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기의 끝 그리폰 북스 18
아서 C. 클라크 지음, 정영목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구판절판


스톰그렌은 책상으로 다가가, 그의 유명한 우라늄 문진을 만지작거렸다. 초조한 건 아니었다. 단지 결심이 안 서고 있을 뿐이었다. 웨인라이트가 늦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회견이 시작될 때 스톰그렌이 도의적으로 약간 우월한 입장에 설 수 있을 테니까. 논리와 이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하는 일에서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더 큰 작용을 하는 법이었다.-20쪽

스톰그렌은 한숨을 쉬었다. 전에도 수백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스톰그렌은 자유연맹이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을 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톰그렌은 캐렐런을 믿었고, 이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였고, 스톰그렌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유연맹 쪽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23-24쪽

따라서 인간은 아직도 자신의 행성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지구는 1세기 전에 비해 훨씬 발전했지만,행성 자체는 더 비좁아졌다. 오버로드들이 전쟁과 기아와 질병을 없애버렸을 때, 그들은 동시에 모험도 파괴해버린 것이다. -14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의 해석
제드 러벤펠드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07년 2월
품절


아버지라면 이 모든 게 헛된 짓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햄릿을 위해서라니.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은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가장 현실적이지 못한 것을 가장 좋아하게 마련이다. 의학은 내게 현실을 상징했다. 의대에 가기 전에 내가 했던 일들은 현시로가 거리가 멀었고, 모든 게 놀이였다. 그래서 아버지들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당신의 아들들에게 현실의 세상을 열어주기 위해서.
전이도 마찬가지다. 환자는 가장 격렬한 감정적인 천성을 가진 의사에게 애착심을 갖는다. 여자 환자는 의사를 위해 울어줄 것이다. 자기를 바치려 하고, 그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허구이며 망상이다. 현실에서 환자의 감정은 의사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의사는 방향을 적절히 돌려 환자가 가진 폭력적이고도 심란한 감정을 투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다. 분석가가 행할 수 있는 가장 역겨운 실수는 유혹이든 증오든, 이 인공적인 감정을 현실로 오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액튼 양의 방으로 난 복도를 걸어가면서 마음을 단단히 다졌다.-115쪽

"시기심은 여성의 정신적인 삶에 큰 활력을 주는 게 분명합니다, 밴월 부인." 프로이트가 말했다. "그래서 여성은 정의감이 별로 없는 것이지요."
"남자들은 시기하지 않나요?" 클라라가 물었다.
"남자들은 야심이 있죠. 남자들의 시기심은 주로 거기서 나옵니다. 반면, 여자들의 시기심은 언제나 성애적이죠. 둘의 차이점을 백일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백일몽을 꾸죠. 하지만 남자들은 두 종류가 있어요. 성애적인 것과 야심적인 것. 여자들의 백일몽은 전적으로 성애적이죠."
"저는 절대로 안 그래요." 코감기가 있다는 통통한 부인이 단언했다.-288쪽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진짜지만, 그 모든 서술부의 주어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였다. 아이가 자라남에 따라 콤플렉스는 더 심해진다. 딸은 곧 어머니가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젊음과 미모를 갖추고 대적하게 된다. 아들은 결국 아버지를 따라잡게 되고, 아들이 커감에 따라 아버지는 자신을 밟고 지나가는 세대교체의 거센 물결을 실감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놓고 말하겠는가?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질투한다고 인정하겠는가? 그러므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이들에게 투영된다.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귀에 들리는 목소리는, 바로 자신이 아들에게 은밀한 살해 욕망을 품은 게 아니라, 오이디푸스가 어머니를 갈망하고 아버지의 죽음 꾀하고 있다고 속삭인다. 이 질투가 더 강렬해질수록 부모는 아이에게 대항해 더 파괴적으로 행동하게 되고, 결국 아이들이 자신들을 적으로 보고 달려들게끔 만든다. 그들이 두려워하던 상황이 이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오이디푸스 자체가 그렇게 하도록 가르친다. 프로이트 박사는 오이디푸스를 오독했다. 오이디푸스의 욕망은 아이의 마음속이 아니라 부모의 마음속에 있었다.-47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 꿈을 품은 모든 여자가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는 법
이지성 지음 / 다산북스 / 2012년 3월
절판


