿐하고 노련하게, 특유의 포용력으로 더 관대하게 행할 줄 아는 나이 든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젊은이들을 건방지다고 타박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러는 어른들 역시 늘 젊은이의 몸짓과 방식을 따라 하고, 똑같이 열광하며, 똑같이 공정하지 못하며, 똑같이 독선적이고 또 쉽게 상처받는다. 노자가 부처보다, 파랑이 빨강보다 못하지 않듯, 노인이 청춘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노인네가 청춘인 척하려 들면 우스워질 뿐이다. (300-301, 문학에서의 표현주의에 대하여)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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