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 개미지옥
모치즈키 료코 지음, 천감재 옮김 / 모모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무겁고 어두운 정서, 선해 보이는 인물의 극적인 반전, 선도 악도 아닌 존재의 극적인 자기 헌신.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 용의자 X의 헌신을 떠오르게 하는 말들이다. 이 책을 읽게 되면서 느꼈던 감정이란 불행한 운명에서 허우적 되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희미한 존재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이 표제인 '개미지옥'을 연상케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형사 시리즈, 요네스뵈의 해리 올레 시리즈, 교고쿠 나츠히코의 백귀야행 시리즈 등 시리즈 물을 즐겨 읽어 왔지만 모치즈키 료코의 '기베 미치코' 시리즈는 처음 접하였는데 일본 유학 시절 살았던 '히가시 나카노'에서의 살인을 다룬 추리 소설이라 미묘한 반가움을 느끼게 해주었다.

 

"살인이란 자신이 가진 뭔가와 얽혀 있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아.

 그 두 여자는 범인과 무엇으로 얽혀 있는 걸까?"

 

 

가장 밑바닥 인생을 보게 될지도 모를 도쿄 최하위 빈민의 삶,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태어난 두 여자의 총기 살해 사건을 둘러싼 이야기. 매춘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지독하게 어려운 환경에서 여동생 메이를 키워 나가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스에오와 모든 것이 풍족한 의사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남부럽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왔지만 도박 빚을 갚기 위해 비인간적인 행위를 지속해온 쓰바사와의 대비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프리랜서 기자 '기베 미치코'의 사건을 파헤치는 추리력은 모치즈키 료코의 시리즈를 빛나게 하는 매력적인 요소일 것이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걷고 있는 저기 저 햇볕이 내리쬐는 대지를 딛고 싶다.

간절히 원했지만 난 계속 넘어졌어요. 그래도 일어서는 수밖에 없었죠."

 

 

작가는 인물들의 불행한 삶의 과정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며 용서할 수 없는 악행에도 어쩔 수 없이, 참작할 만한 이유는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선과 악, 아니 어느 쪽이든 원만한 사회에 필요한 살인이란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살인에 대한 저마다의 판단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혼란스럽고 분명하지 않을 것이다. 정당화할 수 없는 살인을 선택하였음에도 우리를 이끄는 연민이라는 감정은 이 소설을 더욱 무겁고 진하게 만들고 있다.

<출생지, 개미지옥>은 결코 가벼운 작품이 아니다.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무거운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야 하는 어쩌면 굉장히 불편한 작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완벽의 가까운 현실적인 묘사와 마지막을 장식하는 생각지 못한 반전은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이 후회 없는 선택이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환상서점 - 잠 못 이루는 밤 되시길 바랍니다
소서림 지음 / 해피북스투유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반적인 경우라면 종이책 형태의 원작이 먼저 출간된 다음 다른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거치지만 <환상서점>은 오디오 드라마로 먼저 제작되었다가 독자의 요청으로 종이책이 출간된 특이한 케이스이다. 어떤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소설이길래 독자들의 요청으로 종이책이 출간되었는지, 그리고 표제 자체가 나의 개인적인 코드와 맞을 것 같기도 한 개인적인 느낌으로 접하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동화 작가를 목표로 둔 연서는 2년 동안 총 일곱 번의 출판 거절의 메일을 받는다. 화가 난 그녀는 산행을 결심하고 산에 올랐지만 날은 저물고 길을 헤매게 되고 외딴 절벽을 마주할 때 신비한 분위기의 남자 '서주'를 만나게 된다. 수상한 그를 경계하며 자리를 피하려고 하다가 불어온 강풍에 의해 절벽으로 떨어지게 되지만 알 수 없는 존재에 의해 구해지게 된다. 그녀는 서주의 서점에 들르게 되고 이름 모를 소녀의 어리광에 의해 서주의 옛이야기가 시작된다.

