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로 못질할 만큼 외로워!
마쓰히사 아쓰시.다나카 와타루 지음, 권남희 옮김 / 에이지21 / 2008년 3월
절판


"이봐, 이건 파는 게 아냐. 게다가 너 같은 녀석에겐 100만 엔을 줘도 안 팔아. 부케라는 건 말이야,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거야. 관람차가 세모가 되고, 서커스 곰 타냐가 전신 탈모가 된다 해도, 너 같은 녀석에겐 안 줘."-35쪽

섬싱 포Something Four라고 해서, 신부가 몸에 지니고 있으면 좋다고 하는 것 네 가지. 어머니의 액세서리 등 오래된 것으로 가족과의 유대를 나타내는 섬싱 올드Something Old, 새로운 드레스로 새 생활을 의미하는 섬싱 뉴Something New, 결혼한 친구의 구두나 소품을 빌려서 행복을 나눠받는다고 하는 의미의 섬싱 바로우드 Something Borrowed, 그리고 부케의 파란 꽃과 파란 리본으로 신부의 순결을 나타내는 섬싱 블루Someting Blue.-111쪽

"원래 좋아했던 여자니까 당연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거, 힘들다, 미하루. 옆방에서 지금까지 실컷 해오던 것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여자가 있는 기분은 바나나로 못을 박을 수 있을 정도로 안타깝고, 코끼리가 밟아도 망가지지 않을 정도로 쓸쓸해."
미하루는 또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걸 참으면서 말했다.
"요는 거리야."
료헤이가 웃으면서 팔짱을 끼고 소파에 기댔다.
"거리?"
"너무 멀면 망상이 폭발해. 너무 가까우면 좋은 점이 가려져. 행복이란 놈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마음보다 중요한 건 거리야. 그것만 좋은 위치를 확보하면 좋아하느니 싫어하느니는 정말로 염치없고 작은 요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거야."-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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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1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7년 1월
품절


기류는 주위에 열등감과 질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놈은 그저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는 게 최고다. 가까이 있다 보면 결점을 들춰내고 싶어진다. 찾아낼 결점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의 천박함만 느껴져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 이런 끔찍한 녀석을 조사하는 역할을 맡게 되다니. 정말 운이 없다. -64쪽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 달라는 수법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은 구치외래에서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자기 이름은 그 사람이 가장 많이 듣는 단어다. 그 특별한 단어에 대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그 사람의 생생한 세부 사항을 알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답을 거부당해도 상관없다. 왜냐하면 거부 그 자체에도 그 사람의 자세가 드러나는 셈이니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을 함부로 알려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는 점이다. -96쪽

효도의 전략은 멋졌지만 두 가지 큰 오산을 했다. 하나는 나늘 그런 음모조차 눈치 채지 못할 멍청이로 오인했다는 점, 또 하나는 내 반응에 대한 오산이었다.
효도는 만에 하나 내가 녀석의 목적을 눈치 채면 죽기 살기로 저지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걸 전제로 방어선을 펼쳤고, 다양한 포석을 깔아 두었다.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이런 점을 두고 효도를 얼간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 녀석은 운이 없었을 뿐이다. 전혀 다른 가치관을 지닌, 있으나 마나 한 존재에게 정공법으로 나선 것이 효도의 실수였다. 사실 효도가 노린 것과 내 소망은 정확히 일치했다. -206쪽

소문은 담쟁이넝쿨과에 속하는 악질적인 잡초다. 신경 쓰기 시작하면 골치 아프고, 깜빡 무시하고 있다 보면 손발이 엉망으로 뒤엉켜버린다. 효도와의 문제를 마무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소문에 대한 관심을 껐다. 마음만 먹으면 그것은 의외로 간단한 일이다. -211쪽

겉으로는 매우 예의 바른 것 같은데 그 얼굴을 보니 불쾌감이 곱절로 증폭되었다. 시라토리에게는 상대방이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피할 줄 아는 에티켓이 결여되어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키고 있지만 왠지 이쪽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오는 느낌. 2인용 좌석에서 1.5인분을 차지해 버린 느낌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236쪽

