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부장에게는 끝이라는 개념, 무엇이건 시작을 하면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듯했다. 중간에 그만둠으로써 무책임한 가능성의 세계에 남는 데 안도하는지도 몰랐다.
"중요한 건 초보자와 아마추어인 상태로 남는 거란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를 시작하면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완성되지 않으면 그게 포기나 실패라고 생각하죠. 그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짜 도달해야 하는 건 사실 매번 하던 걸 엎고 새로 시작함에 두려움이 없는 성실한 초보자이자 아마추어, 실패자이자 구도자인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트랙에 수많은 출발선을 긋다 보면 결국은 출발선이 결승선이 되는 것처럼 말이죠." (113) - P113

"무언가가 되려고 애쓰는 마음을 지우는 것, 취미를 쓸모로 바꾸어 유용한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 않는 게 바로 아마추어 되기의 핵심이거든요. 그러니까," (113) - P113

일상적인 가학은 친절과 배려의 옷을 입고 온다고 알리스는 생각했다. 농담으로 위장한 상냥한 폭력에 대해 알리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싶지 않은데 알게 된 것들이었다. (127) - P127

다음에 만나면 내가 밥살게라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음은 오지 않았다. 형이 되어 가지고 이런 거밖에 못 사 줘서 미안하다. 부 감독은 또 부끄러운 얼굴로 돌아섰다. 그런 부끄러움이 많은 부 감독에게 필요한 건 다만 완전히 잊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첫 작품이 성공했고 그게 끝이었다. 애매한 명성. 모른 척하기에 첫 영광은 너무 컸고 그다음은 너무 처참했다. 익명이 될 수도 없는 어설픈 명성이 그를 점점 더 부끄럽게 했다. 그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건 고독사뿐이었을지도 모른다. (182) - P182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다. 쓰이지 않은 후반부에 이 신의 존재 이유가 밝혀질 수도 있었겠지만 완성되지 않았으니 영영 모를 터였다. 생각해 보면 삶도 마찬가지다. 완성되기까지는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도대체 왜 쓰였는지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장면들로 가득하다. 그 끝에 가면 결국은 이런 맥락에서 필요했구나, 꼭 필요한 장면이었구나 하면서 납득할 수 있게 될까? 예를 들면 지금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러나 죽기 직전에야 밝혀지는 진실이라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시나리오 하나를 완성하는 데도 수없이 수정을 거쳐야 하는 법인데. 그러니 한 번뿐인 삶이 엉망인 건 자기 탓이 아니었다. 원래 그렇게 엉망으로 살아가게 생겨 먹은 거였다. 그러니까 자책하는 대신 맛있는 거나 먹여 주며 하루 또 하루 살아 내면 되는 것이다. 엉망인 시스템 안에서도 착실하게 하루에 한 장면씩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모를 장면들을 써 나가는 자신에게 더 많은 다정하고 단 것들을 선물해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188) - P188

다행이야 내가 아니라서, 처음 그 말을 마음에 품은 순간, 그렇게 안전하다 믿은 이편에 서서 자신의 곁을 스쳐 간 사람들을 하나둘씩 저편으로 밀어내는 동안 고독사에 이르는 긴 여정은 이미 시작된 거였다. (224) - P224

"대체로 좋아한다고요."
서운해야 하는데 그 말이 좋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전규석을 완전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좋은 날도 아닌 날도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대체로 좋았다. 그렇게 여백이 있는 관계라서 오래 함께할 것 같았다. 좋지 않은 부분도 수긍하고, 그것까지 포함해서 좋음을 향해 나아가는 의지와 포용의 말로 들렸다. 그것이 이수연이 전규석과의 관계에서 오래 매달리기를 끝내지 않을 수 있는 이유였다. (256)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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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고독을 빼앗지 않으면서 고립으로부터 나를 보호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함께했고, 동시에 나에겐 나만의 우정이, 쾌락이, 일이, 근심이 있었다. 원하는 대로 그에게 어깨를 기댄 채 다정하게 저녁을 보낼 수도, 오늘처럼 방안에서 소녀처럼 홀로 지낼 수도 있는 것이었다. (90) - P90

나는 로베르가 평화 속에서 느끼는 권태를 이해했다. 이 평화는 우리에게 삶의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채 삶 자체만을 돌려주었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의 출입문 앞에서 추위와 어둠을 다시 느끼며, 나는 한때 우리가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추위와 어둠에 맞섰던가를 회상했다. (136) - P136

