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링킹]은 좋았는데, 이 에세이는 중반 이후부터 지나치게 반복된다(특히 [드링킹]을 읽었다면 더더욱). 같은 생각을 기반으로 어제 있었던 일,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다 풀어놓아 지치는 수다를 듣는 느낌이다.

지금의 내가 읽기에는 이미 아는 내용도 많다. 20대 여성들에겐 꽤나 통찰력을 가진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끔씩 은밀하게 비치는 그녀의 지나친 자의식과 나르시시즘, 불안정 애착, 기질적 우울이 독서에 제동을 건다. 내게 캐롤라인 냅은 2권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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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나도 걱정과 필요에 쫓겨서 그곳의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들여보내달라고 청하곤 했다. 함께 저녁을 먹던 친구가 내게 아무도 사귀지 않는 것은 어떤 기분이냐고 물었을때, 나는 혼자라는 상태에 절망하고 혼자 있는 것은 무섭고 열등한 상태라고 생각했던 시절의 기분이 어땠는지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주말에 계획이 없다는 말에 친구 웬디가 불편해하는 것을 볼 때, 나는 한때 내가 아무 계획 없는 시간을 얼마나 겁냈는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 안의 감정이 밖으로 나오도록 여유를 주는 일을 얼마나 어려워했는지 새삼 떠올린다. 그리고 체육관에서 만난 여자처럼 사람들이 ‘우리‘라는 단어를 수시로 입에 올리는 걸 들을 때, 나는 마치 타인과 결부되지 않은 나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듯이 남들과의 관계로만 나 자신을 정의하려고 애썼던 고통스러운 시절을 떠올린다.
그날 밤 부엌에서 켈로그 만찬을 준비하며 내 집의 단정함과 조용함을 즐길 때, 그 시간이 고마운 선물이자 일종의 승리로 느껴졌다. 예전에 내가 애쓰며 괴로워했던 일들이 과거로 좀 더 멀리 물러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원래 숫기 없는 성격이다. 타인과의 소통을 늘 부담스럽게 느껴왔고, 앞으로도 아마 어느 정도는 계속 그럴 것이다. 따라서 나는 혼자 있는 걸 늘 대단히 편하게 여겼지만, 그러면서도 그 상태를 만끽할 줄은 잘 몰랐다. 혼자 방에 앉아 있으면서도 초조해지지 않는 것, 연애의 틀 밖에서도 안락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명랑한 은둔자, 49-50)

어머니가 즐겨 하신 말씀 중에 "인생은 드레스 리허설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술을 끊기 전 몇 달 동안 나는 저 말을 수시로 떠올렸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인생의 힘든 순간들을 겪어내는 데 술에 지속적으로 의지하면, 삶의 모든 일이 현장이 아닌 연습인 양 느껴지기 시작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해 여름에 밤이면 밤마다 전화를 붙들고 애통해할 때, 나는 실제로 애도한 게 아니라 애도를 연습한 것이었다. 희석된 고통은 직면한 고통과 결코 같지 않다. 술과 자신감의 방정식, 술과 불안의 방정식도 마찬가지다. 칵테일 파티에서 마티니로 얻은 세련됨은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힘겨운 작업을 거쳐서 내면으로부터 얻은 세련됨과 결코 같지 않다. (맑은 정신으로 애도하기,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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냅의 고백들은 아찔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기억하는 유사 경험의 나열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아찔하지 않았을 것이다. 냅이 읊는 경험들은 술 마신 다음날 나를 부정하지 않고 다시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의도적으로 더는 생각하지 않았던 일들, 눈 질끈 감고 뇌 저편에 밀쳐두어 망각의 영역에 갇혀 있던 수많은 실수를 일깨웠다.

잊고 있었지만 없었던 일인 건 아니었다. 그녀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과음 후 실수‘ 상자에 차곡차곡 넣어놓은 사건의 레이어가 이렇게나 다양하고 많은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잊고 있던 실수가 떠올라 눈을 질끈 감고 책을 덮기도 했다. ˝다들 이러잖아?˝, ˝술을 마셨으니 그럴 수 있어˝, ˝일상에 문제 없으면 된 거 아닌가?˝ 같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말들, 그와 함께 손쉽게 밀쳐내버린 일들은 기억 저편에 어느새 산더미가 되어 있었고, 나는 이제서야 고개를 돌려 그곳을 보았다.