 

"저는 이 자리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습니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신수의 뿔을 자른 죄로 저승차사가 된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구색록>, 유일한 인간 친구가 살해당해 그의 환생을 기다리는 신의 이야기 <옥토>, 저승사자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수명이 적힌 명부에서 자신의 기록을 지워버려 영원히 살게 된 남자의 이야기 <불가록>, 불행의 족쇄가 채워져 있는 생을 반복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바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 <소화담>.

"다시 만날 수 있으면 됐어요. 바람 하나를 이뤘으니 이제부터 다음을 생각하겠습니다. 긴 시간이 걸릴지라도 나는 우리가 활로를 찾으리라고 믿어요. 불운이 나를 밀어 넘어뜨리면, 다만 내가 살아있는 줄 알겠습니다."

신조차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서 연이라는 실로 연결된 인물들의 애처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주와 그의 이야기를 통해 전생을 기억해 내는 연서. 윤회를 거쳐 다시 인간으로의 환생을 기다리는 인물들의 애틋함을 잘 표현한 소설이었다.

"보고 싶습니다. 저승의 강을 건너더라도 데려오고 싶어요. 망각수를 전부 토해내고 나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싶어요. 환생 같은 거 하지 말고, 영혼이라도 좋으니 함게 있어 달라고, 그렇게 애원하고 싶습니다."

진부한 내용일 수도 있지만 잘 짜인 스토리와 구성은 오디오 드라마였던 <환상서점>이 역주행 인기를 얻은 이유를 충분히 실감하고도 남았다. 이 소설이 담고 있는 주된 이야기는 기다림이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기다림이며 그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연을 놓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는 '한'이라는 정서가 가지고 있는 매력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에이징 솔로 -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2년 7월 온라인 뉴스에서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10년 치 뉴스 763만 8,139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노처녀'라는 표현은 2020년 4월을 끝으로 뉴스 제목에서 사라졌다. 10년도 전에 일이다. 일반적인 사회 인식에서의 혼기가 지난 사촌 누나는 명절 때마다 해외로 도피하듯 떠나버렸다. 결혼은 안 하냐는 둥, 눈이 높은 거 아니냐는 등의 친지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였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결혼 적정기에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어딘가 결함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 아닌 추측을 하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는 노처녀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세상이 온 것이다.

​

"남들이 어떻게 보든지 말든지 나는 '남편도, 자식도 없이' 어디에도 묶이지 않았던 덕택에 홀로 긴 여행을 여러 번 떠났고,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었다. 안전한 일터를 떠나 낯선 분야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겪기 어려웠을 소중한 경험을 쌓았다. 물론 가족이 있다고 불가능한 경험은 아니었겠지만, 인생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내 변수만 고려하면 되는 솔로라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가 쉬웠다."

​

내 주위에도 친구를 비롯하여 혼자 비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는 비혼주의 사람들. 특히 비혼 여성의 삶이 늘 궁금했었다. 그 호기심의 시작은 어쩌면 혼자 사는 삶은 결혼한 삶보다는 불안전하다고 믿고 있었던 나는 여성임에도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들에게 매료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

<에이징 솔로>에는 저마다 다른 직업과 다른 생활 환경을 가진 4050 비혼 여성들이 겪게 되는 인간관계와 노후 문제, 인간으로서의 외로움에 대처하는 법 등 혼자 살아가면서 부딪쳐야 하는 여러 경험담과 고민을 다루고 있다. 예상 밖으로 대체적 충분히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무시하기에는 무거운 문제도 존재했다. 그것은 사회적 고독과 고립, 홀로 살아가면서 아플 때와 위험한 상황, 노후의 경제적 안정을 위한 안정된 직장 문제, 비혼 여성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부모 돌봄 문제 등이다. 혼자 살아가는 삶에서도 서로를 간섭하지 않는 한에서 서로를 위한 배려와 돌봄의 중요성을 제시하며 더 나아가 정부 차원에서 1인 가구의 복지 확대와 한국 사회의 그릇된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비혼인 이들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나의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

