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구판절판


게다가 이 강도 살인의 피해자는 한 명이었다. 요새 같으면 분명 사형이 아니다. 컬트 집단의 테러 행위에 가담하여 무차별하게 12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자가, 자수가 인정되어 무기 판결을 받은 것은 아직 기억에 생생한 일이다. 왜 이 남자는 사형이 아니고, 50년 전 여성 피고인에게는 사형 판결이 내려졌을까? 형법이 그 강제력으로 지키려는 정의는 어쩌면 불공정한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지닌 참사관이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정의라는 이름하에 심판하려 할 때 그 정의에는 보편적인 기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111쪽

아무리 아들을 잃었어도 남겨진 아버지에게는 지켜야 할 생활이 있는 것이다. 매일 세 차례씩 먹고, 싸고, 자는 것. 지인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노동으로 수입을 얻어야 한다.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바닷가의 단독 주택에 사는 우츠기 내외나 준이치의 부모도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을 되풀이해 왔을 것이다. 이따금 밀려오는 힘든 기억에 일손을 놓고 아무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며.
준이치는 애절함을 느꼈다.
사무라 미츠오에게 왜 좀 더 성의를 다해 사과하지 못했는지 후회되었다.
범죄는 눈에 보이는 형태로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침투하여 그 토대를 들어내는 것이다.-131쪽

"자, 보라고. 이건 양자 택일이야. 지금 우리 눈앞에서 두 사람이 물에 빠졌어. 한 명은 죄없는 사형수, 또 한쪽은 강도 살인범이야.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나?"
준이티는 머릿속에 그 답을 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범죄자의 목숨은 범한 죄의 무게와 반비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고 준이치의 등에 차가운 것이 지나갔다. 상해 치사죄를 범한 자신의 목숨은 그만큼 가벼워진 것일까.-156쪽

그러한 일련의 관찰에서 난고가 얻은 결론은 사형수가 죄를 참회했다 해도, 이는 사형 판결을 받았기에 일어나는 결과라는 것이었다. 즉 응보형 사상이 지지하는 사형 판결에 의해 목적형 사상의 목표인 회오의 정(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침)을 유인해 냈다는 공교로운 현상 말이다.
그리고 지금 160번의 종교적 지도에 관한 내용을 접하며 난고는 또 하나의 얄궂은 감개를 느꼈다. 종교 지도에서 보이는 태도는 사형 확정수의 심적 안정을 측정하는 기준이며, 이는 형 집행시기의 결정 요인이 된다. 종교 지도자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의 안식을 얻은 자일수록 빨리 처형당하고 마는 것이다.-184쪽

'나는 안 했어…….'
목숨을 구걸하는 470번 목에 밧줄을 건 행위는 그래도 옳았노라고 난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 160번의 경우는 어떨까. 감형을 호소하는 유족의 편지가 말해 주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천편일률적인 법제도로 심판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하다는 사실이었다. -187-188쪽

난고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얄궂은 미소를 띠었다. 같은 해에 체포된 사카키바라 료가 이미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이 오하라는 아직 확정도 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의 재판 제도가 지닌 문제였다. 사형에 해당하는 사건을 범한 경우,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을 죽인 쪽이 심의 과정이 지체되면서 오래 살 수 있다.-215쪽

형사 머릿속에서 위험 신호가 점멸했다. 큰일났다 싶어서, 형사가 물었다.
"당신 누구요?"
상대방이 대답했다.
"난고 쇼지의 쌍둥이 형, 쇼이치입니다."
"이런 데서 뭘 하시나요?"
"저만 대학에 갔거든요."
난고 쇼이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동생에게 빚을 갚으려고요."-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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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구판절판


누나가 창밖을 내다보면서 투덜거린다. 누나는 어머니와 겨울옷을 사러 가기로 했던 것이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었는지, 계속 기분이 언짢다. 미즈노 리세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을 보고, 소년은 누나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나는 외모는 괜찮은데 너무 기분파다. 밖에서는 꽤나 생글거리면서 사람들에게 애교를 부리지만, 가족에게는 마구 화풀이를 해댄다. 남자들에게는 제법 인기가 있는 것 같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 남자들도 누나가 집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모두 환멸을 느끼지 않을까.-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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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6월
구판절판


