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원했던 것은 너무나 적었건만 그마저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줄기 햇살, 가까운 들판, 한줌의 평온과 한 쪽의 빵,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지 않기. 다른 이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른 이들로부터 아무것도 요구받지 않기.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거부당했다. 동냥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가 동정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외투 주머니 단추를 풀기 귀찮아서 그러듯이. 결국 내가 원한 것들은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19)

그래서 집을 찾아 돌아오는 사람들처럼, 나는 내 집은 아니지만 도라도 레스 거리의 널찍한 사무실로 돌아온다. 인생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는 성채라도 되는 양 내 자리에 정좌한다. 회계장부와 낡은 잉크병 받침대, 조금 떨어진 옆자리에서 송장을 작성하는 동료 세르지우의 굽은 등을 보면 눈물이 어릴 정도로 따뜻한 친밀감을 느낀다. 그들을 사랑하노라. 그들 말고는 사랑의 대상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또 원래 인간 영혼의 사랑에는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무엇인가를 사랑한다면, 별들의 광대한 무심함에 기울이는 사랑이든 내 잉크병 받침대의 한 귀퉁이에 대한 사랑이든 별 차이는 없다. (22)

나는 언제까지나 회계사무원으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났을지도 모른다. 시나 문학은 내 머리에 앉은 나비와 같아서, 그것이 아름다울수록 나를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 것이다. / 모레이라 관리장이 그리워지겠지. 하지만 영예로운 승진 앞에서 그리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바스케스 사무실의 회계관리장이 되는 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날일 테디, 나도 안다. 씁쓸하고 냉소적인 예감이지만 나의 지성을 걸고 확신한다. (32)

한 번도 이해받기를 원한 적이 없다. 이해받는 것은 몸을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사람들이 내 모습을 잘못 알고 있기를, 나를 알 수 없는 대상으로 여기며 예의바르고 혼연스럽게 대하기를 원한다. (170)

설혹 우리 주위에서, 우리인 척하던 것들이 우리와 함께 있다가 무너지더라도 의연해야 한다. 우리가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은, 남들이 우리라고 생각하는 것 위에서 세상이 무너질지라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 우월한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대결을 거부하는 꿈이어야 한다. (213)

무엇이든 가능한 존재로 퇴보하거나, 결국 소멸하고 말 존재로 성장하거나. 기로에 선 이 지독한 시간. / 아침이 결코 밝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이 작은 방과 그 안의 공기가 모두 ‘밤‘의 영혼의 일부가 되거나 ‘암흑‘ 속으로 사라져버려, 무엇이든 살아 있는 것을 내 기억으로 더럽히는 그림자 하나도 내게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241)

그러면서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들로부터 벗어나려면 이들을 제압하거나 거부해야 하는데, 현실 속에서 그들을 넘어설 수 없기에 나는 결코 제압하지도 못하고, 무엇을 꿈꾸든 결국 여기를 떠날 수 없으니 거부하지도 못하리라는 것을. (243)

어떤 사람들은 희망 없이는 삶이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희망이 있으면 공허하다고 말한다. 기대도 실망도 않게 되자 내게 인생이란 단순이 나를 포함한 한 장의 그림이 되었다. 그저 눈요기로 만들어진 줄거리 없는 공연 같은 그림 안에 있는, 서로 연결되지 않는 춤,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 햇빛에 색이 바뀌는 구름, 도시 이곳저곳의 오래된 거리 들을 구경한다. (249)

내가 인생에서 찾아다녔던 모든 것들은, 찾아다니려고 나 자신이 직접 버렸던 것이다. (280)

인생은 얼마나 천박하고 저급한지! 아무리 피하고 싶다 해도 천박함과 저급함은 이미 주어졌고, 그것은 당신의 의지나 당신의 의지에 대한 환상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295)