​

혼자임에 익숙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족을 구성하지는 않았지만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함께 하는 삶'을 만들어왔다.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서로를 돌본 시간이 만들어낸 '친밀함'이 서로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혼자 사는 삶의 빈틈을 채우며, 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을 뒤로 한 채 혼자임을 선택하는 것은 더 이상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

​

흔히들 말한다 한국의 여자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체념하는 것이 많아진다고. 결혼과 자녀의 행복만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강요받은 삶을 거부하며 혼자임에도 당당하게 살아가며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조언해 주는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는 내 힘으로 걸어 나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따뜻한 응원이 될 것이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피아노의 시간 - 100곡으로 듣는 위안과 매혹의 역사
수전 톰스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유년 시절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으로 클래식 음악을 듣게 되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층이 접할 음악을 어린 나이부터 들으면서 어느덧 30년을 넘게 들어오고 있다. 오랜 시간을 들어오면서 주로 듣는 레퍼토리가 있다면 성악곡(종교음악, 가곡), 교향곡, 그리고 실내악과 독주곡 위주이다. 그중에서도 피아노를 포함한 실내악과 독주곡이 상당수를 차지하는데 그만큼 나의 음악관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는 대표적 피아노 작품 선택하여 누구나 쉽고 간편하게 참조할 수 있도록 정리한 매우 포괄적인 피아노 문헌이다. 건반 음악을 위한 작품의 역사에 있어서 각 작곡가들의 위치를 잘 대표할 수 있는 많은 작품들을 제공하고 있다. 인류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을 바흐부터 아르보 패르트까지 그녀가 엄선한 세기별 대표적인 작곡가들의 곡들을 만나볼 수 있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곡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골드베르크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꼽을 것이다. 물론 나도 글렌 굴드의 음반을 좋아한다. 하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하프시코드로 연주할 의도로 만들어진 곡은 연주자가 본연의 소리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에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년 전부터는 셀린느 프리쉬의 하프시코드 연주를 즐겨듣고 있다. 어떤 면에서 피아노 음보다는 거슬릴 수 있는 하프시코드지만 프리쉬의 음반은 동글동글한 음으로 거부감이 없어 자주 듣게 되는 음반이다.

리스트의 애호가가 아니면 잘 모를 수 있는 <잿빛 구름>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리스트는 최초의 현대적 관점에서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는 그는 작곡가이자 사색가이며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연주자로, 피아노 연주에서의 거의 모든 미래적 다양성을 구체화시켰다. 그는 종종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마치 자신의 곡인 듯 그의 고유한 방식으로 편곡하려고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지만(쇼팽은 자신의 작품 중 하나가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어졌다는 것을 듣고 매우 불쾌해했다.) 악보와 작곡가의 지시는 대단히 충실히 따랐으며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질 때는 더욱 그러했다. 리스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위였던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도입부를 연상케 하는 <쟃빛 구름>은 리스트의 후기 피아노 소품 중 <우울한 곤돌라>와 함께 가장 유명한 곡이다. 리스트 피아노 전곡 녹음으로 유명한 레슬리 하워드의 음반을 즐겨 듣는데 그의 연주 스타일과 <잿빛 구름>의 우울함이 잘 어울리는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드뷔시는 아라우의 <달빛> 연주를 처음으로 듣고 드뷔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리스트 이래 가장 독창적인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 맞먹는 섬세한 감정을 몇 겹의 음들을 동시에 사용하여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고 새로운 페달의 사용으로 그의 작품 분위기를 살려주었다. 연주자인 저자 입장에서의 전주곡 제2권에 대한 전체의 해설은 저자가 얼마나 드뷔시의 곡에 애착을 가지고 진지한 입장에서 연주해 왔는지 느끼게 해주는 흥미로운 글이었다. 개인적인 추천 음반은 샤플랭의 음반을 추천한다. 바부제나 플라네, 로제의 음반도 충분히 명반이지만 예민한 감각, 극도로 섬세한 터치는 샤플랭의 음반을 추천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물론 주관적인 생각이니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프로코피예프는 피아노곡을 가장 많이 작곡한 현대 작곡가 중의 하나이다. 그의 초기 작품은 후기 낭만파에 속하며, 그 시기에 이미 무르익은 자질은 근작에 속하는 소나타 7번에까지 나타나고 있다. 전쟁 소나타로 불리는 그의 6~8번 특히 피아노 소나타 7번은 전쟁 소나타 중 가강 유명한 곡이다. 저자는 7번의 초연을 맡은 리히테르의 에피소드와 그녀가 생각하는 피아노 소나타 7번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설명하고 있다. 리히테르의 연주 외에도 최근에 발매된 스티븐 오스본의 히페리온 음반도 굉장히 좋게 들었고, 프레데릭 치우의 아르모니아 문디의 음반도 깊이 있는 연주가 아닐까 한다.

