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다의 환상 - 하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12월
절판


그러나 당연한 일이지만, 실제로 사귄다는 것은 곧 동경하던 대상이 자기가 있는 곳까지 내려온다는 뜻이다. 그것은 근사한 체험이지만, 동시에 환멸이기도 하다.
사람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자기와 같은 눈높이에 서는 것을 환영해 마땅한 상황으로 생각하고, 상대방이 자기 것이 되었다는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는 환멸이 더 컸다.
그녀 입장에서 보자면 더할 나위 없이 자기본위적이고 불쾌한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본심이었다.-78쪽

비밀주의자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사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고.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자기 이야기를 남에게 할 마음이 들지 않을 뿐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는 데는 위험이 따르려니와 에너지도 든다. 터놓고 이야기한다는 게 나는 옛날부터 싫었다. 게다가 나의 사생활 따위 남에게 이야기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끝도 없이 제 이야기만 늘어놓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일종의 재주와 서비스가 되는 사람도 간혹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타인의 시간을 폭력적으로 빼앗는 것에 부로가하다.-104쪽

그러고 보면 고해 시스템은 위대하고, 신은 역시 위대하다. 고백한 사람은 그것이 어떤 내용이라 해도 마음이 편해지게 마련이다. 힘든 것은 고백을 듣는 쪽, 고백을 받아들이는 쪽이다. 모든 사람의 고해를 들어주는 신은 잔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대할지도 모른다. -115-116쪽

사랑받는 사람은 언제나 오만하다. 사랑하는 쪽이 자기를 갂아서 사랑을 쏟는 것을 모른다. 사람은 호의에는 민감하지만 사랑받고 있는 건 눈치 채지 못한다. 그 사랑이 깊으면 깊을수록 상대방에게 도달하지 않게끔 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고독하다. 사랑한다는 해우이만으로 벅차서 그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49-150쪽

직장인의 습성대로, 뇌가 각성하지 않았는데도 숨골의 반사만 가지고 몸이 멋대로 준비를 한다. 그건 그렇지만 이렇게 컴컴하니 눈이 떠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생체시계 센서는 무릎 뒤쪽에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태양광선을 무릎 뒤쪽에 비추면 몸은 아침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156쪽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어렸을 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도 해보지 않는다. 분명히 이제는 하늘을 난다는 것이 그렇게 좋은 일 같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총으로 쏴서 떨어뜨리려 할 것이다. 하늘을 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것을 위협으로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돈벌이에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가 열릴 때, 새로운 부자유도 따라온다. -185쪽

생각해 내고 싶은데 생각나지 않으면 그렇게 신경이 쓰일 수가 없다. 목구멍에서 나올락 말락 하는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인데도 다른 사람에게 전화해서 물어본다든지, 밤중에 자료를 죄다 끌어내서 뒤진다든지 한다. 과거에 유행했던 가요라든지, 아이돌 이름이라든지, 생각나지 않으면 괜히 분하다. 생각났다고 해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금세 흥미를 잃는데도.-223-224쪽

하지만 어쩌면 소녀들의 직감 쪽이 옳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시간을 달리하고 장소를 달리하며 몇 번이고 같은 사람을 만나는지도 모른다. 물이 순환하는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것이 속속 생겨나기보다 생명도 순환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 편이 훨씬 낫다. 그 편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
가슴속으로 그런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믿자. 지금 잃으려고 하는 것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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