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다들 그럴 테지. 어렸을 때부터 자기한테는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날이 어느새 코앞에 와 있어. 그런데도 죽는 순간까지 아직 멀었다, 아직 나한테 그날이 올리가 없다, 하고 생각할 테지."-25쪽
여행. 우리는 왜 여행을 하는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아름다운 경치도 보고 싶고, 술 마시고 그 자리에 큰 대자로 뻗어 쿨쿨 자고 싶다. 그것은 당연한 욕구다. 하지만 그뿐일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비일상'을 원하는 것이다. 물론 '비일상'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평소와는 다른 장소의 일상, 평소에는 볼 일이 없는 타인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엇을 보든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법. 평소에는 환기되지 않는 기억을 찾아 우리는 여행을 한다. '자기 자신을 다시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모두 내가 싫어하는 말이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과거를 되찾기 위해 여행한다.'-34-35쪽
그렇게 몇 년씩이나 기억 속에서 그리고 또 드렸던 얼굴이 눈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비난에 비난을 거듭하고, 어둠을 향해 소리 없이 욕을 퍼부었던 상대가 지금 저기에,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있다. 그 막대한 시간은, 흘린 눈물은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 나의 어느 부분인가가 죽어버린 것이다. 아마 누구나 이런 식으로 마음속 아픈 부분을 괴사시켜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느끼지 않기는 했어도 나의 마음은 정보를 원했다. 그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어떤 기분인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나의 주의는 그를 향해 있었다.-40쪽
하지만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역시 알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알고 있다는 걸 마키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내가 우월감을 느끼고 있다거나, 그를 불쌍하게 생각한다거나, 아니면 내가 단 한순간이라도 그와 다시 합칠 수 있을지 생각한다고 여겨질 게 싫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나와 그가 대등한 입장에 있었건만, 이 정보는 내게 부담을 주고, 내 정서를 불안정하게 했다. 사람 마음의 균형이란 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무한 것인가.-42쪽
질투가 조금씩 마음을 좀먹어, 그전까지 자신의 장점이었던 부드렁누 부분이 쭈글쭈글해졌다. 그런 자신이 자기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작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더욱 기분을 비참하게 했다. 다람지 쳇바퀴 돌듯, 울어도 화를 내도 자기라는 감정의 우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 짧은 문장을 인정하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아니, 지금도 어쩌면 인정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나긴 나의 세월도 그에게는 이미 전혀 관계없는 시간인 것이다.-88쪽
"하긴 최근에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사치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는 늘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고, 웃음을 뿌리고 다니면서 적의가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하잖아. 직장에 있으면 수시로 전화 받아야지, 말끝마다 설명하라고 하지. 집에서도 허구헌 날 무슨 생각이냐, 어떻게 된 거냐, 설명하라고 하고 말이야." 끝부분에는 빈정거림이 섞여 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99-100쪽
그래서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렇게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걸까.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자기혐오에 몸부림치는 것도 자손의 번영을 위해서일까. 문득 허무감이 느껴졌다. (중략) "암, 그렇지. 남자와 여자는 더 나은 자손을 남기기 위해서 상대의 자질을 확인하려고 매일 싸우는 거야. 문자 그대로 연애는 전투. 날마다 진지하게 전투를 벌여서 '붉은 여왕 가설'을 입증하는 거지. 남녀가 서로 완전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여버리면 안 돼.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 미묘하게 평행선을 그리는 부분이 있어야 하지. 왜냐하면 우리에겐 해피엔드가 허락되지 않으니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는 것 갖고는 살아남을 수 없어. 늘 현상에 의문을 품고 장래에 불안을 느끼는 상태가 생물 본연의 모습인 거야."-112-113쪽
먼 길을 왔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게 어른이 된다는 걸가. 과거에는 입에 올리기조차, 생각하기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118쪽
지금 두 사람이 한 이야기가 두 사람이 파국을 맞이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이 닮은 두 사람은 자신들의 닮은 부분에 공감을 느낀다. 어째서 이렇게 하는 생각이 비슷할까 감동한다. 그러나 이심전심은 이윽고 공허가 되고, 커뮤니케이션의 부재가 된다. 닮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결점도 거울 속의 상처럼 그대로 자기 결점이 된다. 그것은 자기혐오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상대방에 대한 증오로 이어진다. 똑같은 부분이 결여된 두 사람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여된 부분을 서로 보완해 줄 수 없다.-264쪽
"하하하. 그거 좋다. 철벽의 알리바이를 깨드려라! 외딴 섬과 도쿄를 잇는 비밀의 점과 선!" 내 생각에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회적인 행위다. 동행한 사람과 사회적 유대를 확인하는 행위. 그것이야 말로 증거 만들기, 알리바이 만들기다.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이만큼 스스럼 없고 이해관계가 개입하지 않는 동행일 경우에는 그럴 필요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증거를 남기지 않아도 되는 여행. 여행 그 자체를 즐기고, 그곳에 갔다는 기억만이 몸속에 남는 여행. 그런 여행을 할 수 있다면 운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여행은 그 운 좋은 여행 중의 하나일 것이다. 빛나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충족감을 맛본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 편이 좋은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문득 싸늘한 감촉과 함께 마음속에 떠올랐다. 끝난 순간 즉시 잊어버리는 편이 좋은 여행. 기억하지 않는 편이 좋은 여행. 이것은 그런 여행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무도 카메라를 준비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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