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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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국내 정세와 가난으로 낯선 타국의 독일행을 택했던 한국 여성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오빠들과 동생들을 대학에 보내려고, 혹은 더 넓은 세상, 더 넓은 가치관을 보고자 고국을 떠나야 했던 그녀들은 어느덧 고희를 넘긴 모습으로 독일 교민 1세대를 이루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망을 극복하고 경제부흥에 성공한 독일은 의료, 요양 등의 국민복지시스템 분야의 노동력이 절실히 필요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외화 확보가 절실했다. 서로 원하는 바가 잘 맞아 1961년 두 나라는 경제 기술에 관한 협정을 맺고, 광산, 간호 인력의 파견이 진행되었다. 그들이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었고, 당시 해외 파견된 우리나 근로자들의 전체 송금의 11%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파독 간호사의 이야기를 꺼낸 건 백수린 작가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가 파독 간호사의 일생을 소재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장편소설도 백수린 작가 특유의 깔끔하고 감성적인 문체는 다른 작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으로 그런 그녀의 글을 다시 접할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고 반가운 일이다.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이어나가야 했던 소녀"

이야기는 성인이 된 해미가 좋아했었던 동창 우재를 만나면서 유년 시절 독일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시작된다. 해미는 뜻밖의 사고로 한순간에 친언니를 읽게 되고 너무나 일찍 친언니의 죽음으로 인해 삶의 슬픔을 알아버린다. 언니의 죽음으로 부모님의 다툼이 이어지고 그로 인해 부모님의 별거로 이어져 해미와 동생 해나는 엄마를 따라 이모가 살고 있는 독일 G시로 이주하게 된다. 동생 해나와는 달리 적응이 힘들었던 그녀는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지만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눈치채고 해미의 불안을 감싸 안아준 사람은 해미의 친이모였다. 그녀는 어려웠던 가정 형편으로 파독 간호조무사가 되어 조국을 떠나 정착한 살고 있었다. 지금은 독일 국가 의사 시험에 합격해 의사로서 지내고 있다. 이모 주의에는 함께 파독 간호사로 일했었던 선자 이모와 마리아 이모 그 밖의 많은 파독 간호사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모의 도움으로 교포 2세인 레나와 한수를 만나 친구가 되고 힘들었던 낯선 타국에서의 생활을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한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30

독일에서 생활이 적응되었을 때쯤 선자 이모의 아들 한수가 비밀스러운 부탁을 해오게 되는데 그 부탁이란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첫사랑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 몰래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가며 그녀가 독일로 떠나온 후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감추어져 있던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를 마주하게 된다.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가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p100

독일에서의 평화로운 생활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쳐, 어쩔 수 없이 해미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국에 돌아온 해미는 선자 이모의 첫사랑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쉽지 않았다. 뇌종약의 악화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선자 이모의 모습을 지켜보던 한수에게 미안한 마음에 첫사랑을 찾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고서는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독일 친구들과의 연락을 끊고 첫사랑을 찾기를 가슴에 묻게 된다.

"나도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예전엔 왕벚나무, 편백나무 같은 것들이 길거리에 많았대. 그런데 70, 80년대에 제주도를 관광지로 개발하는 사업이 시작되면서 아름다운 남국의 경관을 연출하기 위해 야자수들을 정책적으로 수입해 심었다더라. 그래서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여기 야자수들은 열매를 맺지 못한대."

그런 야자수들이 살아남아 이젠 제주의 일부가 되었으니,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



"저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이고 회의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늘 생각해왔어요. 말씀드린 것처럼 언어를 통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는 편이고요. 소설 쓰기는 그런 저에게 마지막 보루, 희망 같은 것이에요. 세계는 엉망이고 소통은 대체로 불가능하나, 누군가와 맞닿을 수 있다는 희망이 불씨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있을 수도 있다고 믿고 싶기 때문에 저는 소설을 쓰고 있어요. 언젠가 그 희망의 불씨마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절필을 하게 되겠지요? 아무튼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쓸 때는 제 안에 아주 희미하게만 존재하는 낙관성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결국에는, 마음들이 맞닿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요." [백수린 작가 인터뷰 중에서]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들은 어쩌면 사치라고 느껴질 만큼 그녀들이 낯선 독일 땅에서 겪었던 외로움이란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머나먼 타국에서 경제 디아스포라로 살아간 파독 간호사들과 당시 아들을 성공을 중시했었던 시대상과 과거 한국의 정서로서는 용서받지 못할 일로 가슴 아파했던 사람의 슬픔들. 그런 가슴 아픈 슬픔과 마주하더라도 그 슬픔 안에서조차 희망을 마주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젖게 되는 것이야말로 백수린 작가의 소설을 읽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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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염상섭 지음 / 지만지한국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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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는 작가의 원대한 계획 아래 씌어진 염상섭 작가의 대표작이자 한국 근대문학에서 가장 돋보이는 소설이다. 3부작을 계획하고 씌어진 이 소설은 <무화과>와 <백구>라는 작품과 연결되어 있는데, 세 소설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세대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단지 식민지 시대의 삶의 세목들을 평면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인식에까지 나아간 것으로 그런 점에서 <삼대>는 한국 근대 문학의 기념비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다.





