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강의를 듣고 나서 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느라, 쉽게 글을 정리할 수 없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 글을 쓰다 지우길 몇 번, 책(재현이란 무엇인가)를 다 읽은 이 시점에서 일단 고민을 정리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번째 강의를 들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개념'에 대한 이해였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개념(가치판단이 내재된 인식의 틀, 도그마)을 깨야 하는 것인지, 또는 다름에 대해 긍정하는 것인지, 부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이 서질 않았다. '보편적 진리는 없다.'라는 말을 예로 들면, 내 도그마 안에서는 보편성에 대한 부정, 특수성에 대한 인정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리' 특히 그것이 신과 연결된 절대성에 대한 의미일 때, 그것이 과연 없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 이해해야만 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번째 강의가 무척 기다려 졌고, 궁금했다. 아쉽게도 몸이 안좋아 결강을 하게 되었지만. 선생님의 글 『재현이란 무엇인가』를 통해, 그리고 그동안 고민해 온 내 생각들을 정리하며 그간의 고민을 정리해 볼까 한다.
"지금, 여기"
인간이란 삶을 산다. 삶을 산다라는 것에는 주체성, 능동성이 포함되어 있다.
보통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우리는 상식(사회, 시대의 도그마)을 학습한다. 학습은 수동적이다. 내가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배워 익히는 것이다. 나를 가르치는 누군가 역시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배웠을 것이다. 학습 안에는 수 많은 과거의 순간이 함축되어 있지만, 그 안에 현재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살 때, "지금, 여기"를 간과하기 쉽다. 그래서 재현적 사유를 뛰어넘어, 의심하고 부정하고 능동적으로 사유하라 말하는 것일까.
"과정으로서의 사유"
내가 가진 도그마를 부수고, 또 다시 개념지워진 그것을 부수고, 또 부수고, 결국 그 과정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재현적 사유를 뛰어넘자는 것은 새로운 개념을 짓자는 것이 아니라 부수고 부수는 그 과정을 중요시 한다.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주체성, 열정, 능동성이 발휘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공명"- 다른 사람으로 살기! 시선을 비틀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나와 너(꽃)의 공명의 순간을 포착했다. 마르틴부버의 『나와 너』에서도 공명의 순간을 이야기 한다. 기존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 '공명'하는 순간 그것이 아닌 '너'가 되고, 꽃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공명할 것인가? 다른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이다. 또는 다른 개체가 되어 보는 것, 나의 시선을 비틈으로써 '공명'의 틈새를 열어 볼 수 있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에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 지 막막하다. 단순히 재현적 사유를 뛰어넘기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만으로는 뭔가 개운치 않다. 좀 더 고민이 필요 할 것 같다. 내가 가진 의문, 그리고 재현적 사유를 뛰어넘는 것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