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한 내용을 저의 상황에 대입하는 작업입니다. 단순한 것임에도 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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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습관이 몸에 베었다. 구경하기 보다는 해보기가 더 좋은 것.
무언가 매력적인 게 눈에 보이면 직접 내가 해보고 싶어하는 욕망을 갖는 것이다. 가수들, 연주자들, 그들이 연주하는 악기들, 탄성이 절로 나오는 기막힌 터치, 그 손가락의 예술들. 그리곤 꼭 나도 저처럼 할 수 있을 거란 느낌을 거의 자신감처럼 가지게 된다. 물론 단 한번도 나를 매혹했던 노래나 연주에 도달해 보지 못한 건 당연하다.
정리해 보자, 배운데로.
1. 난 늘 무언가를 꿈꾸었다. 구체적으로. 그리고 꿈은 아직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충분히 재현적이다. 나는 나의 자리-이름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래서 늘 갈등을 겪는다(나의 주체와 술어는 늘 갈등한다). 연주를 보면서 갈등을 느끼지 않는 방법은 연주를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객체화 하는 거다(주체화의 조건은 객체화, 이 때 연주는 오히려 풍요가 된다). 설악산처럼 완벽한 경치를 감상하면서 '나도 저렇게 만들 수 있어' 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공연을, 작품을 볼 수 있으면.
그런데, 정말 악기가 내 손끝을 타고 있다는 착각과 함께, 때론 아쉬워 하고 순간 감탄하면서(조금있으면 나도 곧 해 볼 것이기 때문에) 공연을 보는 내게 남는 쾌락은 무엇인가. 단지 상상으로 혹은 정말 막되먹은 실력으로 그를 모방해 갈 때의 즐거움이- 완벽한 재현(re-play)에 아득히 미치지 못함에도- 월등한 이유는 무엇인가. 농구를 보면서 나도 마치 허재처럼 날아다닐 거란 착각에 빠지고 그래서 두 시간 중계를 보는 것보단 아들과 농구공을 들고 학교 운동장으로 달려나가는 게 더 즐거운 것, 허영석의 산행을 보면서 나도 오천미터급 정도는 쉽게 오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오백고지를 즐겨 걷는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습관처럼 꾸고, 단지 바라만 보는 것( 완벽한 타자 ) 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며, 그렇다고 무엇 하나 감탄스럽게 잘 해내지도 못하는 나는 재현적 방식에 갖힌 술어적 존재일까?
2. 감동을 주는 것이 공연이던 스포츠던 그림이던 그 처럼 되어보려고 나를 움직이는 일이 재현일 이유는 없다. 더구나 그 과정이 즐거운데야.. 게다가 그도 몇 개월 아니면 몇년, 그도 그야말로 취미 수준의 투자시간(노동)으로 같은 감동을 가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예술가 혹은 장인에 대한 모욕이 될터이다. 생명을 건 열정(매우 헌신적인 노동)이 지닌 가치는 그 역작을 통해 내가 느끼는 감동, 그리고 그에게 가지게 되는 겸허한 존중이 된다.
문제는 자신감이다(이 자신감은 긍정적 피드백을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므로 허구적 자신감이다). 이 근거 없는 심리는 마치 무의식처럼 나를 지배하며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결국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찔끔대는 서당 개가 될 수 밖에. 과잉된 자신감이 보이는 양태는 일반적인 중독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알콜, 카페인, 도박, 마약같은 것. 오늘은 스포츠에서 내일은 소설로, 다시 악기에서 미술로, 만들기로, 농사로, 독서로.. 끝도 없고 만족도 없고 늘 시작만 가득한 것.
허구적 자신감은 또 다른 측면에서 위협적이다. 예술가나 장인이 아닌 일반인들과의 예술적(기술적) 조우에서 하나의 균열이 형성된다. 전문가를 지향하는 자에게 일반인들의 행위는 낯설고 한없이 서툰 것이다(자신의 서툼과는 하등 상관 없이). 서툰 시도를 곱게 안아줄 여유가 그에겐 없다.
이 병적인 시도들은 그러나 지금 껏 나의 삶을 지탱해 왔다. 다양한 시도를 통해 즐거운 일들이 많았고 또 조금씩이나마 많은 장르의 작업에 눈뜨게 되었다. 조금 더 알게 될수록 감상의 폭이 넓어지는 것도 결실이다. 무엇보다 시도한다는 건 늘 즐거운 것이다.
재현 또는 비재현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 자리-이름, 술어에 매인 주체라 단정할 수 있는가? 아직 공부가 너무 얕아 간단한 내 일상 하나를 정의해 낼 수 없었다. 더우기 지난 시간에 배운 지젝, 들뢰즈의 언어들은 사용학엔 너무 생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