타르드가 말했듯이 인생이란 부질없는 것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추구하는 여정이다. 항상 불가능한 것을 찾아보자.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니까. 부질없는 길을 통해 불가능한 것을 찾자. 다른 길은 없으니까. 다만 우리가 찾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고, 우리가 가는 길에는 애정이나 그리움을 품을 대상 하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두자. / 고전에 주석을 다는 학자들은 우리가 지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이해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이해하고 계속 이해하여 이로부터 피어난 유령 같은 꽃송이들로, 역시 시들어버리고 말 화환과 화관을 솜씨 있게 만들어보자. (305)

인간의 영혼은 괴짜들이 모인 정신병원이다. 만일 영혼이, 이미 알고 있는 부끄러움과 체면보다 더 깊은 수치심을 버리고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낸다면, 영혼의 참모습은 우물, 공허한 메아리로 가득차고 혐오스러운 생명체와 생명 없는 끈적임과 흐느적거리는 민달팽이와 주관성의 분비물이 서식하는 불길한 우물일 것이다. (308-309)

이런 일들이나 이와 비슷한 재난을 충분히 예견했으면서도 정작 자신이 겪게 되자 충격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들의 말이나 글이 정직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성적인 단언의 진실성은 즉각적인 감성의 자연스러움과 아무 관련이 없다. 삶에 아픔이 부족하지 않도록, 반드시 치욕이 주어지도록, 삶에서 감당해야 할 슬픔의 몫을 꼭 치르도록, 영혼은 그런 충격을 견딜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실수를 저지륵 비통해한다는 점에서 모두 똑같은 신세다. 느끼지 않는 사람만이 고통을 피한다. 가장 고귀한 이들, 가장 지위가 높은 이들, 가장 신중한 이들은 모두 자신이 예견했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들을 겪으며 고통받는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312-313)

자기 자신을 모르는 무지와 서로를 모르는 무지. 인간의 영혼은 어둡고 끈적끈적한 심연이고, 땅의 표면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우물이다. 자기 자신을 정말 잘 알고 있다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영혼의 피인 허영심이 아니라면 우리의 영혼은 빈혈로 죽을 것이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천만다행이지, 만일 알았다면 우리의 어머니, 아내, 자식 안에서 가장 고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적을 만났을 것이다. (326-327)

우리가 사는 이 삶은 존재하지 않는 위대함과 존재할 수 없는 행복 사이를 흘러가는 오해이며, 우리는 그 사이에서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누린다. 생각하고 느낄 때조차도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능력 덕분에 우리는 만족하고 산다. 우리의 인생인 이 가면무도회에서는 잘 맞아 흡족한 예복이면 더이상 바랄 게 없는데, 무도회에서는 예복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마치 춤이 진실인 양 춤에 몰두한 우리는 빛과 색깔의 하인이다. 그리고 우리는, 춤추지 않고 홀로 떨어져 있다면 다를지몰라도, 저 바깥의 깊고 추운 밤을 알지 못하고, 우리 몸보다 오래 살아남을 의복 아래 있는 언젠가 죽을 육체도 알지 못한다. 실제로는 우리가 추측한 진실의 내밀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는데 본질적으로는 우리라고 여기는 것들을 알지 못한다. (327-328)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르고 다른 이들을 모르기에 서로 유쾌하게 어울리며 이 공연을 주관한 자들의 무심하게 깔보는 눈길 아래서 별들의 위대한 오케스트라 음악에 맞춰 빙글빙글 춤추다가, 쉬는 시간에는 인간적이고 쓸모없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눈다. / 우리가 그들이 우리를 위해 만들어놓은 환상에 갇힌 죄수들임을, 그들만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환상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이런 환상 또는 다른 환상이 있는지, 왜 그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환상에 속아 우리에게 이런 환상을 주는지, 그것은 분명 그들도 모를 것이다. (328-329)