냅이 전해주는 정보들 역시 아찔했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주당이긴 하지만, 알콜 중독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알콜 중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고는 생각했다. 4년 전쯤이다. 매일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맥주 4캔을 사서 저녁마다 다 마시던 시기가 있었다. 그 이후로도 최소 일주일에 1번씩은 마셔 왔다. 올해도 봄에는 기분이 싱숭생숭하다는 핑계로 일주일에 2번씩 마시기도 했다.

여름부터 차츰 술과 멀어지면서 올 가을이 되어서는 술 마시는 텀을 2주로 늘렸고, 그게 3주가 되었고, 이제 한 달이 되었다. 그래서 중독 수준이라고 할 만한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에 실린 알콜 중독 테스트에서 나는 중증 알콜 중독을 진단받았다. 나 스스로도 체크리스트 항목들을 보면서 부정할 수 없었다.


다시 한번, 냅이 알려준 사실들은 꽤나 끔찍했다. 이미 한 번 알콜 중독에 빠졌던 뇌, 알콜에 도파민 분비를 의존했던 뇌에는 그 시스템이 평생 각인되어 있다고. 오랜 기간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알콜 중독 수준으로 술을 마셨던 사람들에게 절주란 불가능하며, 금주만이 있을 뿐이라고. 그러나 알콜 중독자들 중 단주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3명에 1명도 되지 않는다고.

왠지 모르게 희망이 되는 정보들도 있었다. 알콜 중독은 성격적 결함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생리적 질병이라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알콜 중독은 다른 병처럼 유전적으로 대물림되는 질병으로, 알콜 중독자들의 핏줄에는 알콜을 절제하지 못하는 습성 같은 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음주 경향을 자제력, 의지력, 의존성 같은 내면적 특징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물리적 치료 대상으로 보게 해주었다. 몇 년 전 나의 심각한 우울이 의지 부족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질병이란 걸 깨닫고 나서 꽤나 효과적이고 빠르게 그것을 ‘치료‘할 수 있었듯이.


그런 의미에서 냅의 <드링크>는 고무적이다. 알콜에 대한 나의 나이브한 생각을 호통치듯 엄격하게 바로잡아주었다. 실제로 호통을 쳤다기보다는 그의 무섭도록 솔직한 자기 고백이 자연스레 내게 경각심을 던져 준 것이다.

어쩌다보니 단주 3주차, 술의 공간을 조금씩 다른 시간들로 채워가고 있었다. 음주가 조금씩 새삼스러워졌다. 미디어에서 얼마나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히 술을 권하고 있는지 체감하기 시작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더 나은 삶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조금씩 논알콜의 삶의 초입에 발을 들인 때, 캐롤라인 냅은 내게 박력 있게 다가와 내 손을 낚아채고 몇 발자국 성큼성큼 더 데려가며 ˝자, 봐!˝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기 속을 깊숙히 들여다보고 그것을 그대로 종이 위로 띄워낸 그녀의 용기를 보며 느낀다. 어떤 흠많고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든간에 자기 자신에게 솔직할 줄 아는 그 무서운 용기를 견지한다면, 삶은 길을 잃지 않는다.



p.s 다만 단주 후의 시간, 그 효과에 대해 충분히 얘기하지 않은 게 아쉽다. 그러한 내용은 끝부분에 잠깐 나오고, 책 대부분이 술 마시던 시절의 습성과 과오에 대한 얘기다. 심지어 중간 부분까지는 읽으면서 그녀의 묘사 때문에 술을 마시고 싶어질 정도다. 그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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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10 0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주....는 그냥 있는 말입니다. 저는 전형적인 소극적 알코올 의존증인데요, 1주에 8일 동안 최하 25% 소주 한 병 이상을 정기적으로 마십니다. 많이 마시지 않기 때문에 실수는 거의 하지 않지만 간혹 술 마시고 인터넷 접속해 정상적이지 않은 댓글을 달기도 합니다. 유전 맞는 거 같습니다. 아이들은 다행히 어미를 닮아 술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이런 책이 있군요. 굳이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끊지 못할 거 같습니다. 속만 상하기 싫어서 말입니다.

