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박현찬, 설흔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우연치고는 절묘하게도 난 이 책을 집기 전, 형암 이덕무의 산문집을 들추었다. 이미 사놓은 책이라 빌린 책만큼 빨리 봐지지 않았기에 여유롭게 생각해 책장에 꽂아둔 채 여러 날이 지났다. 그러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리게 되었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연암은 박지원의 호이며 박지원은 이덕무와 막역한 사이였다. 내가 책장에 꽂아둔 이덕무의 책에도 책머리에 박지원이 쓴 글이 실렸다. 참 재미있는 인연이었다. 이 책에도 연암에게 글을 배우려는 가상의 인물 지문이 나오는데 박제가가 지문을 보며 이덕무와 닮았다 칭하는 부분이 있기에 나는 더욱 이덕무와 박지원의 인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 '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의 글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으니 그런 문인에게 글쓰기의 소양을 배운다는건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연암 박지원이 돌아가신지 8년이 되던해 어느날 그의 아들인 종채에게 의문의 사나이가 책을 한 권 전해준다. 돌아가신 뒤에도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심지어 제자의 글을 베꼈다는 소문까지 귀에 들어오게 되니 여간 심란하지 않았던 종채는 사나이가 전해준 책을 읽으며 소문의 진실에 접근하게 된다. 아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의 시간 중 유일하게 오리무중에 빠진 연암협에서의 시간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바로 연암이 아끼던 제자 지문을 가르치던 시간이었다. 지문은 입신하지 않는 아버지와 반목하며 과거에 응시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사서삼경등 고서를 꿰뚫고 있으며 자신의 실력을 자만했던 지문은 아버지의 서가에서 우연히 '연암선집'을 읽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리고 연암의 글을 보며 자신이 기존에 읽어왔던 어떤 서책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에 빠지게 된다. 과거에 뜻을 둔 지문에게 연암은 과거에 응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한다. 지문은 연암의 제자가 되어 그가 내주는 문제를 풀어가면서 글쓰기의 기본기를 하나씩 익혀간다.

처음에 이 책의 제목만 보고 단순히 글쓰기를 가르치는 인문교양서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다면 나는 분명 책장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지루해 결국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팩션(Faction)의 형식을 빌어 소설적 흥미와 이론적 접근을 절묘하게 섞어놓아 한 번 책을 잡으면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글쓰기의 기본을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놓았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역사적 인물인 박지원과 이덕무등 당대의 인물과 시대상까지, 꼼꼼하고 치밀한 사전조사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독서와 글쓰기등 객관적 사실로만 전달되지 않는 것들을 매우 절묘하게 그려놓은 이 책을 통해 박지원과 박제가,이덕무등 당대의 문인들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또한 정조시대 문체반정(文體反正)으로 박지원의 글과 같이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소설이나 소품집을 금서로 규정해 규탄했던 역사적 사건도 글의 배후에 등장해 흥미를 더한다.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 글을 씀에 있어 이토록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을 살릴수도 죽일수도 있는 글의 힘을 얕게 보았던 나의 어리석음을 이 책을 통해 되새긴다. 연암이 지문에게 가르치는 글쓰기의 덕목을 들여다보니 첫째, 사물과 부러 거리를 두어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약(約)과 넓게 보고 깊게 파헤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오(梧)의 이치가 그것이오. 둘째, 옛것을 모범으로 삼되 변통할 줄 알아야 한다는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의 이치다. 셋째, 양쪽을 고려하되 반드시 새롭고 유용한 시각을 창출해야한다는 간(間)의 이치이다. 연암의 가르침을 통해 지문은 예전의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저 옛것을 고집하며 깊이를 헤아리기보다 겉만 핧았던 자신의 과오와 자만을 뉘우친 그는 글쓰기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지문과 같이 집필동안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웠다고 하며 스스로 연암에 대한 오마주라고 밝힌다. 글을 쓴다는 것은 때론 많은 인내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과연 책 속에서 박제가가 지문에게 말했던 아래의 대사는 글을 쓰기 전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 글을 쓴다는 것만큼 책임감이 뒤따르는 일은 없는 것이다. 너무도 뜨끔하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글쓰는 이라면 자고로 아래 말을 되새겨 봐야 할 것이다.

"붓 끝을 도끼 삼아 거짓된 것들을 찍어버릴 각오로 글을 쓰게나. 알겠나?"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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