철학 고전 4단계 독서법
1. 먼저 철학 고전 저자에 관해 쉽게 설명한 책을 읽는다.
2. 철학 고전을 통독한다.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그냥 읽는다. 소리 내어 읽으면 더욱 좋다.
3. 정독을 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는다. 특히 이해가 잘되지 않는 부분은 크게 소리 내어 읽을 것을 권한다.
4. 노트에 중요 구문 위주로 필사를 하면서 통독한다. 필사는 철학 고전 독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필사를 통해 철학 고전 저자의 사고 능력을 조금이나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필사를 하면, 몇 번이고 정독을 할 때도 이해 불가능하던 구절들이 한순간에 이해될 수 있다.-184쪽

힐러리의 독서법: 존 스튜어트 밀 식 독서법(철학고전독서)+소원칙
1. 텔레비전을 볼 시간에 책을 읽는다.
2. 책을 읽고 나면 토론을 한다.
3. 저자와 직접 만나는 기회를 자주 갖는다.
4. 10대 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5. 하나의 사건에 관련한 모든 입장을 알려고 노력한다.-170쪽

힐러리의 글쓰기 노하우
1. 작게 시작하라.
2. 양으로 승부하라.
3. 정기적으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라.
4. 자신의 생각을, 발로 뛰어서 쓰라.
5. 글쓰기 자료 수첩을 만들어라.-21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실제로 사귄다는 것은 곧 동경하던 대상이 자기가 있는 곳까지 내려온다는 뜻이다. 그것은 근사한 체험이지만, 동시에 환멸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눈높이에 서는 것을 환영해 마땅한 상황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환멸이 더 컸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자기본위적이고 불쾌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본심이었다.-78쪽

비밀주의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남에게 할 마음이 들지 않을 뿐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려니와 에너지도 든다. 터놓고 이야기한다는 게 나는 옛날부터 싫었다. 게다가 나의 사생활 따위 남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끝도 없이 제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일종의 재주와 서비스가 되는 사람도 간혹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타인의 시간을 폭력적으로 빼앗는 것에 부로가하다.-104쪽

그러고 보면 고해 시스템은 위대하고, 신은 역시 위대하다. 고백한 사람은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 해도 마음이 편해지게 마련이다. 힘든 것은 고백을 듣는 쪽, 고백을 받아들이는 쪽이다. 모든 사람의 고해를 들어주는 신은 잔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대할지도 모른다. -115-116쪽

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오만하다. 사랑하는 쪽이 자기를 갂아서 사랑을 쏟는 것을 모른다. 사람은 호의에는 민감하지만 사랑받고 있는 건 눈치 채지 못한다.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고독하다. 사랑한다는 해우이만으로 벅차서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49-150쪽

직장인의 습성대로, 뇌가 각성하지 않았는데도 숨골의 반사만 가지고 몸이 멋대로 준비를 한다.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컴컴하니 눈이 떠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생체시계 센서는 무릎 뒤쪽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태양광선을 무릎 뒤쪽에 비추면 몸은 아침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156쪽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도 해보지 않는다. 분명히 이제는 하늘을 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총으로 쏴서 떨어뜨리려 할 것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을 위협으로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돈벌이에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 새로운 부자유도 따라온다. -185쪽

생각해 내고 싶은데 생각나지 않으면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가 없다. 목구멍에서 나올락 말락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인데도 다른 사람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든지, 밤중에 자료를 죄다 끌어내서 뒤진다든지 한다. 과거에 유행했던 가요라든지, 아이돌 이름이라든지, 생각나지 않으면 괜히 분하다. 생각났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금세 흥미를 잃는데도.-223-224쪽

하지만 어쩌면 소녀들의 직감 쪽이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며 몇 번이고 같은 사람을 만나는지도 모른다. 물이 순환하는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것이 속속 생겨나기보다 생명도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 편이 훨씬 낫다. 그 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가슴속으로 그런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믿자. 지금 잃으려고 하는 것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263-26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과 다의 환상 - 상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구판절판


"분명 다들 그럴 테지. 어렸을 때부터 자기한테는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날이 어느새 코앞에 와 있어. 그런데도 죽는 순간까지 아직 멀었다, 아직 나한테 그날이 올리가 없다, 하고 생각할 테지."-25쪽

