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란 것도, 천국이란 것도 기껏해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더 중요한 건 천국과 지옥은 한 끗 차이라는 점이다."
우하하^^ 일빠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자정이 넘은 시간에 컴퓨터를 켰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그러나 그냥저냥 읽으면 몸에 해롭지 않을 썰을 슬슬 풀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등록하기 버튼을 누른 순간....허걱....오류 팝업이 뜨며, 서버 점검 중이라는 공지가 뜨더군요. 일빠에 대한 동경이 깨어지는 충격에 잠시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것 또한 헛된 망상임을 깨달았죠...헛되고 헛되도다....ㅋㅋㅋㅋ....그래서 어쨌냐구요?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죠. 설마 그 충격으로 술독에 빠지거나 불면의 밤을 보냈겠습니까? 그리고 조금 전에 일어나 다른 분들의 후기를 읽고 이렇게 다시 후기 올립니다.
먼저 위에 진한 글씨로 적은 오늘의 한 문장을 고르면서 오늘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오늘 강의 말미에 채운 선생님께서 두 번에 걸친 이번 강의의 주제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하셨죠.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라!" 흡사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기도 하고, 강의를 들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호소 같기도 하고, 재현의 삶을 넘어서는 어떤 선문답 같기도 해서 이 말이 너무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이걸 오늘의 한 마디로 삼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렇게 하면 이건 또 누군가 의도를 재현하는 것밖에 안 되므로 과감하게 패스.
다음으로 저를 훅~하고 잡아 끈 명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라는 영화를 예로 들며 언급하신 "우리의 인생은 '삶'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산다'는 동사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언제나 현재이며, 이 현재는 단순히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위치하는 시간의 선후관계나 인과관계가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모두 품고 있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확정된 모습이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나를 모두 던져 끊임없이 자신을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다. 결국 재현하는 삶이 명사로 우리의 인생을 확정한다면, 재현을 넘어선 삶은 우리의 인생을 끊이없이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간다. 그러나 이 명제는 표현도 너무 '문학'적이고 내용도 심금을 찡하게 울리지만 오늘 강의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고 보기에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역시 패스.
그래 다시 하나 찾아보자 했더니 생각난 게 바로 "삶은 재현이 아니라 표현이다." 이 말에 따르자면 얼굴의 주름을 펴기 위해 돈 들여가며 주사 맞을 일이 아니라 영혼에 겹겹이 굴곡을 주고, 또 펼칠 수 있는 주름을 만들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시간을 역행하며 영원한 젊음을 추구하는 행위는 늙음에 대한 모독이요, 생명에 대한 부정이다. 이런 삶의 방식은 자본을 등에 업고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허구이며, 이를 좇는 것은 재현의 사고에 충실한 것이다. 흐흠...문장도 간결하고, 깔끔하게 딱 떨어져서 이걸 오늘의 한 문장으로 삼으려 했으나 공책에 적힌 위의 저 문장을 보는 순간 마음을 오롯이 빼앗겼다.
"지옥이란 것도, 천국이란 것도 기껏해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더 중요한 건 천국과 지옥은 한 끗 차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흔히 고정불변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 혹은 절대적 존재로 여기는 것들은 우리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태고부터 있었고, 기껏해야 우리는 그걸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만들거나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현적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런 개념들도 결국 우리가 스스로 만들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가 만든 것이니 새롭게 구성할 수도 있다는 건 당연한 결론. 그러니 정반대의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도 그게 아닌 걸로, 혹은 우리의 구성 안에서 언제든 하나로 만들 수도 있다. 포이에르바하가 "모든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규정했을 때, 그는 과연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사족 하나-기억하실 분도 없겠지만 지난 주 후기에서 한 마디로 그날의 수업을 정리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네 개의 명제나 끌고 왔다. 지난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각'을 만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얘기하며 정리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도 좋을 거 같고, 수업 들으신 분들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 좋으니 다들 넓은 아량으로 용서하시기를.
사족 둘-강의 말미에 프로이트로 뜨거웠다. 그러나 문맥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강사이셨던 채운 선생님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상담치료를 무조건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눈치챌 수 있다. 채운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모든 문제를 가정으로 국한하거나 인간을 인과관계에 종속되는 존재로 만드는 한계를 실감하게 된다. 이게 또 재현의 사고로 여겨지면 이걸 뛰어넘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되고, 자신이라면 이런 치료법보다는 삶의 양식을 전환하는 방법으로 삶의 장을 바꾸거나 공부하는 방법을 선택하겠다는 것이었으니 다들 너무 서운하거나 화내지 마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