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졸업이 가깝구나, 하는 것을 그는 이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19쪽
사카키 안나. 그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까이 없으면, 잊혀지는구나.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가까이 있으면 그 존재는 싫어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41-42쪽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걷는 것은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차가 없고 경치가 멋진 곳을 한가로이 걷는 것은 기분 좋다.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여러 가지 기억과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붙들어두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더니 마음이 해방되어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59-60쪽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어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리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다. 이를 닦는다. 식사를 한다. 어느 것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60쪽
아냐. 기억해 주지 않아도 돼. 잊어도 돼. 도오루는 이상한 듯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어째서? 도오루가 되묻자 안나는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가까이 없으니 잊혀지는 건 당연하잖아. 그 어조가 진지한 것을 느끼고, 도오루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온화한 표정은 변함없다. 무의식중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잊혀진다면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건 고통스럽지 않아? 나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안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나도, 남에게 지킬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부탁은 하지 않고, 남의 기억에 기대지도 않아.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 그걸로 됐어. 그렇게 말하며, 조그맣게 손을 흔들며 떠나간 소녀.-72-73쪽
겉보기의 반응과 알맹이의 속도. 아까 치아키가 한 말을 떠올린다. 어째서 늘 이렇까. 항상 나중에 생각이 난다. 언제나 나중에 감정이 쫓아온다. 역시 나는 단순한 바보인 걸까. 남자들이 나를 두고 쿨하다느니 여유롭다느니 평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스스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사실은 그저 멍청하고 무능한 아이라는 것이 드러나 버릴까봐 무서울 뿐이다. 그리고 도오루는 유일하게 그것을 간파한 인간이다. 그는 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 미와코도 치아키도 리카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도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92쪽
"아냐.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이 어른의 부드러움인걸. 뺄셈의 부드러움이랄까." (중략) "대체로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의 부드러움이란 건 플러스 부드러움이잖아. 뭔가 해준다거나 문자 그대로 뭔가 준다거나. 그러나 너희들 경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주는 부드러움이야. 그런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그런가."-196쪽
나는 포기하고 있다. 달아나고 있다. 타인에게 부정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서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도 용서 따위 하지 않았으며 용서할 생각도 없다. 그야말로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누구보다 오들오들 떨며 번들번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221쪽
"아마 그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우리 무척 교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서로 우리 커플은 환상적이라고 믿었어. 물론 그는 멋있었고 좋은 점도 많아 거기에 끌렸지만, 우린 좋은 점이 많은 멋진 상대에게 걸맞는 자신을 자화자찬하고 있었을 뿐이야. 우리 정말 멋지지, 하고 함께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을 뿐이라고." 그녀의 솔직함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잔혹함이라고 할 정도의 솔직함에 다카코는 기가 질렸다. "서로 작년쯤부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은 했지만, 올해 들어 확실히 그걸 자각한 거지. 그러고 나니 둘 다 그걸 견딜 수 없게 된 거야."-267-268쪽
"그렇지만 말이야, 사랑을 사랑하는 건 가능하지 않니? 나 그것조차도 못 했어. 그 애와 1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후 줄곧 이게 연애다, 나는 연애를 하고 있다, 하고 세뇌하고 있었는걸." "음, 사치스런 고민이랄까, 뭐랄까." 문득 치아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다 시노부에게 고백할 마음은 없다고 한 치아키. 그렇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좋다고 한 치아키. 대체 어디까지가 사랑을 사랑하고, 어디서부터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무엇일까. "외로워." 미와코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주에 그 애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외로웠어. 2년동안이나 시간을 공유해 왔으니까. 그런데 더 외로웠던 것은 오히려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는 거야. 결국 그 아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던 거라는 걸, 확실히 인정해 버린 거지." 미와ㅏ코는 보기 드물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분노일까, 후회일까. 뭔가 패배감 같은 것이 그녀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도 사랑이었지 않을까." 다카코는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269쪽
어제부터 걸어온 길의 대부분도 앞으로 두 번 다시 걸을 일 없는 길, 걸을 일 없는 곳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앞으로 얼마만큼 '평생에 한 번'을 되풀이해 갈까. 대체 얼마만큼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287쪽
하지만 옳은 것은 그들이었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 어른이 되려고 했던 자신이, 제일 어렸다. 그리고 그들은 도오루보다 훨씬 관대했다. 혼자서 강한 척하는 도오루를 그들은 사랑해 주었다. 언제나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주었다.-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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