여행.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아름다운 경치도 보고 싶고, 술 마시고 그 자리에 큰 대자로 뻗어 쿨쿨 자고 싶다. 그것은 당연한 욕구다. 하지만 그뿐일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비일상'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비일상'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의 일상, 평소에는 볼 일이 없는 타인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법. 평소에는 환기되지 않는 기억을 찾아 우리는 여행을 한다. '자기 자신을 다시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모두 내가 싫어하는 말이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과거를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34-35쪽

그렇게 몇 년씩이나 기억 속에서 그리고 또 드렸던 얼굴이 눈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비난에 비난을 거듭하고,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욕을 퍼부었던 상대가 지금 저기에,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그 막대한 시간은, 흘린 눈물은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의 어느 부분인가가 죽어버린 것이다. 아마 누구나 이런 식으로 마음속 아픈 부분을 괴사시켜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는 했어도 나의 마음은 정보를 원했다. 그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어떤 기분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의 주의는 그를 향해 있었다.-40쪽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역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걸 마키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가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거나, 그를 불쌍하게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내가 단 한순간이라도 그와 다시 합칠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여겨질 게 싫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와 그가 대등한 입장에 있었건만, 이 정보는 내게 부담을 주고, 내 정서를 불안정하게 했다. 사람 마음의 균형이란 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무한 것인가.-42쪽

질투가 조금씩 마음을 좀먹어, 그전까지 자신의 장점이었던 부드렁누 부분이 쭈글쭈글해졌다. 그런 자신이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작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더욱 기분을 비참하게 했다. 다람지 쳇바퀴 돌듯, 울어도 화를 내도 자기라는 감정의 우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짧은 문장을 인정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아니, 지금도 어쩌면 인정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나긴 나의 세월도 그에게는 이미 전혀 관계없는 시간인 것이다.-88쪽

"하긴 최근에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사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고, 웃음을 뿌리고 다니면서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하잖아. 직장에 있으면 수시로 전화 받아야지, 말끝마다 설명하라고 하지. 집에서도 허구헌 날 무슨 생각이냐, 어떻게 된 거냐, 설명하라고 하고 말이야."
끝부분에는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99-100쪽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걸까.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자기혐오에 몸부림치는 것도 자손의 번영을 위해서일까. 문득 허무감이 느껴졌다. (중략)
"암, 그렇지. 남자와 여자는 더 나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 상대의 자질을 확인하려고 매일 싸우는 거야. 문자 그대로 연애는 전투. 날마다 진지하게 전투를 벌여서 '붉은 여왕 가설'을 입증하는 거지. 남녀가 서로 완전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버리면 안 돼.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 미묘하게 평행선을 그리는 부분이 있어야 하지. 왜냐하면 우리에겐 해피엔드가 허락되지 않으니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것 갖고는 살아남을 수 없어. 늘 현상에 의문을 품고 장래에 불안을 느끼는 상태가 생물 본연의 모습인 거야."-112-113쪽

먼 길을 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어른이 된다는 걸가. 과거에는 입에 올리기조차, 생각하기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118쪽

지금 두 사람이 한 이야기가 두 사람이 파국을 맞이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닮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닮은 부분에 공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렇게 하는 생각이 비슷할까 감동한다. 그러나 이심전심은 이윽고 공허가 되고, 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된다. 닮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결점도 거울 속의 상처럼 그대로 자기 결점이 된다. 그것은 자기혐오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똑같은 부분이 결여된 두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여된 부분을 서로 보완해 줄 수 없다.-264쪽

"하하하. 그거 좋다. 철벽의 알리바이를 깨드려라! 외딴 섬과 도쿄를 잇는 비밀의 점과 선!"
내 생각에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행위다. 동행한 사람과 사회적 유대를 확인하는 행위. 그것이야 말로 증거 만들기, 알리바이 만들기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이만큼 스스럼 없고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는 동행일 경우에는 그럴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도 되는 여행. 여행 그 자체를 즐기고, 그곳에 갔다는 기억만이 몸속에 남는 여행.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행은 그 운 좋은 여행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빛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충족감을 맛본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 편이 좋은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문득 싸늘한 감촉과 함께 마음속에 떠올랐다.
끝난 순간 즉시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여행. 기억하지 않는 편이 좋은 여행. 이것은 그런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27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