"그만큼 범인이 영악하게 움직였다는 얘기인가. 근데 그렇게 영악한 사람이 범행 장소는 상당히 경솔하게 택했단 말이야. 이런 좁은 곳에서 사람을 죽였으니 발레단 관계자 말고는 용의자가 없다는 걸 광고하는 셈이잖아. 그렇지?" 도미이의 말에 몇몇 수사관이 동의했다. 한정된 공간과 한정된 사람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분명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타당한 일이었다. 하지만 가가는 범인이 경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도미이는 발레계가 얼마나 폐쇄된 세계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범인은 자신과 가지타가 관련된 다양한 기회에 대해 충분히 검토한 끝에 공간적으로나 인간관계 면에서나 가장 넓은 곳이라고 생각해서 이번 장소를 선택한 게 틀림없었다.-110쪽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잠을 자다니……." 미오가 그 남자를 보며 말하자, "저것도 나름대로 아주 기분 좋은 일이에요."라고 가가는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말했다. "저 사람은 술에 취해 푹 자기 위해서 야구장을 찾은 거예요. 시합 같은 건 아무려나 상관없죠. 어쩌다 눈을 떴을 때 야구를 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그게 뭐가 재미있어요?" "재미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스트레스 해소는 되겠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기 위해 야구장에 와요. 큰 소리로 야유도 하고 응원도 하는 게 스트레스 해소에 큰 도움이 되거든요. 야구장이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건 그만큼 스트레스가 쌓인 사람이 많다는 얘기겠지요?" "그런 사람은 발레는 안 볼까요?" "음, 아마 안 볼겁니다"라고 가가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발레를 즐기는 건 정신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의 국민은 그중 어느 쪽도 아니에요. 다들 지칠 대로 지쳐 있다고 할까." "어째서 그렇게 지친 걸까요?" (이어서)-149-150쪽

(이어서) "사회 구조가 그렇기 때문이에요. 기계체조 같은 데서 인간 피라미드를 만들죠? 그럴 때 가장 괴로운 건 가장 아랫단에 있는 사람들입니다."-150쪽

"꿈을 품은 사람에게는 그 힌트가 무한대로 널려 있는 도시예요. 그래서 그걸 모조리 흡수하고 가져오고 싶은데, 그게 도무지 안 되는 거예요. 사막을 청소기로 깨끗이 청소하려는 식이죠. 결국 저마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뭔가 꿈을 이루고 싶다, 라구요. 그러면 별다른 꿈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곳인가. 인간은 반드시 꿈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압박감 따위는 말끔히 잊게 해주는 도시예요. 날마다 새로운 자극을 누릴 수 있죠. 그런 사람은 그 나름대로 생각해요. 계속 여기서 살고 싶다, 라구요." (중략) "근데 당신은 왜 일본에 돌아왔어요?" 그러자 그는 몹시 씁쓸한 뭔가를 입에 넣은 듯한 얼굴이 되었다. 힌트는 무수하게 널려 있죠. 하나에서 열까지 죄다 힌트예요. 하지만 답을 찾아낼 수가 없어요. 그걸 깨달으면 문득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요. 그래서 돌아왔어요. 지금 마침 그런 시기였다는 얘기죠. 이러다가도 조금 지나면 다시 뭔가를 알듯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다시 힌트를 찾아 뉴욕행 비행기를 탑니다. 네, 그게 자꾸 반복되는 거예요."-72쪽