클래식 음반 판매율의 최하위를 차지하는 건 현대음악이다. 현대음악은 익숙해질 수 있는 음악은 아니며 확실한 의지 없이는 친숙해지기 힘들다. 하지만 이례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 음악 작곡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고레츠키와 패르트다. 에스토니아 작곡가인 아르보 패르트는 ECM에서 발매된 <알리나를 위하여>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종의 울림을 연상케 하는 이 연주는 명상적일 만큼 단조롭지만 아름답게 다가온다. 흔치 않은 <알리나를 위하여>에 대한 연주자의 위치에서 전해지는 곡의 해석과 느낌은 이 책의 수많은 매력 중 하나이다.

수전 톰스의 <피아노의 시간>은 그녀가 엄선한 피아노 음악 레퍼터리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각 시대의 전반적인 피아노음악의 상황, 대표적인 작곡가들의 작품들, 그 스타일의 특징 등을 상당히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의 경험이 담긴 흥미로운 해설과 QR코드의 삽입으로 바로 들어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도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이라고 하겠다. 이 책은 피아노 음악을 입문하려는 이들, 학문적으로 공부하려는 이들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과학의 반쪽사 - 과학은 어떻게 패권을 움직이고 불편한 역사를 만들었는가
제임스 포스켓 지음, 김아림 옮김 / 블랙피쉬 / 202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에게 소개된 대부분의 과학적 지식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발견과 발전의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누락되고 배제되었던 숨겨진 사람들과 이야기들. 제임스 포스켓의 <과학의 반쪽사>는 지금껏 과학 교육의 시스템적 문제로 서구 열강 위주의 과학사에만 집중돼 조명 받지 못했던, 하지만 과학사에서는 빠져서는 안 될 만큼 중요한 업적을 이룩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

​

우리에게 익숙한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 등의 유명 과학자들의 위대한 업적의 소개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여러 과학자들이 수행했던 중요한 역할을 소개하며 위대한 업적을 이룬 유명 과학자들도 전 세계의 여러 사람들과 협동을 통해 오늘날의 과학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다. 오늘의 <과학의 반쪽사> 완독 후 실려 있는 수많은 업적 중에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거나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을 짤막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한 1700년대 도쿠가와의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1700년대의 일본의 통치자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우연히 삼촌이 한 네덜란드 상인에게 받은 책을 발견했는데 요한 존스턴의 <네발 동물의 자연사>였다. 호화로운 삽화가 실려 있는 이 책에서 가장 매료되었던 동물은 코끼리였다. 자기 소유의 코끼리를 원했던 도쿠가와는 일본과 우호적인 무역 관계를 쌓기 위해 노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아시아 코끼리를 들여오기로 합의했고 나가사키에 도착한 코끼리는 교토로 옮겨진 다음 에도의 도쿠가와에게 전해졌다. 그 후 도쿠가와와 그의 후계자들은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외뢰 동물을 들여왔다. 이국적인 동물에 대한 도쿠가와의 관심은 단순히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미래에 대해 우려했고, 자연 세계의 탐구가 번영의 열쇠를 얻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도쿠가와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값비싼 외래종 대신 대체할 만한 자국의 종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만물의 분류'라는 제목이 붙은 조사는 3590개의 항목을 포함했고 이것은 동식물뿐 아니라 광석, 금속 원석까지 포함된 조사였다. 일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천연자원을 소유하고 있었고 특히 유럽 무역 회사들이 탐내는 구리와 장뇌유가 풍부했다.



