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291 외딴방 이 후 드문 드문 그녀의 여러 책을 잃으며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천착하는 모습에 신작읽기를 주저했었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으로 같은 세대가 아닌 나로서는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오랫동안 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보려는 그녀의 모습만 눈여겨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려는 모습은 결코 어두운 과거와 깊게 패인 골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소설에서 윤교수가 강력히 피력하는 살아있음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희망과 누구나 한 번쯤 거쳐가는 청춘의 아픔과 성장통을 생생히 체득하길 바라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누구보다 그녀는 살아있음으로 죽은 이들에 대해 죄책감을 덜고자 끊임없이 과거와 싸워왔다는 생각도 들었다. 윤과 명서의 갈색노트로 번갈아 회자되는 이야기의 시대는 암울하다. 구체적인 시대가 언급되지 않았어도 명동성당에서 연일 이어지는 시위와 실종, 혹은 의문사로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늘진 한 시대의 특정 시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분명 작가가 겪은 아픈 과거의 흔적을 따라갔다는 것이 암시된다. 함께 해주지 못한 안타까움의 절규이다. 그러나 도대체 그들이 무엇때문에 그토록 죽음을 향해갔는지, 그리고 사라졌는지 그에 대한 실체는 자욱한 안개에 휩싸이듯 모호하기만 하다. 방황하거나 상실되고 혹은 투쟁하며 윤과 명서, 단이와 미루 네 명의 청춘은 빛을 잃고 스러져간다. 그러나 이 소설을 통해 저자의 바램대로 지금 청춘을 맞이한 이들이 희망을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상대방은 간절히 나의 목소리를 듣기 원하지만, 자신이 껴안고 있는 묵직한 슬픔때문에 남을 돌아볼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들이 지극히 이기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들 위태롭게 하루 하루를 버텨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폐부를 찌르는 상처때문에 혹은 자신이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프라고 생각했기에 등에 업힌 아이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하고 말이다. 스무살의 슬픔과 눈물에는 목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고 소멸될 것처럼 허무하고, 두려우면서도 다가가고 싶은 청춘의 망각에 깨달음이란 없다. 그저 작가가 오랫동안 껴안고 있듯 젊음이란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스며드는 일인 것이다. 윤과 미루, 그리고 명서와 단이는 이 순간을 잊지 말자고 수없이 서로에게 다짐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강을 건너고 그로 인해 평생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슬픔을 안겨준다. 젊음이란 죽음의 다른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20대는 매우 고독하고 우울하다. 죽음과 상실을 통해 보편적인 청춘의 감성을 이끌어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가 아직도 제자리걸음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소설 역시 과거 어느 시점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다른 시각이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닿지 못한 채 오랫동안 표류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눈물겨운 노력은 보이지만 치열함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고집스럽게 과거에 연연해 쉬이 상처를 딛고 일어서기 힘들어 보였던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