"고독을 강제로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요. 하지만 사랑에 있어서 그보다 더 서투른 방법은 없어요." (155) - P155

다른 인생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옷을 잘 입을 줄 알고, 스스로를 과시할 줄 알고, 허영의 작은 기쁨들이나 강한 관능의 흥분을 알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무 늦었어. 문득 내 과거가 왜 때때로 타인의 과거처럼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 바로 지금의 내가 타인이니까. 서른아홉 살의 여자, 나이 든 여자니까. (157) - P157

앙리는 말했다. "너도 언젠가는 행복해질 거야."
그는 나딘을 더 꽉 안고 이렇게 말해줬어야 했다. "내가 널 행복하게 해줄게." 그 순간 그는 그러고 싶었다. 인생을 걸게 하는 한순간의 욕망. 그러나 앙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과거는 되풀이되지 않아. 과거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을 거야.‘ (196) - P196

‘필요한 건 시간이야!‘ 앙리는 잠에서 깨어나며 생각했다. ‘유일한 문제는 내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거야.‘ 아파트의 문이 막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외출했다가 벌써 돌아온 폴이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불을 걷었다. ‘나 혼자 산다면 몇 시간쯤 더 여유가 생길 텐데!’ 쓸데없는 대화도, 규칙적인 식사도 더 이상은 없을 것이다. 길모퉁이의 프티 비야르에서 커피를 마시며 일간지를 보고 있겠지. 신문사에 갈 때까지 일을 하고, 점심은 샌드위치로 때우고, 일이 끝나면 얼른 밤참을 먹은 다음 밤늦게까지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성공적으로 《레스푸아》를 이끌면서 소설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으리라. (238) - P238

하루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무사히 보내기 위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일, 피해야만 하는 진실, 거부해야 하는 추억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다. (375) - P375

앙리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거대한 강연장을 개인의 방으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앞에 있는 5,000명의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5,000배가 된 한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는 거의 대화의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429) - P429

마치 마을이 다시 한 번 불타는 양 대기가 뜨거웠다. 건초더미며 관목 아래마다 사람들이 뒹굴고 있었다. 남자들은 장례식의 겉옷을 던져버렸고, 여자들은 소매를 걷어붙이고는 상의의 단추를 풀었다. 노랫소리와 웃음소리, 간지럼을 태우는 듯 작은 비명들도 들려왔다. 그들이 달리 뭘 할 수 있을까? 술 마시고 웃고 서로 간지럽히는 것 말고는, 살아 있는 이상,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82) - P482

열렬한 독자는 자신의 감탄을 반드시 표현해야만 한다고 믿는지, 어떤 이는 불면증의 묘사에 감명을 받았다고 얘기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묘지에 대해 서술한 문장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전부 무심히 써 내린 의미 없는 구절들이었다. 기트방타두르는 비난을 담은 어조로, 왜 그토록 형편없는 남자들을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 묻고는 그 주인공보다 훨씬 더 형편없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미소를 보냈다. ‘이 사람들은 소설의 등장인물에 대해 정말 까다롭군!‘ 앙리는 생각했다. ‘하나의 결점도 그냥 지나치질 않아. 게다가 정말이지 모두가 이상한 방식으로 읽고 있어! 대부분의 독자들은 줄거리를 따라가는 대신에 맹목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모양이야. 때때로 단어 하나가 그들의 마음속에 울려 아무도 모르는 그들의 추억을 건드리고 향수를 자아내거나 어떤 이미지에서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고 믿으면 잠시 멈춰 자신을 비춰본 뒤 황급히 떠나는 거야. 독자들을 직접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아.‘ (562-563) - P562

그들은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 생각하는 것에도 흥미가 없고, 그들이 억지로 견디는 권태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관심 있는 일이라곤 꾸며낸 유명인사가 되는 것, 직업으로 성공하는 것뿐이야. 저들은 더 가까이에서 질투하기 위해 서로 어울리고 있는 거야. 끔찍한 족속이군. (564) - P564