김섬 2022-12-14 19:40   좋아요 0 | URL
솔직한 이야기 감사합니다. 이런 자전적 에세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술과 뇌의 생리학적 관계에 대한 접근 자체가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음주는 (의지력의 문제라) 잘못되었다는 단순한 도덕론을 떠나서 질병으로서의 과학적 흐름을 쫓아가는 게 저는 더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앞으로 이쪽으로 더 읽어보려고 합니다. 음주 행위에 죄책감부터 느끼지 않으시는 게 의존증을 벗어나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왕 드시는 것 즐겁게 드시기 바랍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친구네 집에 갔다가 퇴근해서 돌아온 친구의 아버지가 친구를 번쩍 안아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놀랍고 부럽고 약간은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내게는 너무도 낯선 광경이었다. 우리 가족 사이에는 포옹이란 게 없었다. 4학년인가 5학년 때는 친구네 엄마의 욕실에 들어갔다가 거기 널린 물건들을 보고 기겁을 했다. 로션과 파우더와 각종 튜브, ‘딸각‘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히는 콤팩트, 우리 어머니는 잡다하게 물건을 사 모으는 취미가 없었다. 화장품도 립스틱과 파우더만 약간씩 쓸 뿐이었다. 그리고 카탈로그에서 특별 주문하는 피어스 글리세린 비누를 빼고는 값비싼 미용 제품 같은 것에 욕심을 내지도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은 좀 이상하게 사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서 활력이 부족하고, 감각적인 것을 회피하고,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는 우리 집의 분위기가 일반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61-62)

내면의 공허를 술로 채우고, 끝까지 술을 추격하고, 그런 과정에서 때로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술은 끊을 수 있지만, 실제로 더욱 끊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러한 추격이다. 그래서 AA 모임에 가면 술과 결별하고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알코올 중독자 같은 사고와 행동을 보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외부의 해결책을 찾는 탐색은 계속된다. 우리는 뭔가를 원하고 뭔가가 있어야 한다. (80-81)

어떻게 보면 술의 행로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순간까지 알코올은 모든 것을 개선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어서면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그리고 아직 개선 도정에 있는 동안 술이 우리를 다른 자아로 고양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놀랍다. (87)

그러나 이런 방식의 자기 변모는 어떤 버전의 자신이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 수 없게 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나는 제임스나 일레인과 함께 있을 때는 뻔뻔하고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고, 샘과 함께 있을 때는 친밀한 버전이었으며, 친척들과 함께 있을 때는 얌전하고 세련된 버전이 되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뭐가 뭔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어떤 버전의 내가 본래 내 속에 있던 것이고 어떤 버전의 내가 외부의 상황에 따라 만들어진 것인지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97)

AA 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중지한다는 이야기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 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97-98)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들, 그러니까 술이라는 정신의 마취제 없이도 하루하루를 밀고 나가는 사람들은 외부의 힘에 막연한 기대를 하지 않으며, 개인의 진정한 힘과 희망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경험의 축적을 통해서, 즉 자기 앞에 닥친 과제들을(아무리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라 해도) 하나하나 해내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다.
하지만 술을 마시는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뚫고 지나가는 것과 그것을 외면하는 것의 다른 점을 알지 못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멍청히 앉아 술을 들이켜다가 취하는 것뿐이다. (134)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역설적인 것은(그러면서 정말로 위험한 것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난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술 마시던 시절, 술이야말로 내 진정한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도구라고 느꼈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흐느낀다.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전화 걸어 고통을 호소한다. ‘우울해. 외로워. 나를 좀 도와줘.‘ 하지만 술은 기만의 도구다. 술이 빚어내는 감정은 환각이다. 다음날이 되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깨어나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뿐이다. (143)

음주 행위는 두뇌의 보상 체계를 인위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이다. 마티니를 한두 잔 마시면, 알코올이 행복감을 전해주는 두뇌 회로 구조에 영향을 미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 전달 물질의 분비를 촉진한다. 도파민은 바로 쾌락과 보상 감각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세월이 흐르면(그리고 그동안 알코올이 일정 수준 이상 남용되면) 우리 두뇌는 그런 인위적인 활력 증가에 ‘대상성 적응compensatory adaptation‘이라는 것으로 대응한다. 내적 물질 균형을 본래의 상태로 되돌리려고, 도파민의 분비를 감소시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본래의 쾌락과 보상 회로는 고갈된다.
그리고 악순환이 이어진다. 계속해서 술을 마시면 우리 두뇌는 행복감과 안정감을 제공하는 능력이 감퇴하고, 그러다 보면 그런 느낌을 만들려고 점점 더 인위적인 자극(알코올)에 의존하게 된다. (152-153)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워 내 소심함을 떠올리고는, 술이란 인격의 덫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자신의 소심함을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오랫동안 끈질기게 간직한 것은 내가 진정한 자아를 술로 가렸기 때문이 아닌가, 술로 내 내부체계를 마비시키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나를 알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194)