"당연하죠. 댄서는 그런 짓은 안 해요. 아니, 못하죠. 드라마 같은 데서 프리마 자리를 노리고 상대를 함정에 빠뜨린다는 촌스러운 스토리가 자주 나오죠? 근데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요. 댄서라는 건 춤에 대해서는 결벽증이 있고, 타인과의 실력 차를 객관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법이에요.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밀어내고 자신이 춤을 춘다는 건 본능적으로 못해요. 그 역할을 갖고 싶을 때는 실력으로 겨룬다, 그것밖에 없지.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생존경쟁이 엄격한 세계라구요."-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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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블루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5월
구판절판


비디오가 시작되고 바로 야에코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걸 나는 알아챘다. 바로 눈앞에 과거를 보여줄 수 있는 문명의 이기는 어쩌면 참으로 잔인한 칼날인지도 모른다. 나는 때때로 생각하길, 인간의 발명품 가운데 절반은 그 나머지 절반이 원인이 되어 일으킨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다. 과거를 본다. 마음이 산란하여 잠을 잘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신경안정제의 도움을 받는다. -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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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풀
에토 모리 지음, 이송희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4년 2월
구판절판


"기다려, 어이.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식으로 단정짓지 말라는 거야. 모두들 내성적이고 얌전한 마코토라고 말하는 게 진짜 마코토라고 단언할 순 없어. 어쩌면 주위 사람들이 제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그런 이미지에 마코토를 얽어맸던 것인지도 모르지. 그와 마찬가지로 너도 전생에서 흉악범이었다는 식으로 너무 스스로를 단정짓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잘못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 법이니까 말이지." -79쪽

사노 쇼코에 대한 자문 자답. 나는 쇼코의 꿈을 깨뜨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모르겠어. 쇼코가 꿈꾸는 고바야시 마코토 역할을 연기해 주는 편이 나았을까? 그렇게는 할 수 없지. 그렇다 치더라도 왜 쇼코는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마코토를 미화시켜 버렸을까? 사랑은 맹목이니까. 사랑? 쇼코는 마코토를 사랑했던 걸까? 마코토의 안중에도 없었던 사노 쇼코가? 아니야, 설령 그랬다 치더라도 쇼코가 사랑한 것은 극단적으로 미화된 고바야시 마코토였어. 현실 속의 마코토를 무시한, 가공의, 제멋대로의 사랑. 어쨌거나 쇼코 역시 언젠가는 알게 되었을거야. 그렇게 아름다운 열네 살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도 모두들, 아름답지 않더라도, 비참하더라도, 꾀죄죄하더라도, 열심히들 살고 있건만……. -123쪽

마지막으로 나는, 네 내면에 존재하는 평범한 부분과 비범한 부분을 둘 다 진심으로 사랑한단다. 엄마가.-132쪽

"엄만 사실은 아직도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와서는 이미 나 스스로도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그래도 무엇인가를 계속 찾아보려는 마음을 지울 수 없으니 말이야. 정말 나 자신이 싫어져. 욕심이 많다고 해야 하는 건지, 집념이 강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반성은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게 엄마의 문제점이었다. "욕심이 많은 것도, 집념이 강한 것도 아니고." 하고 나는 이 기회에 전부터 은밀히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해 주었다. "그건 대단한 게 아니라 엄마는 그냥 단순히 싫증을 잘 내는 것뿐이야." "뭐?" 엄마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200쪽

지난번에 쇼코에게 심한 말을 퍼부은 것이 이제 와서 후회가 되었다. 쇼코에게 마코토는 가공의 존재 같은 게 아니었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어떻게든 살아가기 쉽게 하기 위한 가이드 비슷한 존재였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마코토의 상처에 지나치게 얽매이느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상처에 대해서는 무심했던 것이 부끄러웠다. 마코토뿐만이 아니다. 쇼코뿐만도, 히로카뿐만도 아니다. 이런 힘든 세상에서는 분명 누구나 다 동등하게 상처입은 이들인 것이다.-222쪽

나는 눈꺼풀 안쪽에,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를 그려 보았다. 때로는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컬러풀한 저 세계. 그 극채색 소용돌이로 돌아가자. 거기서 모두와 더불어 온통 색깔투성이가 되어 살아가자. 설령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하더라도……. -240-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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