18세기 초에는 중국 자연사 연구의 가장 좋은 점과 일본의 식물에 대한 최신 연구를 결합해 책을 저술한 일본의 박물학자 가이바라 에키켄은 도쿠가와 막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였다. 당시 다른 학자들은 중국 학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데 만족하고 있었고 특히 일본에 서식하지 않는 외래종을 많이 다루고 있는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그는 일본에서 실제 볼 수 있는 종을 정리하기 위해 일본 전역을 여행하며 800곳이 넘는 마을의 자연환경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힘겨운 여행에서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야마토 본초>를 출간했다. 그의 <야마토 본초>는 이시진의 <본초강목>을 그대로 반영하되, 단순히 중국어 텍스트에만 의존하지 않고 지역적인 다양성을 반영했고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358종을 추가했다.



지난 140년간 벌어졌던 논쟁들을 뒤돌아볼 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다윈주의적 패러다임의 견고함이다. 다윈주의적 이론과 경쟁했던 세 가지 주요 이론, 즉 변환주의, 라마르크주의 정향 진화론은 1940년 무렵 완전히 반박되었으며,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그 후 60년 동안 다윈주의를 대할 만한 어떤 이론도 제기되지 않았다. 1859년 <종의 기원>이 출간된 후 19세기 러시아 과학자들은 다윈의 주장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도 부분적으로는 이미 생물의 진화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학의 선구자 기억되고 있는 메치니코프도 다윈의 진화론을 적극 받아들인 진화 사상가이다. 1860년대에 독일에서 공부하는 동안 찰스 다윈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그의 <종의 기원>의 독일어 번역본을 구입하고 열정적으로 탐구했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하나의 종 내 개체들 사이의 투쟁이라고 강조했고, 메치니코프의 관점 역시 생명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자원 경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야말로 진정한 생존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진화에 대한 메치니코프의 관점을 형성한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자 구조를 발견한 것은 영국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펀드가 이룩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비유럽 과학자들이 현대 과학의 역사에서 배제된 대표적인 사례로 1911년 러더퍼드의 영향력 있는 논문이 나오기 전 이미 정확히 같은 주제에 대한 일련의 나가오카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물리학에 중요한 공헌을 한 인물로 물질 자체의 본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변화를 가져다준 인물이었다. 수 세기 동안 과학자들은 물질의 본질에 대해 확실히 밝히지 못하였고 물질의 기본 구조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나가오카는 이 논쟁을 잠재우고 그 과정에서 원자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바탕으로 원자가 거대한 하나의 양전자 입자 주위를 도는 음전하 전자 무리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의 과학적 업적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서로 다른 문화와 과학 분야가 모임에 의해 물리학과 화학 분야의 결합으로 얻은 성과였다. 이것은 전 세계 문화 교류를 바탕으로 현대 물리학에서 중요한 과학적 돌파구가 이루어졌다는 중요한 사례이다.

​

​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의 업적들은 서양 강국만이 이룩한 결과물이 아니며, 지금껏 그랬던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표면적인 부분만을 보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과학의 반쪽사>는 기존의 통념을 깨트리고를 전 세계 사람들과 그들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현대 과학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 세계의 형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정확한 근대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