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과 밤배 - 하
정채봉 지음 / 까치 / 1999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다시 집기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다. 나의 순수했던 시절과 조우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책꽂이를 가장 많이 차지했던 <샘터> 잡지에서 "생각하는 동화"라는 글로 나의 철없던 시절 치기어린 마음을 잠재우던 정채봉 작가였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간에 도서관에서 그의 책을 찾아 읽고 가슴에 새겼던 일이 멀지 않은 시간의 경험처럼 생생하다. 작가의 아이같은 웃음과 미소를 떠올리며 난나의 순수함에 물들고 싶은 나는 영원히 철들고 싶지 않은 철부지 어른아이였다. 그 때 그의 책을 읽었던 순수한 열정을 되새기기 위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초승달과 밤배>를 읽게 되었다.
 

군부독재시절, 빨갱이로 몰려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도망간 어머니. 부모에게 버림받은 주인공 난나는 곱추동생 옥이와 할머니, 외팔이 삼촌과 멀리 백령도가 보이는 바닷가 섬마을에 살고 있다. 가난하지만 고운 심성과 지혜롭고 곧은 마음을 지닌 난나가 성인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소설은 섬마을의 목가적인 분위기와 서울의 삭막하고 우울한 분위기가 대비되어 난나의 심리적 변화를 뚜렷히 엿볼 수 있다.


어떤 책이든 처음 읽었을 때와 두번째 읽었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처음과 두번째 사이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생경함은 더해가고 전혀 다른 감동과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13년전의 내 마음과 감동은 지금에와 느끼는 여운과는 전혀 다른 이상과 순수의 질문을 던졌었다. 정채봉 작가 특유의 사색과 깊이 때문인지 사춘기시절 나의 심미안은 고즈넉한 섬의 바람에 자갈처럼 단단히 영글어가던 난나의 맑고 투명한 성정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저는 일월의 들녘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어요. 텅 빈 들, 얼어붙은 개울, 앙상한 나뭇가지가 전부이지만, 이 들녘의 땅껍질을 가만히 떠들어보셔요. 풀씨들이 움을 준비하고 있고 개구리가 꿈결 같은 아지랑이를 느끼고 있지 않을까요? 개구리의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듯이 제 가슴도 그렇게 오는 봄을 향해서 두근거리고 있습니다. 나무 줄기에 물이 오르듯이 제 가슴의 가장자리에도 엽록의 빛이 스미기 시작하는 저는 일월의 들녘입니다.   -p.27(하)
 

하지만 다시 읽은 <초승달과 밤배>에서는 닮고 싶었던 난나의 때묻지 않은 천진함과 솔질함보다 청년이 되어 도시로 나간 난나가 겪는 열패감과 삶의 그늘, 고된 노동자로 하루를 살아가고 방황하는 모습이 더 크고 안타깝게 다가왔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으로 어두운 내면을 감춘 도시인들의 불안함이 그에게 물들어가고 점점 피폐하게 변해가는 걸 지켜보는 일은 괴로움 그 자체였다. 고요하고 잔잔한 수면에 무심코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큰 파문을 일으키듯 난나의 마음에 인 소용돌이가 성인이 된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변한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처음과 두번째의 간극사이 변해버린 내 마음을 원망해야 할 일이었다. 난나의 동생 옥이처럼 작고 낮은 것들이 착하다는 걸 잊고 지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운 과거가 아니라 가까운 미래의 나를 일깨우는 소중한 책으로 기억에 새겨두기로 하였다. 
 

작은 것들을 왜 생각해? 큰 것들이 위대한 거야."

"작은 것들은 착한 걸."

"아니야. 큰 것들이 좋아. 나는 고래가 좋고 군함이 좋아. 빌딩이 좋고 거인이 좋아. 그래, 나는 고래잡이배의 선장이 되겠어."

"오빠와 나는 반대다. 나는 작은 것이 좋은데...... 눈송이가 좋고 피래미가 좋아. 피래미가 좋아. 돛단배가 좋고 초가집이 좋아. 냉이꽃이 좋고 아기가 좋아."    -p.220(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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