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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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카프카 이 후 얼마나 고대하던 그의 장편소설이던가. 사놓은지 2주가 지나도록 아까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끼던 책을 부모님께 가는 기차안에서 설레하며 첫장을 넘긴 후, 잠깐씩 몸을 뒤척일 때를 빼놓곤 5시간을 내리 읽으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역시 하루키라는 감탄을 속으로 연발하며 뒤이은 전개를 혼자 상상해보는 것으로 짧은 추석을 보냈다. 무게때문에 1권만 가져왔다는 것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그의 책을 펼치기 전에는 어떤 것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장을 덮을 때까지도 그가 곳곳에 장치해놓은 수많은 의미를 해석하느라 머리속을 비워야 했다.


1권을 읽는 내내 충격적인 진실과 전개에 2권에서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지, 중심을 어떻게 일으켜세울지 궁금했는데 그가 의도한 것은 사랑이었구나 하고 뒤늦게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그도 그럴것이 1권을 읽으며 너무 많은 색깔을 입혀 다의적 해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교묘하게 판타지의 경계를 넘나든다. 책의 첫머리에도 등장하며, 선구의 리더가 아오마메에게 말했던 재즈곡 [it's a only paper moon]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네가 나를 믿어준다며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라는 가사는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어긋나 들어가버린 1Q84년의 세계로 독자가 빠져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주술적인 힘까지 발휘한다. 이 책의 전체평을 작가자신이 후카에리의 <공기번데기>를 평하던 덴고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려주고 있어 더 흥미롭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적어도 사람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데가 있어요.
전체적인 줄거리는 판타지적인데 세부 묘사는 유난히 리얼합니다. 그 균형이 아주 좋아요. 독창성이나 필연성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어떨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은 그런 평가를 할 수준도 못 된다고 한다면 뭐, 그것도 맞는 얘기일 거에요. 하지만 여기저기 걸리면서도 어떻든 다 읽고 나면 그 뒤에 찡한 여운이 남아요. 그게 어쩐지 불편하고,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느낌이라고 해도 말이죠.    -p.38


그래, 1984년도, 1Q84년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구성요소를 갖고 있어. 자네가 그 세계르 믿지 않는다면, 또한 그곳에 사랑이 없다면 모든 건 가짜에 지나지 않아. 어느 세계에 있건, 어떠한 세계에 있건, 가설과 사실을 가르는 선은 대개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아. 그 선은 마음의 눈으로 보는 수밖에 없어."  -p.323


7년만에 발표된 그의 신작 제목이 뒤늦게 1Q84라는 걸 알고(처음엔 iQ84라고 짐작해버렸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연관짓지 않을 수 없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오마주로 그 세계를 일부 옮겨오면서 자신의 주특기인 기묘한 판타지를 엮는 그의 솜씨는 탁월했다. 공기번데기에 매료된 책 속의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나 역시 그가 만들어낸 1Q84년의 시간속에 하염없이 끌려가는 걸 바라봐야 했다. 또한 오래전부터 '상실'이라는 주제로 설득력을 다져온 작가이고 보니 글을 읽는 내내 느끼는 공허함 대신 삶에 대한 강한 성찰과 그것을 사랑으로 메우려는 헌신적인 노력은 비장하게 다가온다. 2권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둘의 존재감이 어릴적 안고 있는 트라우마로 외로워했던 자신들을 지탱해준 힘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운명적 사랑임을 역설하는 부분은 참으로 절묘하다. 누구에게나 이런 첫사랑의 생생한 기억이 가슴속 밑바닥에 침잠해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나라는 존재의 핵심에 있는 것은 무無가 아니다. 황폐하고 메마른 사막도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중심에 있는 것은 사랑이다. 나는 변함없이 덴고라는 열 살 소년을 그리워한다. 그의 강함과 총명함과 다정함을 그리워한다. 그는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육체는 멸하지 않고, 서로 나누지 않는 약속은 깨지는 일이 없다.   -p.133 


아오마메에게 손을 잡혔던 수십 초 동안 덴고는 무척 많은 것을 목격했고, 마치 카메라처럼 정확하게 그 영상을 망막에 새겨두었다. 그것은 그가 고통에 찬 십대를 살아가는 데 밑받침이 되어준 정경의 하나였다. 그 정경은 항상 소녀의 강한 손가락 감촉과 함께였다. 그녀의 오른손은 고통에 허덕이며 어른이 되어가는 덴고에게 항상 변함없이 용기를 불어넣었다. 괜찮아, 너한테는 내가 있어. 그 손은 그렇게 말했다.
너는 고독하지 않아.   -p.457


그리고 주제를 '사랑'이라는 한가지로 귀결시켜버리기엔 긴 스토리안에 작가가 찔러본 뜨거운 감자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확대해석이라도 나는 이 문제를 현시점의 사회적 이슈들과 연관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들의 폭력앞에 무력하게 죽어간 딸과 친구를 잃은 상처로 살인자가 되는 아오마메와 노부인의 완벽한 광기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고민하게 만들었고, 자연농법 단체에서 종교법인으로 거듭난 '선구'의 리더가 행한 다의적 교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딸을 비롯해 미소녀들과 관계를 맺은 부분은 그릇된 종교관으로 여러 여자를 취한 어느 사이비 종교의 교주를 떠올리게 만들었다.요즘 아동성폭력으로 뒤숭숭한 사회분위기탓인지 후카에리와 쓰바사의 일이 결코 책 속의 가상현실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 되었고, 작가가 들이댄 종교적, 도덕적 이중잣대가 혼란스럽게 여겨졌다. 어찌되었든 작가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보다 더 원대한 두 남녀의 사랑이라도 과정에 담긴 주인공들의 상처와 상실을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머리속이 좀 복잡해진다.


그 이후로 아오마메는 노부인과 비밀을 서로 나누고 사명을, 그리고 광기와도 비슷한 어떤 것을 함께하게 되었다. 아니, 그것은 완전한 광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경계가 어디인지 아오마메는 판별할 수 없었다.    -p.468
   


책장을 덮은 후에도 의문이 긴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뭔가 결정적인 것을 남겨두고 끝나버린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나마 분명한 것은 달의 존재감처럼 절대적이고 따스한 온기를 품은 책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공유했던 1Q84년의 시간에 두 개의 달이 존재했다는 묘사는 달이라는 천체자체가 사라져버린 이외수의 <장외인간>이란 책이 떠오르게 했다. 새삼 달의 상징성에 주목한 두 작가의 마음이 이렇게 통한 걸까 싶었다. 길지만 짧게 느껴진 1Q84를 읽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며 일그러졌지만 또렷한 모양의 작은 달이 어딘가에서 지상을 비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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