권태……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영혼을 신뢰하지 않았기에 영혼이 느끼는, 아주 깊은 곳에 있는 불만. 우리 내면에 있는 슬픈 어린아이가 갖고 싶은 신성한 장난감을 사주지 않았다고 느끼는 절망일 것이다. 어쩌면 심오한 감각의 어두운 길에서 이끌어주는 손이 절실히 필요한 데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침묵의 밤과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텅 빈 길밖에 감지할 수 없는 자의 불안일 것이다……./ 권태…… 신을 믿는 자에게는 권태가 없다. 권태는 신화의 부재다. 믿음이 없는 이들은 의심조차 불가능하고, 그들 안에 도사린 회의주의마저 의문을 던질 힘을 잃는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권태다. 영혼이 스스로 착각하는 능력마저 잃어버리는 것. 생각이 진실을 향해 굳건히 딛고 올라설 상상 속 계단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34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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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의 [그 후]를 읽었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 속 연인들처럼, 만사에 염세적이고 무기력한 딜레탕트가 소설 속에서 느적느적 움직인다. 결말도 그가 사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파멸을 해도 파멸 같지 않은, 뜨거움 없는 미진한 파멸뿐. 무겁고 어두운 공허함 속으로 끝없이 떨어지며 열병을 앓는 모습만이 마지막에 남는다. 가부장제의 관습과 자본주의의 에토스에 저항하며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고, 육체의 나태함과 정신의 부단함만을 추구하는 심미주의자들의 소설 속 모습은 결국 한결 같구나. (1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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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앞에, 사랑 속에, 사랑 옆에 선 인간들. 베아트리스였다가, 알랭이었다가, 조제였다가, 에두아르였다가, 베르나르였다가. 상처 받은 사람에 이입하는 것은 안락한 괴로움을 주지만 상처 준 사람에 이입하는 것은 손사래치며 거부하고픈 고통을 준다. 베아트리스에게서 보기 싫은 내 얼굴을 본 듯, 읽다가 잠시 책을 덮어야 했다. 나에 대한 타인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 앞에서 나는 왜 그리 이기적이었고, 왜 여전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가. 그녀와 같은 같잖은 나르시시즘과 자존심 그리고 야망 때문인가. (17.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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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모두 고통의 외침 가운데서 태어나. 거기엔 아무런 이유도 없지. 그 다음에 이어지는 건 그 외침이 완화된 형태일 뿐이야. (135)

"일 년 후 혹은 두 달 후,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중 오직 그녀, 조제만이 시간에 대한 온전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격렬한 본능에 떠밀려 시간의 지속성을, 고독의 완전한 중지를 믿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역시 그들과 같았다. (136-137)

"언젠가 당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게 되겠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고독해지겠죠. 그렇게 되겠죠. 그리고 한 해가 또 지나가겠죠......."
"나도 알아요."
조제가 말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잠시 힘을 주었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그가 말했다.
"조제, 이건 말이 안 돼요. 우리 모두 무슨 짓을 한 거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이 모든 것에 무슨 의미가 있죠?"
조제가 상냥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면 미쳐버리게 돼요." (186-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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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있고 그것은 정치가들이나 활동가들이 딛고 춤을 출 수 있는 현실이라는 이름의 마루를 까는 일이다. 역사적 현실이 학자들에 의해 확보되지 못한다면 정치가들은 날아다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

단적으로 5.18은 구조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조를 만든 사건이었고 모든 인간적 사회적 요인들을 다시 배열시킨 사건이었다. 5.18은 우리의 몸에서 출발하여 영혼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26)

광주는 절해의 고도였다. 항쟁을 결의한 젊은이들에게 마지막 언명은 ‘광주 사수‘였다. 계엄군의 군사력 앞에 그들은 광주를 지킬 수도 없고, 도청을 지킬 수도 없으며, 사과를 받아낼 수도 없고, 민주화를 이룰 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외상없는 ‘피의 값‘을 위해, 언젠가 광주 시민의 명예회복과 부활을 위해서는 누군가 거기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전쟁이나 혁명을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광주공동체, 민족공동체의 도덕성과 명에를 위한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십자가는 그들이 용감하게 싸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젊은이들을 희생의 제단에 바침으로써 그들이 인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58)

어떤 이념이나 사상은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모든 문제를 대면하고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며 어떤 특정한 문제들을 외면 한다면 그 이념이나 사상은 스스로 위선임을 자백하는 것이다.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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