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이 남자, 그녀 옆에 앉아 있는 이 투박한 남자, 뭘 마시겠냐는 내 질문에 ‘물‘이라고 말하는 대신 ‘냉수 한 잔‘이라고 대답하는 이 남자에게 안착하기까지, 그토록 많은 비결을 공유하고, 그토록 마리아노의 노래를 듣고, 그렇게나 몽상을 했단 말인가. 얼마나 부당한가.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년 시절의 동경과 연애의 취향을 배신한 여자아이들 가운데 첫 번째. 그녀에게는 무엇인가 꺼져버렸고, 이제 마나님이 다 된 그녀는 실수하지 않으려고 허락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고 신경 쓰며 자기 자신을 감시하고 조심한다. 그가 듣고 있어, 새색시들의 불편해하는 모양새.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그녀가 죽은 것처럼 보이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다. (137) - P137

아이들에 대한 맥빠지는 의견과는 상관없는, 고작 3년 전에 여자 친구들과 나누던 가슴뛰는 연애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그런데 과연 "나는 오늘 저녁 누구누구랑 데이트할 거야, 어떤 드레스를 입을까"와 "우리 서둘러서 가자, 아빠가 곧 돌아올 거야"라는 문장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점이 있기는 한가. 우리는 기혼녀라는 굉장한 후광을 달고 각자 고립되어서, 남편의 그림자가 항상 우리 사이에 드리워져 있기라도 하듯, 감히 멋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이야기도 못하기에 안전한 주제인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로 다시돌아간다. (219) - P219

먹이고, 씻기고, 긴 밤을 위해 새 기저귀를 채우고, 흡족해하는 아이를 그가 저녁에 자신의 품에 안을 때, 마치 아이를 아빠에게 보여주는 그 10분을 위해 내가 종일 견디어온 것 같다. 그는 아이를 허공에 던지고, 간질이고, 온몸에 뽀뽀한다. 나는 그 둘을 바라보았고, 웃었고, 맥빠진 만족감을 느꼈다. 아이를 돌보고, 정성을 쏟고, 나를 희생한 시간들. 그의 어머니처럼. 당신은 왜 그렇게 불평을 해, 미혼모들과 이혼한 여자들은 저녁에 자기희생을 선물할 남자조차 없잖아. 그러나 여러 번, 공원에서, 유모차를 밀면서, 나는 나의 아이가 아닌, ‘그의 아이‘를 산책시킨다는 이상한 느낌을, 남편이자 아빠인, 그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그를 안심시키는, 위생적이고 조화로운 시스템 속에서 움직이는 말 잘 듣는 하나의 부품이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222) - P222

그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길거리의 사람들을 밀치면서 안시를 돌아다닌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오후가 흘러가기를, 아이가 어서 자라기를, 기다려본 적도 절대 없었다. 그는 일이 끝난 후,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찔러넣고, 조용히 안시를 구경했고, 그에게는 모든 공간이 자유로웠다. 나는 유모차를 밀고 가는 길, 장을 보러 가는 길, 정육점, 약국, 세탁소 가는 길 같이 유용한 길만 알았다. 저녁에 의사, 미용사와 약속이 있을 때, 무엇인가를 구매할 때면, 나는 혼자 외출했고 그가 아이를 돌봤다. 나는 반쯤 기절한 파리처럼 인도 위를 미친 듯이 굴러다녔다. 혼자가 된 여자의 걸음걸이를 다시 배워야만 했다. 우리 집, 우리 아파트는, 분명 그의 마음속에 피난처의 이미지로 간직돼 있었을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정리해야 할 상자, 준비해야 할 아이의 식사, 목욕시키기, 이런 것들이 눈에 확 들어오는, 늘 정리 정돈해야 하는 그런 공간의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있지 않았던 셈이다. (223) - P223

