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라는 진열대 위에 나라는 생선토막을 올리는 기분이다. 꺼려지고 달갑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하지만 던져본다. 어떻게 될 것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가졌던 첫 느낌은 ‘생소하지 않다’였다(무척 생소한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 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선호한다고, 매력 있다고 느껴 온 방식, 그 개념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으므로.
막 십대로 들어서던 어느 날 마당에 앉아 별을 바라보고 있을 때 둘째 형이 내게 한 말, “저 별들 어딘가 에서도 누군가 우리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까?” 그 이후 별은 이미 풍경이 아닌 것이 되었는데, 그러한 자각(그래, 자각이다!). 자의식의 출현이다. 마디처럼 성장의 순간마다 뚜렷이 각인된 자각의 기억들. 헤세와 니체, 그리곤 달리 열렸던 세상들.
사실 젊은 날의 자각에 얽힌 기억들을 비재현이라 말하기는 부자연스럽다. 오히려 현현(presentation)이다. 비로소 ‘눈에 듦’이다. 숨 막히는 생의 봄날 그 젊음의 역동 속에 아직 재현은 없었다. 늘 어정쩡하고 어수룩하고 어색하고 모났으니까(비재현하려면 먼저 재현해야 하는데, 당시엔 그 재현조차 들어서질 않았다).
내게 있어 재현은 ‘우려’와 함께 온 듯하다. 시위대의 중간치에서 허공에 주먹질은 할지언정 가투에 뛰어들지 못할 때의 우려,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도 내 머리론 민패가 될 거란 우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직장을 그만 둬야 함에 대한 우려, 수 년 동안 마음 맞는 이들과 마음을 나누면서도 말만 나누었다는 회의, 그에 대한 반복에의 우려.
칼집에서 칼은 무수히 뽑혀 허공을 갈랐지만 결국 무엇도 내리치지 못했다. 비재현이란 무엇인가. 혁명가가 되지 않음에야(그 규모와 상관없이) 결국 지극히 현학적인 유희와 다를 게 있을까?
작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제 가족 먹이기에 급급한 민초들, 한 평생 외곬으로 자기 길을 걸어간 장인들, 몸 바쳐 신과 그 가르침을 섬긴 수도자들, 끝까지 선비이고자 했던 선비들, 그들은 과연 비재현을 사고하지 않았던가.
선생께선 ‘개념’이라 하셨는데 내겐 ‘가치’로 와 닿는다.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과연 무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