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진 레이철 워프 시리즈 5
팻 머피 지음, 유소영 옮김 / 허블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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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무너져버릴 것이다"라는 한 페미니스트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음지에서 숨죽여야 했던 여성들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계는 말하기 시작한 여성들로 인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성폭력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를 인정받기 위해 삶을 걸어야 한다. 일반적인 폭력 사건과 달리 유독 성폭력 사건은 피해와 가해라는 말이 여전히 애매하게 다루어진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명확히 구분 짓기도 힘들뿐더러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상황을 누가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까? 강간과 섹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강간 문화를 드러내는 것, 성폭력은 누구 혹은 무엇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폭력의 문제임을 밝히는 것이 바로 많은 여성들이 소리 높여 말하고 있는 페미니즘인 것이다.

<무척추동물의 사랑과 섹스>로 이미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던 페미니즘 SF 소설가인 팻 머피의 단편집 <사랑에 빠진 레이첼>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담고 있는 소설이다. 죽은 딸의 전기장 패턴을 어린 침팬지의 뇌에 덮어 씌워 의사소통이 가능한 암컷 침팬지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사랑에 빠진 레이첼>,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오가며 시간 여행을 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오렌지 꽃이 피는 시간>, 식물처럼 심기만 하면 자라나는 한 여성이 자신을 학대하던 남편을 살해한다는 이야기인<채소 마누라>, 자신에게 무관심하던 영화배우 아버지에게 상처받으며 자란 한 여성이 아버지를 상징하던 TV를 버리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룬 <TV 속의 죽은 남자들> 등 오랜 시간 여성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어온 그녀의 작품들에는 상처받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그들은 종국에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사회 속으로 한 발짝 다가서게 된다.

인류 역사상 사회적 약자에게 정의로운 사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피해와 가해는 일상이지만, 자신을 가해자로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해는 저절로 자명한 사실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가 합의하는 피해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해는 인정 투쟁, 집단행동, 사회 운동, 여성주의 등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실천을 통해 사회적 합의에 도달해 가는 과정이 요구된다. 누군가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저절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미 가부장적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는 존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피해자 되기'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위치성을 끊임없이 되돌아본다는 뜻이다.

그런 그녀는 여성들의 입장에 서서 작품을 통해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며, 불완전한 여성 인물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과 고통을 여러 작품들을 통해 이야기해왔다. 적어도 나에게는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직간접적으로 겪어나 듣거나 보았을 이야기보다는 SF라는 상상력의 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작품이 더 가슴에 와닿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 문학을 이해하기에 가장 부담이 적었던 작품이었고 이 책을 접하게 될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킬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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