나는 '대공룡 vs 외계인'이라는 영화가 상영되기를 기다렸다. 이미 꽁무니를 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입을 열자마자 구로사키 교수가 직구를 던져왔다.
"난 바쁘네. 짧게 하세."
시라토리는 히죽 웃으며 교수가 던진 직구를 받아쳐 백스크린으로 보내버렸다.
"안심하십시오. 저도 구로사키 선생에게 시간 쓸 여유가 별로 없으니."
구로사키 교수가 발끈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노여움, 당연하다. 시구식에서 던지는 공은 헛스윙 하는 것이 서로의 약속이다. 하지만 상대는 몰상식한 외계인. 나는 구로사키 교수가 좀 측은해졌다.-271쪽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 않지만 기류 선생은 용케 참고 있더군요. 그 양반은 메이저 리그 선수인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네 야구 선수들이니."
오토모의 당돌했던 표정이 힘없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가키타니 선생은 느림보 거북이, 사카이 선생은 자벌레, 오토모 씨는 뚱뚱한 타조. 겨우 기류 선생을 따라가던 건 호시노 씨던가? 이전 담당 간호사 아가씨죠. 그 간호사의 솜씨는 경쾌하고 날렵하더군."-285-286쪽

맥이 탁 빠졌다. 가키타니는 기류에게 조교수 자리를 빼앗겼기 때문에 몰래 수술 사망을 일으켜 기류의 발목을 잡으려 했다고 생각해도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가키타니에게는 사소하지만 동기는 있다. 겨우 그런 일 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를까, 하는 상식론에는 나도 동의하고 싶지만 원래 살인이란 것은 대개 상식을 크게 벗어난 곳에서 일어난다. 상식론이란 흔히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을 때가 있다. 사소하다 하여 이런 동기를 제외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무시하고 깔보는 게 아닐까?-308쪽

말은 윤곽을 다듬는다. 사람은 자신의 말로 스스로를 다듬는다. 스스로를 자신의 말 속에 가두고 천천히 질식해 간다. 히무로는 그게 싫어 말 자체를 다듬었다. 말을 줄였다. 최소한의 말로 사실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사람의 마음을 옭아맸다.
의사도 망가질 것이다.
멋지다. 히무로는 단 한마디로 세상을 자신의 빛깔로 물들여 버렸다.-4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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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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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오루는 왠지 마음이 이상해졌다. 당연한 것처럼 했던 것들이 어느 날을 경계로 당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행위와 두 번 다시 발을 딛지 않을 장소가, 어느 틈엔가 자신의 뒤에 쌓여가는 것이다. 졸업이 가깝구나, 하는 것을 그는 이순간 처음으로 실감했다.-19쪽

사카키 안나. 그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가까이 없으면, 잊혀지는구나. 잊혀진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가까이 있으면 그 존재는 싫어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41-42쪽

몸을 움직이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걷는 것은 좋아했다. 이런 식으로 차가 없고 경치가 멋진 곳을 한가로이 걷는 것은 기분 좋다. 머릿속이 텅 비어지고, 여러 가지 기억과 감정이 떠오르는 것을 붙들어두지 않고 방치하고 있었더니 마음이 해방되어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59-60쪽

일상생활은 의외로 세세한 스케줄로 구분되어 있어 잡념이 끼어들지 않도록 되어 있다. 벨이 울리고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내린다. 이를 닦는다. 식사를 한다. 어느 것이나 익숙해져 버리면 깊이 생각할 것 없이 반사적으로 할 수 있다.
오히려 장시간 연속하여 사고를 계속할 기회를 의식적으로 배제하도록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신의 생활에 의문을 느끼게 되며, 일단 의문을 느끼면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래서 시간을 촘촘히 구분하여 다양한 의식을 채워 넣는 것이다. 그러면 의식은 언제나 자주 바뀌어가며 쓸데없는 사고가 들어갈 여지가 없어진다.-60쪽

아냐. 기억해 주지 않아도 돼. 잊어도 돼.
도오루는 이상한 듯이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몰랐던 것이다.
어째서?
도오루가 되묻자 안나는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가까이 없으니 잊혀지는 건 당연하잖아.
그 어조가 진지한 것을 느끼고, 도오루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녀의 온화한 표정은 변함없다.
무의식중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잊혀진다면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건 고통스럽지 않아?
나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안나는 명쾌하게 대답했다.
나도, 남에게 지킬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는 부탁은 하지 않고, 남의 기억에 기대지도 않아. 그러나 나는 기억하고 있을 거야. 나의 기억은 나만의 것. 그걸로 됐어.
그렇게 말하며, 조그맣게 손을 흔들며 떠나간 소녀.-72-73쪽

겉보기의 반응과 알맹이의 속도. 아까 치아키가 한 말을 떠올린다.
어째서 늘 이렇까. 항상 나중에 생각이 난다. 언제나 나중에 감정이 쫓아온다. 역시 나는 단순한 바보인 걸까. 남자들이 나를 두고 쿨하다느니 여유롭다느니 평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스스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사실은 그저 멍청하고 무능한 아이라는 것이 드러나 버릴까봐 무서울 뿐이다. 그리고 도오루는 유일하게 그것을 간파한 인간이다. 그는 나의 정체를 알고 있다. 미와코도 치아키도 리카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도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92쪽