최근 지만지에서 출간한 완전한 의미의 <삼대>를 접하게 되었다. 전승주 교수는 초판본인 신문 연재본을 기본으로 한 책 3종과 개작된 단행본을 기본으로 한 책 3종을 비교해 총 5000여 곳의 서로 다른 점을 찾아내며 이전의 책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오류들은 모두 바로잡은 완전 복원 원고가 전승주 교수의 정본이다. 그동안 이 작품을 읽어 온 독자들은 완전하지 않은 텍스트를 정본으로 알고 있었다. 100년 전의 경성과 그곳에 살았던 덕기와 병화와 경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김희경 박사의 방대한 곁 텍스트와 김종욱 교수의 해설을 더하고, 연재 시 게재되었던 당대 최고의 화가 안석주 화백의 삽화를 함께 수록한 가장 완전한 의미의 삼대가 탄생했다.




염상섭이 <삼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이다. 염상섭은 이 소설을 통해 1930년을 전후로 한 서울의 한 중산층 집안의 몰락 과정을 중심으로 당대 식민지 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 사회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섬세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이 소설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살펴보더라도, 주인공인 조덕기 일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김병화로 대표되는 이념적인 인물들, 그리고 매당집과 수원집으로 대표되는 부정적인 인물들까지 당대 인물의 전형들이 두루 포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씨줄을 이루고 있다면 조의관, 조상훈, 조덕기의 삼대에 걸친 가부장제적인 가족사가 날줄을 이루면서 한 폭의 이야기를 짜나 가고 있다.




읽는 내내 느껴지는 돈이 최고라는 가치관은 100전에도, 지금에 이르기까지도 변하지 않은 씁쓸한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임을 느끼게 해주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들을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조의관의 돈이라는 점에 더욱 그러했다. 조덕기는 할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는 있지만 그렇게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은 할아버지의 돈이었다. 조덕기는 조의관이 죽은 뒤 물려받은 열쇠 꾸러미로 가문과 재산 분배를 둘러싼 음모에 휩싸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독살의 협의로 검거된다. 협의를 벗고 풀려나온 덕기는 여러 문제를 원만히 처리하고 필순이 가족들을 돌볼 생각을 한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 대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조덕기와 조상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인 수원집이나 최참봉, 지주사와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돈'에 대한 욕망과 생각이 이 작품 전체를 이끌고 있다.




염상섭은 <삼대>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문학 전체에 걸쳐 염상섭은 이 같은 돈의 사상을 문제 삼았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핵심 본질을 꿰뚤어보고 이를 진지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염상섭 문학은 근대적이다. 어쩌면 염상섭의 소설을 시작된 후배 작가의 소설들 예를 들어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선작 작가의 <영자의 전성시대>, 윤흥길 작가의 <아홉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 등은 낭만이 사라진 자본주의 사회의 심장부로 부각된 서울의 이면들이 회색빛으로 묘사된 소설들이다.

연재 기간 약 9개월, 연재 회차 215회의 이 소설을 지만지출판사에서는 1366쪽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만들었다. 다소 비싼 가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수정된 오류들과 많은 한자어, 사투리, 지금은 쓰지 않는 단어들과 설명이 필요한 인명, 지명, 사물 등의 전문가가 감수한 상세한 주석, 풍부한 이미지 자료는 1930년대의 생생한 경성 공간을 묘사한 가장 완벽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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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
염상섭 지음 / 지만지한국문학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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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도, 앞으로도 없을 가장 완전한 의미의 <삼대>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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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백수린 외 지음, 이승희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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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라."는 인생 권고문이 마음에 와닿는다. 사소하지 않는 사소한 것들에 관심과 눈길이 가고,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 행복해하고, 모든 평화로움에 감사하려는 것도 어쩌면 나이 탓과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인간은 관계에 의해 얽히고설키어 살아가지만 본직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다. 인생은 홀러 태어나 마침을 향하여 가는 여정이다. 그런 외로운 여정을 누군가와 함께 보낼 수 있다면 그것은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사랑과 우정을 통해서 살아가는 의미와 존재 가치를 느낄지도 모른다. 사랑과 우정이야말로 한세상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붙잡고 가야 할 자산이다. "새에겐 둥지가 있고, 거미에겐 거미줄이 있듯 인간에게는 우정이 있다."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우정은 새에게 둥지만큼, 거미에게 거미줄만큼 인간의 삶을 지탱하도록 하는 터전이다. 이 터전을 가꾸기 위한 우정 또한 벗을 위한 배려와 헌신이다.

