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과 사람, 풍경과 풍경.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낯선 사진안에는 그의 열정이 고스란히 숨어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찍어온 사진과 글이라는 평이한 형식은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처음 책을 집어들며 가졌던 뻔할 것이라는 판단은 책장을 넘길수록 심장이 두근거리는 설레임으로 바뀌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듯했다. 그렇기에 여행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다는 오만도 부끄러워졌다. 그의 글에서는 여행에 관한 짧은 단상이나 개인적 감상이 흔해빠진 스타일리쉬함을 몸에 두른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여정으로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에서 만난 청년 던, 멕시코에서 만난 물장수 아저씨, 파리토박이면서 막노동으로 경비를 모아 파리를 여행하는게 일이라던 청년, 너무 많이 끌어올린 책때문에 무너져버린 2층 가게의 할아버지, 옥수수 두 개가 담긴 봉지를 그에게 내밀던 페루의 옥수수 청년, 썩어들어가는 동물가죽 냄새를 맡으며 힘들게 일하는 모로코 페스의 사람들, 불가리아로 가는 새벽기차안에서 만난 북한사람들, 헤어진 남자친구가 와보고 싶다던 시칠리아를 혼자 여행하던 안젤라, 베트남 산호섬에서 만난 한국혼혈인 '김'... 여행지에서 만난 모두가 그에게 친절하고 상냥했던건 아니지만 그는 좋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다시 사람들 틈바구니로 들어간다. 
 

습관처럼 다닌다. 습관처럼 여행을 다니려고 한다. 여행을 다니는 습관만큼 내가 사람을 믿는 건 사람에게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으로부터 받을 게 있다는 확신에 기대는 바람에 나는 자주 사람에 의해 당하고 패한다.  ......(중략)
그렇다고 항상 당하는 쪽인 나같은 이에게 쓸쓸함만 남는 건 아니다. 고맙게도 쓸쓸하면 할수록 다시 사람을 떠올리며 사람의 풍경 안으로 걸어갈 힘이 생긴다.


때론 '던'처럼 그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는 현지사람들때문에 여행자라는 자각을 뼈저리게 느끼게도 하지 않았을까. 이방인이라는 철저한 외도에도 미친 듯 꿈틀거리는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런 발동이 느껴진다. 코 앞에 집을 두고도 멀리 떠나온 기분에 젖어보기 위해 여관에서 밤을 보낼만큼 익숙한 것의 안락함도 가족이나 주변사람들도 그의 발을 붙잡지는 못한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여행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의 온기를 확인하는 여정, 누군가를 더 그리워하게 만드는 여정, 그 안에서 그는 희노애락을 발견하고 삶이라는 거대한 발자취를 따라간다. 


누구든 떠나는 순간이 되면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뒤를 돌아보게 된다. 뒤를 돌아보면서 거꾸로 매달려 있던 자신과 가능하다면 한동안 품고 살았던 정신의 부산함을 그 자리에 걸어두고 떠나려 한다. 그래서 돌아본다는 것은 씁쓸한 일이 되고 수심 깊디깊은 강을 건너는 일처럼 시작하지 말아야 했을 일이 돼버린다.
 

여행에서 그 곳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친해진다는건 내게 너무도 겁나는 일이다. 정확한 의사전달도 어려울 뿐더러 그들의 문화나 생활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간극도 염려스럽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덤벼들어 바가지를 씌우려거나 이방인 취급으로 우습게 볼 때는 잔뜩 주눅이 들어버린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여행은 애태우게 만든다. 사람냄새가 진동하고 낯선 공기가 등을 떠밀고, 웃음짓는 사람들이 결국 나와 똑같이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빛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다. 나에게 마음을 열어줄 낯선 이를 찾아나서고 다시 한 번만이라도 그 곳을 밟고 싶다는 기대를 키우는 것이며, 그 기억만으로도 눈이 매워지는 게 여행이라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지금 떠날 수 없다면 언제라도 떠날 수 없다는 말을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도 있다. 지금 필요한 건 뭐? 바로 열정이라고 그는 여행의 시작을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있었다.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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