"아냐.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이 어른의 부드러움인걸. 뺄셈의 부드러움이랄까." (중략)
"대체로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의 부드러움이란 건 플러스 부드러움이잖아. 뭔가 해준다거나 문자 그대로 뭔가 준다거나. 그러나 너희들 경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주는 부드러움이야. 그런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그런가."-196쪽

나는 포기하고 있다. 달아나고 있다. 타인에게 부정되거나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이 두려워서 처음부터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누구도 용서 따위 하지 않았으며 용서할 생각도 없다. 그야말로 지금 이곳을 걷고 있는 누구보다 오들오들 떨며 번들번들거리고 있는 것이다. -221쪽

"아마 그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우리 무척 교만했다고 생각하는데, 서로 우리 커플은 환상적이라고 믿었어. 물론 그는 멋있었고 좋은 점도 많아 거기에 끌렸지만, 우린 좋은 점이 많은 멋진 상대에게 걸맞는 자신을 자화자찬하고 있었을 뿐이야. 우리 정말 멋지지, 하고 함께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을 뿐이라고."
그녀의 솔직함에는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잔혹함이라고 할 정도의 솔직함에 다카코는 기가 질렸다.
"서로 작년쯤부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은 했지만, 올해 들어 확실히 그걸 자각한 거지. 그러고 나니 둘 다 그걸 견딜 수 없게 된 거야."-267-268쪽

"그렇지만 말이야, 사랑을 사랑하는 건 가능하지 않니? 나 그것조차도 못 했어. 그 애와 1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후 줄곧 이게 연애다, 나는 연애를 하고 있다, 하고 세뇌하고 있었는걸."
"음, 사치스런 고민이랄까, 뭐랄까."
문득 치아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도다 시노부에게 고백할 마음은 없다고 한 치아키. 그렇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는 것만으로 좋다고 한 치아키.
대체 어디까지가 사랑을 사랑하고, 어디서부터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무엇일까.
"외로워."
미와코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주에 그 애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외로웠어. 2년동안이나 시간을 공유해 왔으니까. 그런데 더 외로웠던 것은 오히려 후련하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는 거야. 결국 그 아이가 아니어도 상관없었던 거라는 걸, 확실히 인정해 버린 거지."
미와ㅏ코는 보기 드물게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분노일까, 후회일까. 뭔가 패배감 같은 것이 그녀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도 사랑이었지 않을까."
다카코는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269쪽

어제부터 걸어온 길의 대부분도 앞으로 두 번 다시 걸을 일 없는 길, 걸을 일 없는 곳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앞으로 얼마만큼 '평생에 한 번'을 되풀이해 갈까. 대체 얼마만큼 두 번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만나는 걸까. 어쩐지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287쪽

하지만 옳은 것은 그들이었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누구보다도 빨리 달려 어른이 되려고 했던 자신이, 제일 어렸다.
그리고 그들은 도오루보다 훨씬 관대했다. 혼자서 강한 척하는 도오루를 그들은 사랑해 주었다. 언제나 떠나지 않고 곁에 있어주었다.-3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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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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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명의 참된 어부들' 회원들이 연례 만찬을 가졌던 버논 호텔은 과두 정치 사회에서나 존재할 법한, 깍듯한 매너를 철저하게 지키는 곳이었다. 소위 '조건식' 사업 방식을 택하는 특이한 곳이었는데, 그들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찾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냄으로써 이익을 확장해나갔다. 금권 정치의 심장부에 있다보면 사업가들은 고객들보다 더욱 까다로워진다. 그들은 보다 까다로운 조건들을 만들어냄으로써, 안달이 난 돈 많은 손님들이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데 돈을 쓰고 외교적 수완을 부리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만일 런던에 키가 180센티미터 미만인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일류 호텔이 있다면, 180센티미터가 되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사교 클럽을 만들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 호텔에서 저녁 만찬을 즐길 것이다. 또, 단지 경영자의 변덕으로 목요일 오후에만 문을 여는 고급 식당이 있다면, 목요일 오후 그 식당은 발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붐비게 될 것이다. -97-98쪽