사람들은 사마젤이 인간과 사물을 열렬히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그는 자신의 격렬한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용할 따름이었다. 바로 이 격렬한 활력에만 그는 도취해 있었다. 이 얼마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게다가 상대가 누구든 말이다! 늘 외식을 즐기는 것도 그의 성정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보다 목소리를 더 중요시하는 사람을 어떻게 진지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브뤼노와 모랭은 진지했지만 우유부단했다. 바로 라솜이 표현했던바, 개인주의를 희생하지 않은 채 스스로 사회에 공헌한다고 느끼는 지식인들이었다. ‘나처럼.‘ (305)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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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내 콜라주마냥 끊임없이 덧대지고, 교차하는 상황마다 여러 대립적인 가치들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그 줄다리기는 ˝형식˝을 무기로 승기를 잡았다가 패기에 밀리다가 하면서, 종국에는 어느 쪽의 승리 없이 나뒹굴고 겹쳐진다. 여러 대립항의 수많은 대결 중 내게 와닿는 교전이 있었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닐지.
선형적 구조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충분히 재밌다. 작가가 인물의 행위와 감정 밑에 숨겨진 내밀한 동기와 전략을 샅샅들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추악하거나 멍청한 밑바닥의 모습에서 가장 상위의 철학적 상징을 띄워낸다.

성숙과 미성숙, 숭고와 추악, 진실과 허위는 일맥상통한다. (2022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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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의 작품은 독자에게 전해진다. 그렇게 해서 더없는 총체적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이제 더없이 부분적인 방식으로 전화벨 소리와 갈비 구이 사이에서 받아들여진다. 한쪽에서 작가는 영혼과 마음, 예술, 괴로움, 고통을 주려하지만, 다른 쪽에서 독자는 그 모든 걸 원하지 않거나, 혹은 원한다 해도 그저 기계적으로 지나치면서, 그러니까 다음 번 전화벨이 울릴 때까지만 원하는 것이다. 삶의 자질구레한 현실들은 우리를 파괴한다. 말하자면 거대한 용한테 맞서려고 하는 사람이 작은 아파트의 개 앞에서는 설설 기는 상황인 것이다. (113-114) - P113

피아니스트가 단상에서 쇼팽을 연주할 때 여러분은 그 음악의 마법이 한 천재 예술가의 천재적인 연주를 통해 청중들을 열광시켰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진짜로 열광한 관중은 한 명도 없을지도 모른다. 쇼팽이 천재였다는 걸 알지 못했더라면 아마 그 음악을 들으면서 그만큼 열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흥분한 관객이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치고 날뛰는 것도,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리를 지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누구나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이 놀라운 희열과 지극한 감동을 느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타인을 모델로 하여 자기의 감동이 커가는 것이다. 사실은 음악회에서 어느 누구도 직접적으로 음악에 빠지지 않는다. 청중들은 각자 자기 옆 사람을 모델로 함으로써 결국 모두가 음악에 도취된 기쁨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단언하건대, 분명 한 집단의 사람 모두가 서로서로 흥분시킨 연후에야, 이 외적 신호들이 그들 내부에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에 우리의 감정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123-124) - P123

인류는 신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 중에 일부를 선택해서 (하지만어느 누가 그 선택을 둘러싼 상황을 깊이 파고들어 가고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다른 작가들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달달 외우며 배우기 시작하고, 그 안에 숨어 있는비밀들을 찾아내고, 거기에 맞추어서 반응한다. 만일 그만한 에너지를 다른 예술가를 판별해 내는 데 쓴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가 우리의 호메로스가 될 것이다. 여기서 여러분은 온갖 종류의 수많은 요소들, 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만큼 수많은, 대부분 미학 외적인 요소들이 한 예술가와 그의 작품의 위대성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와 예술의 은밀한 관계는 이렇게 음침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걸 순진하고 아름다운 한 문장으로 요약할 것이다. "영감이 떠오른 시인이노래하고, 열광한 청중이 귀를 기울이나니…" (124) - P124

생각나는 작가가 한 명 있다. 그는 결코 글을 쓰기 시작할 수 없는 사람이다. 스스로가 성숙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자신의 미성숙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자기가 형식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올라는 가지만 정상에 이르지는 못할 것임을, 스스로를 실현하려고 하지만 실현에 이르지 못할 사람임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다. 혹여 언젠가 말도 안 되는 불완전한 작품을 쓰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훌륭해! 정말 멍청한 걸 썼어! 하지만 말이야, 난 지혜롭고 완전한 작품만을 쓰겠다고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는데, 뭐! 이렇게 나의 어리석음을 표현했고 그래서 너무 즐거워! 나한테 쏟아진 비난과 혐오감은 바로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나를 다듬고 나를 그 무엇인가로 다시 창조하고, 그렇게 해서 내가 다시 태어나는 거야."
여러분도 알다시피 건전한 철학을 지닌 작가는 내면적으로 너무도 굳건하기 때문에 어리석음이나 미성숙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망가지지도 않는다. 여러분 같으면 이미 두려움에 짓눌려 내면을 드러낼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어도 이 사람들은 고개를 들고 앞을 꼿꼿이 바라보면서 거리낄 것이 없다. (128-129) - P128