창비에서 출간한 <함께 걷는 소설>은 백수린, 이유리, 강석희, 김지연, 천선란, 김사과, 김혜진 작가의 우정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로 다양한 모습의 우정을 그려 내고 있다.

백수린 작가의 소설집 [여름의 빌라]의 수록된 <고요한 사건>은 살아가는 환경에 따라 친구들의 무리가 나뉘게 되고 부모마저 잘사는 동네의 아이들과 친구가 되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의미의 우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깝게 지내던 무호와 해지 역시 언제까지나 함께 있을 것 같던 친구였지만 그들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을 장식할 스치는 인연이었다.

"부모님은 새 학교로 등교하기 전에 몇 차례나 내게 이왕이면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그런 당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이 한 번도 전학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임을 나는 이내 알게 되었다. 전학생에게는 친구를 선택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부모님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전학생으로 처음 교탁 앞에 서는 순간, 내게 쏟아지던 여든 개의 눈동자. 가늠하고 평가하여 어느 부류로 분류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재빨리 나를 훑던 눈길은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하고 있다."

이유리 작가의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에 수록된 <치즈 달과 비스코티>는 돌멩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학교 폭력을 벗어나기 위해 돌을 던지고, 열일곱에 처음 돌과 말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돌멩이 '스콧'을 유일한 절친으로 삼고 있는 그는 상식적으로 정상인이라 생각할 수 없다.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을 무척이나 좋아해 닉네임을 치즈 달을 보호하는 쿠커에서 따왔다는 쿠커는 나에게 다가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광적인 관심을 보이는 나는 쿠커가 무척이나 불편해하지만 함께 한 여행에서 쿠커는 물에 빠지게 되고 그를 구하다 셔츠 주머니에 넣어둔 스콧을 잃어버려, 스콧을 찾기 위해 안절부절못해 하지만 주인공의 말을 믿고 있다며 스콧을 찾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는 쿠커의 말로 그의 존재를 조금은 인정하게 된다. 인간과의 원만한 관계가 힘든 그들은 사물과의 관계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가볍게 읽어 나갔지만 학교 폭력과 주위의 무관심으로 상처받고 있는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그린 소설이라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건 날카로운 돌멩이였다. 그놈은 네 바늘을 꿰맸고, 나는 고의로 머리를 가격한 게 아니라는 걸 선생님과 어머니 앞에서 설명해야 했다. 물론 돌이 그러라고 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드디어 내가 남자다워졌다며 너무나 기뻐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앞으로도 저런 놈들이 괴롭히면 똑같이 해 주라고 했다.

그놈이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로 학교에 돌아왔을 때 내가 죽도록 얻어맞았음을 말할 것도 없다. 그 사건 이후로 내 학교생활은 더욱 험난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날 새로운 취미가 생겼기에 견딜 수 있었다. 나는 내 눈에 보이는 돌멩이라는 돌멩이는 모두 주워 다 말을 걸었던 것이다. 저기요? 제 말이 들리나요? 제발 대답해 주세요. 저 들을 수 있어요. 제발."

김혜진 작가의 <축복을 비는 마음>은 일로 만나 나누게 된 우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입주 청소를 하고 있는 인선은 신입 경옥이 불편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그냥 감내하고 지나치는 것들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는 유별나고 제멋대로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경옥의 말이 싫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참고 있었던, 힘껏 소리 내어 말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던 것이다. 부당한 일에 자신이 먼저 나서서 말하며, 자신을 격려해 주는 그녀는 오래된 관계가 아니어도 충분히 좋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은 경옥이 건넨 말 때문이라는 것을 인선은 나중에 알았다. 지금껏 들어 본 적 없고, 듣게 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그 말은 자신이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누군가가 한 번쯤 그런 말을 해 주길 몹시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누구도 그런 다정한 말을 건넨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된 거였다."

우정이라는 테마로 백수린 작가를 비롯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들의 소설집에서 수록된 가장 인상 깊었던 소설들의 모음집이라고 해야 할까? 놀라울 정도로 알차게 만들어져 있어, 위에 나열된 작가들의 소설을 막 읽기 시작한 사람이나 시간 여유가 넉넉지 않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좋은 단편모음집이니 기회가 되면 꼭 접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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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안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정지아 외 지음, 문실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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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한두 번 그나마 무슨 날이라야 가는 부모님이 계신 집, 얼마 전부터 불현듯 부모님이 슬퍼 보이고 안쓰럽다. 또다시 5월이 오는 탓인가? 매번 방문할 때마다 아픈 몸뚱이를 힘들어하며 넔두리하는 모습이 싫어 외면도 한다. "아프면 병원 가시지 왜 그러고 계세요." 파르르 성깔 부리며 앉으면 '먼 길 오느라 힘들었지, 잘 지내지?" 어머니는 여전히 어머니 같은 말만 한다. 힘들다며 벌러덩 눕는 나는 여전히 철부지인 채로 말이다. 서른넷에 집을 떠난 자식은 일흔을 훌쩍 넘긴 어머니를 늘 마흔 중턱 어느 봄쯤으로 기억하고 살았다. 당신의 아들이 세상에 나온 지 43년이 지난 오늘, 가슴 뜨겁게 당신의 자리가 고맙고 미안해서 가슴이 아팠다. 당신과 조심스레 깊은 눈을 맞춘 후 돌아서는 발걸음이 자꾸 무거워진다.