공석에서 그는 처신을 아주 잘 했고, 그의 처세 원칙은 다분히 단순했다. 농담이 생각나면 농담을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가 영리하다고 했다. 농담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는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쓸 때가 아니라며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그를 수완가라 했다. 자신이 속한 계급의 동료들과 함께 클럽에 있는 경우와 같은 사석에서는 아주 유쾌할 정도로 솔직했고 개구쟁이 어린 학생처럼 철이 없었다. 다만 정치 경험이 없는 터라, 정치를 좀 심각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때로는 자유당과 보수당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암시적인 말을 해서 모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 적도 있었다. 사생활 측면에서 본다면 체스터 공작은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옛날 정치가들처럼 옷깃 뒤로 회색 머리를 구불구불하게 말아 늘어뜨리고 다녔다. 그래서 뒤에서 보면 마치 제국이 원하는 인간형처럼 보였고 앞에서 보면 소심하고 제멋대로인 독신자처럼 보였는데, 실제로도 그게 맞았다.-113쪽

"신부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플랑보가, 거의 내지 않는 순진하고 무거운 음성으로 신부를 불렀다.
"자야지! 잠을 자게나. 이제 우리는 막다른 곳에 이르렀네. 잠이 무엇인지 아나? 잠자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신을 믿는다는 것을 알고 있냐는 말일세. 잠은 성찬식일세. 왜냐하면, 잠을 자는 것은 신념의 행위일 뿐 아니라 식량이기 때문이지. 우리는 성찬식이 필요하네, 자연스러운 것이기만 하다면 말일세. 인간에게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지. 아마도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최악의 것이지."
브라운 신부가 큰 소리로 대답했다.
크레이븐 경감은 이렇게 말하고 그의 벌어졌던 입을 다물었다.
신부는 고개를 돌려 성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진실을 알아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다."-217-272쪽

"신부님, 제가 한때는 범죄자였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범죄자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권은 항상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바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주로 기다려야만 하는 이 탐정 노릇은 저의 프랑스인다운 성급한 성격과 너무나 맞지 않는단 말씀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좋은 일이건 그른 일이건 생각하는 즉시 실행에 옮겨왔으니까요. 결투를 해야 한다면, 다음날 아침이라도 바로 결투를 했고, 계산은 즉석에서 현금으로 지불했고 치과의사를 만나는 일도 미루는 법이……."-2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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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타의 매 Mr. Know 세계문학 44
대실 해밋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8월
품절


플릿크래프트는 훌륭한 시민이자 좋은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변 환경에 맞추어 사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주변 사람들도 그와 같았다. 그가 아는 인생은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철제 빔의 추락이 인생은 본래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훌륭한 시민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도 사무실에서 식당에 가다가 떨어지는 빔에 맞아 즉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찾아오며, 사람은 눈먼 운명이 허락하는 동안만 목숨을 부지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런 운명의 불공평함이 아니었다. 최초의 충격이 지난 뒤 그 점은 받아들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영위해 온 정연한 일상이라는 게 인생 본래의 길이 아니라 인생을 벗어난 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철제 빔이 추락한 장소에서 5미터도 가기 전에 이 새로운 발견에 따라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다시 평화를 되찾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마쳤을 때 변화의 방법을 찾았다. (이어서)-85-86쪽

(이어서) 인생은 난데 없는 빔의 추락으로 그 자리에서 끝날 수도 있으니 그 자신도 난데없이 살던 곳을 떠나서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남들만큼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정도 재산을 남겨주고 떠나면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고, 그의 가족애는 결별을 못 견딜 만큼 남다른 것이 아니었다. -86쪽

"(전략) 그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자신이 결국 타코마에 두고 떠난 것과 똑같은 생활로 빠져 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건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철제 빔 사건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에 인생을 맞춘 거죠."-86쪽

"아주 훌륭해요, 선생. 정말 훌륭해. 나는 자신을 위해 일한다고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믿지 않소. 그리고 진실이 아니라면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가장 믿지 않소. 그런 사람은 바보인데다 또 자연 법칙을 거역하는 바보이니 말이오."-140-141쪽

"나를 죽이면 새는 어떻게 찾을 겁니까? 새를 손에 넣을 때까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나를 협박해서 새를 받겠다는 생각을 하는 겁니까?"-238쪽

"기가 막히는군요! 물건 훔치는 것 이번이 처음입니까? 어찌나 선량들 하신지요! 다음에는 무얼 할 생각입니까? 무릎 꿇고 기도라도 할 겁니까?"-245쪽

(옮긴이의 말) 플릿크래프트 이야기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어떤 조화나 섭리에 기대기보다 자기 확신과 상황에 따른 실존적 결단을 통해, 그리고 정서적 애착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사람의 우화가 된다. 이것은 작품의 마지막 장에서 스페이드가 오쇼네시에게 보여주는 태도의 복선이 되기도 한다.-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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