그가 계속 주장하면 그녀는 거부했고, 그가 애원하면 그녀는 높이뛰기를 하러 갔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 훈장이 얼마나 교묘하고 능숙하게, 단 한순간도 훈장으로서의 태도나 학자연한 원칙을 파기하지 않으면서, 단지 대조와 반대 명제의 힘으로, 여고생과의 관계를 즐기는지 진정 놀라울 정도였다. 훈장으로서의 핌코라는 인간 자체가 그녀 속의 여고생을 자극했으며, 또 여고생으로서의 주트카라는 인간 자체가 그의 속에서 훈장을 자극했던 것이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질투가 났다. 물론 나도 반대 명제를 통해 그녀를 흥분시켰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홍분시켰을 때,맙소사, 나는 그녀 곁에서 구닥다리가 되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와 똑같이 현대적이 되고 싶었으니까!
(...)
머릿속으로 실컷 그녀를 조롱해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을 조롱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결국 경의를 표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식의 조롱 안에는 상대의 환심을 얻고 싶은 극적인 욕구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녀를 조롱한다면 그것은 바로 조롱의 깃털로 나를 장식하기 위해서다. 그녀가 나를 거부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공격은 결국 나에게로 되돌아오고 만다. 그러는 동안 내 낯짝은 더욱 추해지고 혐오스러워졌다. 그나마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시도해 보지도 못했다. 그래 봤자 그녀는 어깨를 들썩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젊은 여자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다. 거절당한 사람이 조롱하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는 것이다. (208-209) - P208

아니면 도망을 가는 걸까? 나는 안다. 저들은 도망치는 거다! 서둘러 그들을 따라갔다. 승리다! 전진, 진격, 공격, 나가자, 덮치자, 잡아라, 죽여라, 깨물어라, 목을 비틀어라, 놓아주지 마라! 그들은 두려웠던 것일까? 겁을 주자! 도망간 것일까? 따라가 보자! ㅡ 하지만 자, 살살…… 살살……. 게걸스러운 거렁뱅이가 의기양양한 승리자로 바뀌면 안 된다. 승리를 가져다준 건 바로 거렁뱅이니까 말이다. (223) - P223

그렇게 아무것도 상관이 없게 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모든 것을 다 잊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다 죽어버리고 아직 새로 태어날 시간은 없다면! 오! 진정 죽음을 위해서 살 가치가 있다. 자기 안에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는 걸, 이제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자기 안에 아무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다는 걸, 그 무엇도 섞이지 않았고 들어 있지 않다는 걸 느끼기 위해서라면 살 가치가 있다. 그곳에서 멀어지면서 난 내가 그냥 가버리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내가 나를 데리고 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바로 내 옆에, 아니 내 안에, 아니면 내 주위에, 나와 비슷한, 나와 똑같은, 누군가가 가고 있었다. 나의 성질을 띠고, 나와 함께 간다. 우리 사이엔 사랑도 증오도 욕망도 환멸도 추함도 아름다움도 웃음도 신체의 일부도 없다. 그 어떤 감정도 구조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293-294) - P294

자리에서 일어서는 이모부의 시가에서 재가 떨어졌다. 이모부는 무언가 적당한 말을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형제가 된다……. 그러니까 민중과 형제가 된다는 거 말이냐?"
이모부는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이름을 붙이고, 그래서 사회적이고 세속적인 양상을 부여하려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거하여 그 현상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372)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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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카페 림보]를 읽은 이래 오랫동안 김한민 작가의 팬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림 여행을 권함]은 거의 10년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는데, 소탈하게 담긴 그림과 그에 얽힌 그의 담백하면서도 따뜻한 속내에 그간 딱딱해진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그림과 여행의 묘미 둘 다 모르는 내게 이 둘의 매력을 코앞에 대놓고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여행도 그림도 시도해보고 싶지 않은 이가 있을까? 더불어 업으로 삼은 일을 공적 영역에 국한하지 않고 생활에 녹이는 삶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도서관에서 빌린 1판 1쇄를 읽었는데 오탈자가 조금 있다. (2022.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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