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수련
미셸 뷔시 지음, 최성웅 옮김 / 달콤한책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미셸 뷔시의 <검은 수련>! 너무 괜찮다.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읽은 형사추리물 중 단연 최고 반열의 책이라 꼽을 만하다.(단, 빠른 전개로 생각할 틈도 없이 밀어붙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스릴러 형사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머리만 아프고 별로 일듯...) 책을 덮고 한참동안 여운이 남더라. 살인이 있고 이를 해결하는 스토리야 추리소설의 전형이지만, 그 속에 3중의 구조(화자의 입장에서)를 적절하게 조절하여 점층적으로 긴장감을 쌓아가며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는 플롯은 정말 대단하다. 암시나 복선이 아닌 듯한데 뭔가가 행간에 숨겨져 있는 듯한, 느리게 소실선을 따라가면서도 그 깊이가 얼른 잡히지 않는 그런 느낌! 그 조각 조각 숨겨진 의혹의 그림자를 쉬이 떨치지 못해 머릿속으로 쉽게 판단의 그림이 그려지지 않다가 생각지도 못한 반전으로 전율에 빠지는 순간, 한마디로 고도의 감각으로 언어를 잘 갈무리하고 있다는 감탄을 하게 하더라.(범인을 좇아 차근차근 진실에 접근하는 추리소설 특유의 묘미를 잘 살렸을 뿐만 아니라 문학성까지 갖췄다는 의미). 일본추리에서 느낄 수 없는 한 수준 위의 품격이 있었고, 유럽추리의 스케일에 미묘한 섬세함이 더해져 빛을 발한다. 보통 이런 찬사는 잘 안하는데, 이 책은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느꼈다.

 

정교한 짜임으로 놀라움을 주는 소설을 꽤 오랜만에 봤는지라 책의 프로필을 찾아보니... 프랑스 베스트셀러 1위, 추리문학상(2011년 귀스타브 플로베르 대상, 지중해 추리문학상, 코냑 추리문학 독자상, 상당크르 페스티벌 독자상, 미셸 르브룅 상, 2014년 자유비평닷컴상, 도미티 상)을 싹쓸이하다시피 했고, '비평가 추리문학상' 등 7개 문학상에 후보작으로 지명되었다고 나온다.(역시 느낌 있는 책은 어디서든지 알아보는구나.) 리뷰를 어떤 관점으로 적을까 조금 고민했는데 한 가지는 분명해지더라. 다른 독자를 위해 아무런 힌트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므로 혹시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절대로 그 뒷내용을 조금이라도 알려고 하지 마시라. 모든 미스터리 책이 그렇지만, 결정적 내용을 살짝 흘리는 헤살꾼들에게 휘둘리지 마시라.(그냥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수준의 줄거리가 제일 적당하다.) 읽는 도중에 어떤 의심(예를 들어 아이들이 너무 똑똑한 거 아니냐~ 이 할머니 도대체 뭐냐~ 등등)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시길... 전체 얼개가 이해되는 순간이 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난 아둔한지라 오르티 섬에 가는 장면에서야 소품처럼 등장하는 개 '넵튠'이 나타날 때 전체 아웃라인과 플롯이 선명하게 읽혀지더라.)

 

모네의 정원으로 유명한 지베르니 마을. 한적한 어느 새벽, 엡트 강에서 발견된 시신으로 예술의 신이 그려낸 듯한 아름다운 마을에 핏빛 균열이 생긴다. 피해자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는 엡트 강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흘러가고, 포플러 장막이 둘러싼 개양귀비 흐드러진 붉고 푸른 초원에는 신성한 침묵이 감돈다.

이 마을에 세 여인이 살고 있다.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열한 살 소녀, 매혹적인 서른여섯 살의 여교사, 마녀처럼 모든 걸 알고 몰래 숨어 지켜보는 노파. 이들에게는 비밀스러운 공통분모가 있다. 그건 마을을 벗어나는 것이다. 지베르니는 인상주의 성지이자 꿈의 정원이지만 이들에게는 액자 속 그림 같은 감옥이자 운명을 얽어매는 덫일 뿐이다.
살인사건을 계기로 세 여인의 필사적인 탈출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들 중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 그곳을 빠져나갈 자는 누구인가?
<출판사 제공 줄거리> 

 

검은 수련! 이 무채색의 암울함 속에 스며 든 인간의 맹목적이고 이기적인 광기가 나를 슬프게 한다. 살해된 남자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시 구절 "우리는 꿈이라는 죄 만들었지."(루이 아라공 <님프의 동굴>에 나오는 시라고 하네. Le crime de rêver je consens qu'on l'instaure). 꿈이 죄가 되어야 하는, "이성의 눈에 꿈은 무뢰배 Aux yeux de la raison le rêve est un bandit"가 되는 뒤틀린 갈증이 욕망의 스산함을 잉태한다. 그리하여 빛을 잃은 수련이 "애도의 꽃. 절대 완성되지 말았어야 할 슬픈 애도의 꽃"으로 운명 지어질 때, 인생무상의 덧없음이 마음을 아리게 하더라. 인생사 불여의(人生事 不如意)라... 여하간 살인을 다루는 형사 추리소설에서 적절한 애로틱함과 함께 시공간을 이렇게 창의적으로 구성하여 전율적인 반전을 끌어내는 작가의 역량은 가히 독보적인 경지라 아니할 수 없다.
정리해 보자. 추리소설의 평가 잣대로 많이 활용되는 엘러리 퀸의 10가지 관점으로 볼 때, 구성, 서스펜스(긴장감), 의외의 결말, 해결방법의 합리성, 문장, 성격묘사, 무대, 단서, 독자와의 대결 등 아홉 분야에서 별 다섯 ★★★★★, 살인의 방법 한 분야에서는 별 넷 ★★★★을 준다. 쪼잔한(?) 일본 추리에 지친 마니아는 꼭 읽어볼만한 책이라 추천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을 구글링하면서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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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01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과 관련된 추리소설은 제가 좋아하는 장르인데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

표맥(漂麥) 2015-04-02 09:00   좋아요 0 | URL
분량에 비해 의외로 느리게 읽혀진 형사미스테리였습니다. 유럽 추리는 스케일은 크나 섬세함이 좀 부족하다는 평소의 생각이었는데, 이 책은 확실히 플롯이 잘 짜여있다는 생각입니다. 내용보다는 작가의 짜임이 괜찮다는 점에서 한번 읽어보시길 정말 권해 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