"내가 오늘 오후 거기에 가면 당신 화낼 거야?" 내가 침묵하니까, 마지막 문장이 들린다. "아이 보는 데 두 명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주저앉지도 고함치지도 않았다. 냉소적이고 논리적인 결론, 이게 결혼이다, 둘 중 어느 한 명의 우울을 택하는 것, 둘이 함께하는 것은 낭비다. 내 자리는 아이 곁이고 그의 자리는 영화관이며, 그 반대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영화관에 갔다. 나중에 그는 여름이면 테니스 치러 갈 것이고, 겨울이면 스키 타러 갈 것이다. 나는 아이를 보살피고 산책시킬 것이다. 참 멋진 일요일들.…. 세 시에 아이 방의 블라인드를 걷어 올린다. 비어 있는 거리, 공원, 백조들이 보인다. 때때로 드는 시기심, 집안이나 유모차 뒤에서 바라본 세상은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다, 그가 소유할 수도 있을 여자들과, 이제 더는 내가 소유할 수 없는 남자들로. (230-231)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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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붕괴시킨 전쟁이 끝난 세상. 폐허 위에 다시 논리를 세워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분투하는 지식인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발전론적 사고가 해체되고 유토피아가 소멸한 가운데, 프랑스 지식인들은 길을 잃었으나 여전히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사랑하며 살갗 냄새나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사회적 삶과 개인적 삶의 끝없는 갈등, 선과 악, 삶과 죽음, 남녀 불평등, 영원한 불안 등 추상적이거나 거시적인 문제부터 전후에 실질적으로 겪게 되는 냄새나고 하찮은 고민과 딜레마까지 얼기설기 얽혀 있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이야기와 인물들이 재미있다. 2주 내내 이 소설에 빠져 있을 수 있던 이유였다. (2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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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시대의 가구들, 페르시아식 양탄자, 고색 짙은 그림들, 양피지로 장정한 책들, 크리스털, 벨벳, 새틴이 있었다. 고급 취향을 가졌다는 평판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에 대한 동경과 지적이고 싶은 희망, 그리고 천박한 자신의 취향 사이에서 주저하는 뤼시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91) - P91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판에 박힌 말로 내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나라를 설명하게 내버려두었다. ‘거대한 어린이’, ‘여자의 천국‘, ‘끔찍한 애인들’, ‘열에 들떠 소용돌이치는 삶’ 운운하는 이야기들. 뒤뒬은 마천루를 가리켜 대담하게도 ‘발기한 남근‘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난 지식인들의 기교 섞인 감수성을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교계의 인사며 그 아류들로 이루어진 이 사람들이야말로, 추악한 상투적 문구로 멀어진 눈과 진부한 생각만 가득 찬 마음으로 세상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로베르나 앙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고, 자신을 귀찮게 하는 것을 귀찮아하면서 무심히 살고 있었다. 왕이 발가벗고 걸어 다닌다 하더라도, 그들은 왕의 외투에 장식된 자수에 감탄하지 않으리라. 탁월한반응을 뽐내보려는 속물들이 열심히 모방하는 모델을 바로자신들이 만들어내고 있음을 로베르와 앙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존심이 있기에 어떤 순진한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반면, 뒤뒬이나 뤼시, 또 그 주위로 모여드는 날씬하고 빛나는 젊은 여자들은 한순간도 진지하게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두려울 정도의 연민을 느꼈다. 그들에게 남겨진 몫은 공허한 야심, 타는 듯한 질투심, 실속 없는 승리와 패배뿐이었다. (92-93) - P92

그리고 나 역시 경험으로 알잖아. 타인을 평가하는 습성이 없는 상대를 사람들은 곧잘 부당하게 대한다는 것을. (220) - P220

"그걸로 충분하지 않겠나? 자네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네." 뒤브뢰유가 열정적으로 말을 이었다. "지지한다는 건 결국 선택에 지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것도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지. 절대적으로 완벽한 것을 발견하려고 집착하면,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고 무엇도 하지 못하게 되는 거야." (539) - P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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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랄한 자기 고백. 철저하고 냉정하게 자신과 가족들을 돌아보고 돌아본 자만이 엮어낼 수 있는 용감한 근원적 이야기. 이상적인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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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쳐 나는 애어른 또는 어른애들을 가장 반기는 건 시장 자본주의다. 어른의 구매력을 지닌 아이는 체제 유지에 이상적인 소비 주체다. 여기다 허영에 쉽게 자극되는 쓰레기가슴 그리고 소비 외의 쾌락에 무지하도록 보호해 주는 차안대가 더해졌다고 상상해 보라. 자본주의는 천군만마를 얻었다! (51) - P51

그렇다. 난 쉬운 선택들을 해 왔다. 그러면서 선택하지 않은 길들을 어렵다는 말로 일축해 버렸다. 그러기를 수십 년, 당연히 쉬움들이 쌓여 내가 됐고, 내가 택하지 않은 모든 어려움들이 내 주위에 쌓여 내 경계가 되고 불가능으로 굳어졌다. 다 너무나도 쉽게. (59) - P59

뻔뻔한 남자들을 숱하게 상대해 보고 얻은 교훈이 뭔지 알아? 어지간히 해서는 잘못 인정, 반성은커녕 역공격만 안 당해도 다행이라는 거. 그만큼 준비가 치밀해야 해. 확실하게 꺾어 주지 않으면 사과라는 옵션이 눈에 안 들어오는 부류거든. (165)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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