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평범한 과음 수준을 벗어나 고삐 풀린 폭음의 단계로 넘어갔을 때 자신이 무슨 일을 할지 예측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일은 외부의 사건처럼 우리에게 그냥 닥쳐온다. AA 모임에 가면 흔히 듣는 말, "내가 술을 마실 때마다 나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는 언제나 술이 관련되어 있었어요". 진성 알코올 중독자들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은 때를 더 열심히 기억한다. 친구들과 즐겁게 술 마신 때를, 집에 안전하게 돌아온 때를, 자기 침대에서 깔끔하게 깨어난 때를………. 그리고 불미스럽고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났거나 지난밤의 일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뭔가 변명을 둘러댄다. 비난의 화살을 돌릴 대상을 찾는다. 스트레스, 힘든 인생, 호르몬. (197)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은 매일같이 하는 선택이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 선택을 해야 한다. 선택은 매우 간단하다. 술잔을 들거나 들지 않거나. 하지만 그 추수감사절 모임 같은 경우는 좀더 복잡하다. 그런 날 술을 안 마신다는 것은 몇 가지 진실을 인정하는 일이다. 자기파괴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감정을 술로 다스리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는 것, 술이 제공하는 해법은 결국 무용지물이고 패배적인 방편이라는 것을. 알코올 덕분에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번잡한 노역을 피할 수 있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라든가, 내가 물려받은 조용하고 억제되고 예민한 성격을 인정하는 일, 또 남이 와서 내 욕구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해결 방법을 찾는 그런 많은 일을. 그러니까 한마디로 알코올은 내 성장을 가로막은 것이다.
이런 말은 너무도 당연해서 말하자마자 그냥 상투적인 표현으로 여겨지지만, 그 순간까지도 나는 성장이란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며, 어른이란 생물학적인 나이가 아니라 정서적인 수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정서적 수준이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임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알코올 중독자든 아니든 간에)이 그렇듯이, 나 또한 내 인생의 많은 시간을 성숙이 외부에서 불쑥 찾아오기를 기대하며 지냈다. 마치 성숙이라는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날 수도 있는 사건인 것처럼. 아버지나 줄리안 같은 남자들이 소량의 세련미와 자신감을 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성장이란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중독을 벗어나는 일은 이런 오해를 뒤집어서 성장은 안에서 뻗어나오는 것이며,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과정을 통해 얻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이다. 술을 끊으면 우리는 이제 기다리지 않게 된다. 어느 날 누군가 찾아와서 내가 해야 할 성장의 노역을 대신 해줄 거라는 끈질기고도 인간적인 소망을 버리게 된다. 비로소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주변 상황들, 특히 부모님의 죽음은 한동안 내 어린 시절의 껍질을 부식시켰지만, 그 대부분은 내 의지로 한 일이 아니었다. 술을 끊은 건 아마도 내가 그때까지 내린 결정 가운데 진실로 어른스럽다고 할 수 있는 최초의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위한 성장의 발걸음이었다. (306-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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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음에도 윤도의 가정이 어떤지, 또 윤도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윤도의 세계는 얼마나 단편적이었는지, 내 비밀의 무게에 짓눌려 남들도 자신 몫의 비밀을 짊어지고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나는 어렸고, 어리석었다. (125) - P125

책을 쓰는 동안 적어도 나는 자유로웠고, 진실했다. 그것은 훼손할 수 없는 백 퍼센트의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알고 있다. 책에 쓰인 것은 오롯이 내 주관에 의해서 선택된 순전히 내 마음이 손상된 부분만을 일방적으로 기술한 절반의 진실이라는 것을. (128) - P128

"알겠어. 나 아빠처럼 되지 않을게요. 주말에 꼭 고해성사 받을게."
나는 엄마가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한 후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기도는 원망의 곡소리나 살풀이와 다름없었다. 나는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잠그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윤도와 함께 듣던 인디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늘 내게 찾아온 진부하기 짝이 없는 고통을 잊기로 했다. 태리와 부모님, 세상과 나 사이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문제들에 대해. 지금껏 나는 내가 자력으로 선택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고통을 받아왔다. 불행은 참 진부하지만 행복은 특별하다. 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행 대신, 윤도와의 키스에 관해, 그 특별함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반드시 이곳을, D시를 떠날 것이다. 윤도와 함께, 이곳을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리라. 그래서 그 누구의 감시도 없이 삶의 중심에 윤도와 나를 놓고 살아가리라. (221-222)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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