"이토록 모순된 유기적 생명 공동체가 세상에 또 있을까?" - 톨스토이

창비에서 출간한 <끌어안는 소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며 생기는 이야기의 모음집이다. 정지아, 손보미, 황정은, 김유담, 윤성희, 김강, 김애란 작가의 가족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은 잊고 있었던 가족이라는 의미를 되새겨보기에 충분했다. 모든 작품을 감동 있게 읽었지만 그중 가슴에 와닿은 소설 몇 편을 소개할까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최근 <나의 아름다운 날들>을 감동 깊게 읽었던 정지아 작가의 <말의 온도>는 노년을 바라보는 딸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시며 어머니라는 존재를 이해한다는 내용이다. 자신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그녀도 한때는 철없이 투정 부리는 딸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어머니의 삶은 가족을 위한 희생의 시간이었음을 이해하게 된다.

"어머니와 말을 하다 보면 이상한 대목에서 심장이 저렸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고 외할머니의 딸이던 시절에는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지 않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가 아니라 한때는 마음껏 투정을 부려도 되는 딸이기도 했던 것이다.

참여한 작가들 중 가장 최근에 소설집을 낸 손보미 작가의 <담요>는 죽은 아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장이라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장은 콘서트 장에서 사고로 아들을 읽고 죽은 아들의 담요를 끌어안고 6년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그는 야간 순찰 중 영하의 날씨에 놀이터에서 떨고 있던 어린 부부에게 아들이 담요를 건네며 끌어안고 있던 슬픔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들이 죽은 후, 장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공연장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딱 한 번, 회식 자리에서 만취했을 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들을 잃은 후, 장의 생활에는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 번째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담요를 항상 몸에 지니고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가 야간 순찰에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가장 독특한 이야기였던 황정은 작가의 <모자>는 가끔 모자가 되어버리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유년 시절 당신의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은 아버지는 그때부터 모자가 되어버렸다. 중요한 순간이면 당황하며 얼어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에 안쓰러워하는 자식들의 시선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으로 보살핌 받았어야 할아버지의 유년 시절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남편, 그러니까 세 남매의 할아버지는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폐암에 걸려 죽는 날까지도 꼿꼿하게 등을 펴고 누워서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그 남편이 아직 젊었을 때, 하루는 밥상에 밥알을 너무 많이 흘렸다고 아들의 바지를 벗겨 놓고 엉덩이를 팡팡 때린 일이 있었다. 고작 다섯 알 정도를 흘렸고 주워 먹으면 그만이라고 그녀는 생각했지만, 쓸데없이 꼬장꼬장한 남편을 상대로 말해 봤자 입만 아플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새벽에 목이 말라 일어났더니 자리끼로 놓아두었던 주전자가 비이 있었다. 할 수 없이 주전자를 들고 마당으로 나간 그녀는 낮에 엉덩이를 두들겨 맞은 둘째 아들이 우물가에서 조그마한 모자가 되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자였지만, 그녀는 모자가 그 아들인 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김애란 작가의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역시 독특한 발상으로 감탄을 자아냈다. 인적이 드문 섬 플라이데이리코더에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삼촌과 살고 있는 아이는 어느 날 노란색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걸 보게 된다. 잔해에서 찾아낸 블랙박스를 보며 엄마라고 한 삼촌의 말에 그것을 엄마라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원자로부터 형성된 우주의 만물을 같은 맥락으로 바라보는 삼촌의 말을 이해하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그게 서로 다른 종으로 태어날 경우 대화를 할 수 없게 돼 있어. 그래도 몸을 기울이면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있을 거야. 방법은 우리가 발견해 내면 돼. 지금 엄마랑도."

소중한 것들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당연하다고 여기던 내일과 언제까지나 옆에 있어줄 것 같던 내 사람들도 세월의 흐름 앞에 그 무엇으로도 거스르지 못하고 늙어간다. 언젠가부터 아내와 딸이랑 길을 걸을 때면 언제나 손을 잡는 버릇이 있다.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손바닥을 긁어보기도 하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문질러 보기도 한다. 가장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을 후회 없이 닮고 싶었을까. 아내와 딸도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가만히 맡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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