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기다리는 사람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13)

그러나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72-73)

그 사람은 "당신, 나에 대해 책을 쓰진 않겠지" 하고 말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책도, 나에 대한 책도 쓰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의 존재 그 자체로 인해 내게로 온 단어들을 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 사람은 이것을 읽지 않을 것이며, 또 그 사람이 읽으라고 이 글을 쓴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내게 준 어떤 것을 드러내 보인 것일 뿐이다.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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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곽을 그릴 수 없는 사랑이란 정념의 정가운데에서 생생하게, 낱낱이 그린 짙은 사랑의 면면들. 누군가로 인해 뜨거운 열병을 앓았던 경험을 거의 잊고 지냈는데, 그때 겪었던 뒤섞인 감정덩어리들이 나와 내 일상을 어떻게 바꾸었었는지 또렷이 기억나게 해주었다. 얇지만, ‘단순한 열정‘으로서의 사랑을 정직하게,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그녀의 글은 특정 또는 불특정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정념을 포착 또는 해소하기 위해 쓰였다. 그녀 또한 그 감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해보고 깊이 진단해보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래서 어떤 작위적인 문체도, 정교하게 조작된 감정도 없다. 그렇기에 어떤 우회로 없이 직진하듯 마음 가까이 달려온다. 그녀의 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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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무라에게 덧없는 헛수고로 여겨지고 먼 동경이라고 애처로 워도지는 고마코의 삶의 자세가 그녀 자신에게는 가치로써 꿋꿋하게 발목 소리에 넘쳐나는 것이리라. (64)

"플랫폼에는 들어가지 않을래요. 안녕"하고 고마코는 대합실 안 창가에 서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기차 안에서 바라보니까 초라한 한촌 과일 가게의 뿌연 유리상자 속에 이상한 과일이 달랑 하나 잊혀진 채 남은 것 같았다.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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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 인상, 서정들만이 흩날린다.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이유를 모르겠으나‘ 기쁘면서도 슬픈,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뭐 그런 느낌들만이 나부낀다. 그것이 풍요로워 몽환적이고도 알 수 없는 애상적인 심상을 뿌옇게 띄워내지만, 그것뿐이다. 수직보다는 수평으로 얇게 넓은 말들. 한국 소설이었다면 그 정서에 좀 더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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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도망, 재즈, 사랑이란 소재가 뒤섞인 스토리 자체는 촌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사건들에서 무뇨스 몰리나가 길어올린 어떤 사유 조각들이 좋았다. 전체적으로 이미 과거에 예견된 미래라는 테마가 인물들의 말, 행동, 외모의 곳곳에 묻어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소한 움직임과 표정, 그들이 읊조리는 말, 스치는 사물들은 단순히 인물과 현재를 묘사하기 위한 소재가 아닌, 그들을 관통하는 삶, 그리고 미래와 연결된다. 상투적인 어구들의 나열이 아니어서 페이지를 넘기는데 종종 제동이 걸리곤 했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18.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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