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쓸모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스튜디오오드리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흑백으로 찍어야

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아이는 비누 거품 풍선을 바라보며 마치 단 한 번뿐인 생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는 듯 온 힘을 다해 질주한다.

저 비누 거품 풍선은 5초 내로

영원히 사라질 테니까

소년의 저 눈빛, 저 달음박질도.

오직 한 번뿐인 반짝임을 찾아

오직 한 번뿐인 몸짓과 미소와 환희를 찾아

나는 오늘도 배낭을 꾸린다."

-정여울


마흔을 넘으면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인생은 공평하지 않고, 타협은 인생을 편하게 해주지만 나중에 반드시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하며, 능력보다 중요한 건 운이지만 운은 가만히 있는 자에게 절대로 가지 않는다는 사실. 아무리 멀어 보여도 달리다 보면 결국 도착한다는 것. 물론 그 도착 지점을 성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많은 경우 그게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런 것도 알게 된다. 아무리 좋고 멋진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때가 있다는 것. 성공하는 것보다 실패를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 마지막으로, 시간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내가 사랑하는 책을 읽는 것과 여행을 떠나는 일이라는 것.


여행은 현실의 역할을 벗어던지고 일상에서 탈출해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특히 결혼 전에 내가 원했던 여행은 일상에서 누릴 수 없는 호화로운 휴식을 갖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의미가 바뀌었다. 내가 원하는 여행이란 내가 가진 것 중 일부를 나눌 수 있는 여행, 나와 그들 모두가 동등하게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만나는 여행, 의미 있는 소비가 가능한 여행을 꿈꾸게 되었다.


유튜브와 각종 매체 덕분에 다른 나라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 듣는 시대라지만, 아무래도 채워지지 않던 나에게 정여울 작가의 신작 에세이 <여행의 쓸모>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정여울 작가의 글이 처음인 나에게 그녀의 첫 이미지란 무척이나 감성적인 사람이었다. 프랑스 파리와 뉴욕,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의 뉴욕, 영국의 런던을 거쳐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떠나는 아름다운 여행에서의 사진과 그녀의 따뜻한 글은 나 자신이 직접 여행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킬 만큼 생생하게 다가왔다.


곁에 있던 누군가와의 다툼이 사라지고 아무런 고통이 없는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을 때, 무엇인가에 집중하거나, 한껏 놀면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을 피하는 행동과 같은 것이다. 생각해 보면, 사람에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시간이 없다는 건 아주 가학적인 일이다. 누군가를 잊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의미있는 여행이었을테니까.

 

 

"낯선 장소의 아름다움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에서 정작 찾아낸 것은 '나조차도 몰랐던 나'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장소의 수집 욕구'를 뛰어넘는 더 깊은 욕망의 차원과 만날 수 있다. 나는 장소를 수집하고 싶지 않다. 지구상의 모든 나라를 여행하는 것이 목표도 아니다. 인증 숏을 전혀 남기지 않아도 좋다. 그때 그곳에서 '평소에는 잘 쓰지 않던 감성의 근육'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깨달음, 지극히 사소한 미소, 어쩌면 단 한 번뿐일 안타까운 스쳐감만으로도 여행은 우리에게 참 많은 것을 선물한다는 것을."- 정여울

 


우리는 여행이라는 낯선 길 한가운데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해간다. 여행을 통해 얻어지는 깨달음의 순간,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깨달음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순간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행을 통해 깨달은 것들이 자신에게 많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스스로가 온몸으로 겪어낸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찾고 싶어 하는 것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기까지는 저마다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마도 그건 신의 선물일 것이다. 정답을 너무 쉽게 알아버린다면, 언제 우리가 스스로와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을 갖겠는가. 우리는 결국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정답을 위해, 멀리 여행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더 많이 만나고, 겪고, 사랑해야 겨우 자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는 그런 나일 테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